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alee Jun 11. 2019

존경과 사랑의 갈림길에서...

하나의 선택 / L'assedio

저는 그런 공상을 많이 합니다. 지금의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아 과거의 선택을 후회하고 과거의 내가 선택하지 않았던 또 다른 길을 마음속으로 그려보는 거죠. 남녀공학이 아니라 여대를 다녔다면 어떠했을까? 그때 그 직장 대신 다른 직장을 다녔다면... 그때 결혼을 하지 않았다면... 아이를 낳지 않았다면... 가지 않았던 길에 대한 아쉬움, 상대적으로 지금 걷고 있는 길에 대한 후회...


인생은 여러 갈래의 길 속에서 하나만을 선택해야 한다고 늘 배웠고 또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는데 이제 내가 선택하지 않았던 다른 갈래의 길을 가고 싶어 하는 건 꼭 경험해봐야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저의 아둔함 때문인지요?

아마도 특별히 제가 남달라서가 아니라 언제나 하나의 선택만을 해야 하는 인간들의 딜레마가 아닐까 싶습니다. 단 하나의 선택은 나머지 여러 가지 추측이 가능한 미래를 포기해야 하는 아쉬움을 남기기 때문이겠죠.


이런저런 생각이 많은 요즘, 베르톨루치 감독이 만든 '하나의 선택'이란 영화는 제 눈을 끌기에 충분한 영화였습니다.  예술이냐 외설이냐 논쟁을 불러일으킨 영화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를 만든 감독이었다는 것만으로도 눈길을 끌만한데 그가 젊은 시절 막시스트였다는 것을 알게 됐을 때 느꼈던 그 황망함이란...


좌절된 정치 이상이 난무하고 정치가 모든 의식을 억압하는 사회... 구호로 바꿀 수 있는 게 이 세상에 하나도 없다는 최종적인 결론에 도달했을 때, 우리는 유난히 절망적으로 성(性)에 탐닉하는 영화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묵배미의 사랑'... 그 질펀한 리얼리즘의 세계에서 '나쁜 영화'를 거쳐 '거짓말'이라는 일탈의 세계로 빠져드는 장선우 감독의 행보를 저는 이런 관점으로 이해합니다. 이는 영화뿐이 아니겠죠. 소설도 마찬가지 일니다.


장정일의 '내게 거짓말을 해봐'에서 시작된 사회의 검열이 어떻게 작가의 창작 의욕을 거세시키고 자기 검열에 시달리게 하는지, 그의 작품인 '보트 하우스'를 읽으면 작가의 절절한 고뇌를 어렴풋하게나마 느낄 수 있습니다.


아무리 목청을 돋궈도 고쳐지지 않는 건 정치 현실만은 아니겠지요. 천박함과 무지함으로 똘똘 뭉친, 경박함을 무기 삼아 이 사회에서 득세하는 인간들에게는 삐딱한 시선으로 조롱하고 침을 뱉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되기도 한다는 걸 이젠 저도 인정하려 합니다.


 '하나의 선택'이 좀 다른 길로 새어버린 것 같지만 저는 하여간 이 영화의 감독이 베르톨루치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주저 없이 볼 수 있었죠. 영화의 줄거리는 좀 단순한 편입니다. 이름 모를 아프리카의 한 나라. 하지만 이곳은 후진국이 대개 그러하듯 군부 독재자가 서슬 퍼렇게 자신에 대한 충성을 강요합니다.


교실 칠판에 '리더'와 '보스'라는 단어를 적어놓고 이 두 단어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아이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한 교사가 있습니다. 하지만 사운드는 모두 죽어 있죠. 사막을 가로지르는 지프 두 대 사이로 열심히 자전거 페달을 밟고 있는 여주인공의 모습이 보이지요. 지프의 굉음도 사막의 거센 바람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다만 화면은 스크린 가득 지프 두 대 사이에서 어쩔 줄 몰라하는 여주인공 산두레이만을 지켜볼 뿐입니다.

자전거를 타고 남편을 만나러 가던 산두레이를 가운데에 포위하며 지프 두 대가 먼지를 날리며 달리고 있다.  이 영화에서 지프는  야만성을 상징하고 있다. Photo IMDb


지프 두 대는 미래의 새싹인 어린이들에게 '리더'와 '보스'를 가르치려 한 발칙한 교사를 끌어내 어디론가 멀리 끌고 갑니다. 그는 다름 아닌 자전거 페달을 밟던 산두레이의 남편입니다. 남편을 만나러 들뜬 표정으로 달리던 산두레이의 앞에 무자비하게 끌려가는 남편이 보이죠. 극도의 공포를 이기지 못하던 그녀의 두 다리를 타고 오줌이 흐릅니다.


산두레이는 남편을 어디론가 끌고 간 조국을 떠나, 로마에서 의과대학을 다니며 열심히 생활합니다. 아직 그녀는 남편의 소식도, 그의 생사도 알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그와의 기억은 늘 잊지 않고 있죠. 그녀의 낡은 트렁크 안에는 그와의 정다웠던 한때를 기억하게 하는 사진들과 몇 가지 소품들, 그리고 남편이 남기고 간 물음표 그려진 오선지가 가지런히 놓여 있습니다. 산두레이는 이곳 로마에서 킨스키의 집에 가정부로 일하며 공부를 하지요.


