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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lee Mar 29. 2020

섭식장애 두 여인
연민·우정·애정(?)

글로 읽는 영화

’ 301·302′는 한국영화로서는 보기 드문 여성영화였습니다.


박철수 감독의 ‘안개기둥’이란 영화 혹시 보신 분들 있을까요? 

전 아직도 그 영화 속 한 장면이 생생합니다. 맞벌이 부부였던 여주와 남주... 여주는 일이 끝나고 직장에서 집으로 돌아온 이후에도 허겁지겁 가사 일에 매달립니다. 남편은 친구들을 불러 집에서 카드 게임을 하고 있었죠. 


장난꾸러기 아들이 남편과 남편 친구들이 카드 게임을 하고 있던 테이블 아래로 숨어 버리고 여주인공인 최명길은 아이를 찾기 위해 그 테이블 밑을 기어들어갑니다. 그 순간 최명길의 얼굴에서 스쳐 지나가는 낭패감... 전 그 얼굴을 아직도 기억합니다. 마치 거울 속 제 얼굴을 보는 듯했으니까요... 


남성 중심의 사회로 돌아가는 가부장적 가정에서 남성들이 모여 카드 게임을 하는 테이블 밑을 기어들어가는 그 집 안주인의 복잡 미묘한 얼굴 표정이 너무 잘 묘사를 해서 박철수 감독이 그려내는 여성의 심리에 대해 나름(?) 인정을 하게 됐고 그 후 박철수 감독의 작품들을 찾아보게 된 것입니다. 301·302는 감독에 대한 믿음으로 선택한 영화였습니다. 


'안개기둥'의 완성도를 가능하게 한 건 순전히 여주인공 역할을 맡았던 최명길의 연기가 큰 힘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묵배미의 사랑'에서의 그녀의 연기를 기억하고 있던 저로서는 한국 여배우 중, 그 연령대에 몇 안 되는 얼굴 연기가 가능한 배우로 손꼽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그 이후로는 영화보다는 드라마에만 출연해 디테일한 연기 내공을 볼 수 없어 안타깝습니다. 


정치인 남편을 내조하느라 정당인으로서의 삶까지... 참 연기 잘한다 싶었던 연기자의 모습은 이제 없어지고 생활인으로서의 연기자만 남은 듯해서 살짝 아쉽죠. 오늘 영화의 여주인공은 최명길이 아니었는데 속없이 최명길의 연기만 계속 칭찬했네요. 


하여간 한국 영화감독으로서 흔치 않게 여성들의 세심한 심리묘사를 그려내는 박 감독의 세계관이 다소(?) 궁금해졌습니다. 너무 마초 같은 남성들만 주위에 가득하니 영화판에서 남성 감독이 그려내는 여성성은 그 진정성을 차치하고라도 신선하기만 한 거죠. 301·302호, 이 영화 역시 남성에 의해 소외된 여성들이 이야기입니다.


작품 연도   1995년

감독           박철수

주연           황신혜·방은진·김추련 

credit / en.wikipedia.org


원룸 301호와 302호에는 서로 다른 섭식장애를 가진 두 여자가 살고 있습니다.  

301호 송희(방은진 분)는 소위 말하는 음식만 밝히는 뚱뚱한 이혼녀입니다. 못생긴 건 용서해도 뚱뚱한 건 용서할 수 없다는 요즘 세상에서 도대체 뭘 믿고 그렇게 뚱뚱하냔 말이죠. 하지만 그녀에게는 음식을 맛깔스럽게 만들어내는 재주가 있었습니다. 


남편에게 온갖 종류의 맛있는 음식을 해주며 애정을 쏟지만 남편은 이런 아내의 수동적이고 맹목적인 헌신을 부담스러워합니다. 맹목적 헌신과 이를 부담스러워하는 부부 사이의 종착역은 결국 외도로 이어집니다. 송희는 결국 남편의 외도를 목격하고 남편이 사랑하는 애완견으로 맛있는 수프를 끓여낸 후 남편과의 모든 관계를 끊어 버립니다.


옆집 302호는 301호 송희와는 반대로 말라깽이 이혼녀 윤희(황신혜 분)입니다. 그녀는 물을 제외한 모든 음식을 먹기만 하면 곧장 변기로 가서 토해야 하는 섭식장애를 앓고 있습니다. 단지 다이어트 때문일까요? 하지만 그녀에게는 남모를 깊은 상처가 있습니다.


사춘기 시절 그녀는 의붓아버지로부터 습관적으로 성폭행을 당했습니다. 그녀의 어머니는 폭력적인 남편과 가난 앞에서 어린 딸을 보호하지 못하고 성폭행의 현장을 눈감아버립니다. 


윤희는 어린 시절 의붓아버지가 엄청나게 음식을 먹어댄 후, 다시 자신을 탐했던 기억을 갖고 있습니다. 그녀에게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이후 성행위를 한다는 상징으로 이어졌던 것입니다. 치유되지 않는 성폭행의 깊은 상처로 인해 이제 윤희는 성관계뿐 아니라 먹는 것 자체를 거부하게 됩니다. 그 어떤 부드러운 음식도 그녀의 상처를 달랠 수는 없습니다. 


301호의 송희는 새로 이사 온 옆집의 윤희에게 이것저것 음식을 만들어 대접합니다. 그러나 윤희는 그 음식을 매일 쓰레기통에 버립니다. 송희는 자신의 친절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남편에게 받았던 상처가 다시 한번 덧나게 되고 윤희에게 폭력적으로 달려들게 됩니다.


윤희는 이런 송희에게 자신의 대인 기피증과 거식증이 생기게 된 의붓아버지로부터의 성폭행 경험을 눈물로 털어놓게 되는 것이죠. 서로의 과거를 알게 된 이들은 결국 상대방에게 진한 연민을 느끼고 빠른 속도로  친해지게 됩니다.

송희가 섭식 장애를 겪고 있는 윤희를 위해 만든 대구 스테이크. 이 부드러운 음식물 조차 목을 넘기지 못할 만큼 윤희의 상처는 깊습니다. credit / IMDB

이 영화에서 송희의 취미가 취미다 보니 온갖 종류의 요리가 등장합니다. 특히 송희가 살고 있는 원룸의 실내에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각양각색의 조리 도구가 걸려 있고 가지각색의 음식 재료들로 널브러져 있죠. 밤낮으로 음식을 만들어 남에게 먹임으로써 삶의 만족감을 느끼는 송희가 음식만 먹으면 토해대는 윤희를 위해 만들어주는 음식이 있습니다. 바로 대구 스테이크. 부드럽기 그지없는 대구살을 버터 두른 팬에 살짝 구워 소스를 찍어 먹는 이 요리는 송희의 윤희에 대한 연민과 우정, 애정(?)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바로 그런 요리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의 마지막은 결국 윤희의 병을 고치기 위해 윤희가 송희의 요리 재료로 생을 마감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좀 으스스하죠. 정상적이지 못한 어린 시절의 기억은 결국 이렇게 부메랑이 돼서 성인이 된 후에도 괴롭히나 봅니다.


영화의 마지막이 윤희를 재료로 한 인육 요리이지만... 그래서 현실성이 떨어지고 황당했지만... 뭐랄까요? 그 어떤 것으로도 치유되지 못한 깊은 상처의 막다른 길은 자의든 타의든 죽음으로 귀결된다는 너무 단순한 공식을 우리가 외면하면서 살았구나. 


이래서 상처는 치유받아야 하고 치유해야 합니다. 그냥 덮어만 둔다고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 순간은 아파도 상처를 드러내 공유하고 저잣거리에 흘러 다니게 둬야 바람맞아 꾸덕거려지는 황태처럼, 더 지나면 건조돼서 황태 분말로 사라지는 것처럼 그렇게 말입니다. 


내 상처들은 지금 어디쯤 와있을까요? 이제는 다 나았다고 생각했는데... 가끔 문득 어떤 단어에 가슴이 움찔 놀라는 이런 반응을 보일 때가 있습니다. 제 상처가 분말이 되어 바람에 날아가려면 시간이 더 필요한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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