킨스키는 영국의 피아니스트로 지금은 아무런 활동도 하지 않은 채 숙모에게 물려받은  낡은 이 대저택에서 아이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며 하루하루를 쥐 죽은 듯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남자입니다. 이런 그에게 새로운 변화가 생겼습니다. 모래사막의 횡횡한 바람 소리, 우거진 밀림에서 울리는 드라마틱한 리듬, 이국적인 향신료에서 풍기는 검은 냄새...


그에게 산두 레이는 아련한 가슴 설렘이자 새로운 창작력을 고취시키는 예술혼의 상징입니다. 킨스키가 피아노를 연주하면 산두레이는 조각품 하나하나를 걸레로 훔쳐 먼지를 닦아냅니다. 이들은 결국 무언가를 깨끗이 만든다는 점에서 같다고 할 수 있죠. 하나는 영혼을 깨끗이 닦아내고 다른 하나는 공간의 더러움을 닦아내는 것이지요. 걸레질을 훔쳐보는 킨스키... 걸레로 훔치면서 피아노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산두레이...


이들은 돌고 도는 나선형 계단을 경계 삼아 위층과 아래층에 따로따로 기거합니다. 산두레이가 살고 있는 아래층에서 위를 올려다보면 나선형 계단 난간의 주물로 만든 꽃장식이 햇빛을 받아 아름다운 그림자를 만들어 내죠. 그 부드러운 그림자는 마치 오선지를 가득 메운 음표들이 오선지를 뛰쳐나와 킨스키의 손가락을 통해 피아노 위를 달리는 것과 같이 이 영화를 아름답고 감성적인 분위기로 끌고 가기에 충분한 이미지 요소입니다.


아! 그리고 제가 느끼기에 이 영화의 화면을 유려하게 만드는 요소가 또 하나 있습니다. 그건 바로 아프리카를 상징하는 그 울긋불긋한 천들, 장식품들이죠. 산두레이의 검은 피부에 기가 막히게 잘 어울리는 빨간 스웨터, 그녀의 허리에 아무렇게나 두른 아프리카 문양이 프린트된 천 조각들, 원시적이지만 건강함을 뿜어내는 아프리카 문화에 매료된 킨스키가 벽에 걸어놓은 타피스트리...

산두레이가 거주하는 아래층과 킨스키가 살고 있는 위층을 구분시켜주는 나선형 계단. 햇빛을 받아 수려하게 빛나는 나선형 주물 계단의 영상미가 유려하다. Photo IMDb


이전에 킨스키의 낡은 대저택을 가득 채웠던 서양문물의 골동품들은 중개인의 손을 거쳐 없어지고 대신 아프리카의 장식품들이 하나둘씩 그의 낡은 대저택을 채워갑니다.  


하지만 킨스키의 사랑은 자신의 모습만을 비추는 유리벽 안의 사랑이었습니다. 킨스키가 서툰 사랑을 고백할 때 산두레이는 자신은 이미 결혼한 몸이고 자신에겐 존경하는 남편이 있다고 울부짖죠. 그리고 킨스키가 자신을 위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말을 비웃습니다. 생사조차 확인할 수 없는 그녀의 남편을 감옥에서 꺼낼 수 있느냐고 그를 다그칩니다.


나를 사랑한다면, 뭐든지 할 수 있다면, 내가 가장 원하는 그걸 해줄 수 있느냐고 말이죠.

킨스키는 이제까지 너무 몰랐던 산두레이의 과거에 충격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녀를 사랑한다면서 그녀가 건너온 아프리카라는 대륙에 무지했던 자신을 뉘우치죠. 그리고 그는 아프리카인들이 모여 예배를 보는 교회를 다니고 아프리카인들이 모여 장사를 하는 시장에 나가 물건을 사고, 자신의 집에 그 낡을 대로 낡아빠진 서양문명을 상징하는 골동품들을 내다 팝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자신이 지금까지 절대적인 가치라고 여겼던 서양 고전 음악 대신 아프리카의 리듬에 몸을 까딱거리고 그 리듬에 따라 음악을 만들어내죠. 서툰 사랑 고백으로 쓰디쓴 경험을 한 킨스키가 아무 대가도 없이 쏟는 산두레이에 대한 사랑은 절대적이면서 전폭적이죠.


자신의 문화를 버리고 그녀의 문화를 배우는 것, 그리고 그 문화에 기꺼이 동참해 즐기고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는 것, 킨스키는 이 세상에서 어느 남자도 해내지 못할, 아니 별로 하고 싶지 않고 그렇게까지 사랑을 구걸할 필요가 있을까 싶은, 사랑의 방법을 스크린 너머에서 우리들에게 보여줍니다.


산두레이의 남편을 구해내기 위한 킨스키의 노력은 눈물겹습니다. 자신의 생계 수단이자 자신의 분신이라 할 피아노까지 팔아버린 그는 피아노가 실려가기 전 마지막으로 자신의 손님들인 어린 학생들을 모아 놓고 아프리카 리듬으로 작곡한 피아노 곡을 연주하죠.


남편의 석방을 알리는 편지가 도착하고 산두레이는 이 모든 게 킨스키의 노력이었음을 알고는 그에게 진정 감사의 말을 전하죠. 그리고 이틀 뒤 새벽 그가 도착할 거라는 말을 합니다.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모든 걸 다 해주었던 그 남자는 축하의 말을 전합니다. 그러나 표정은 너무 쓸쓸하죠. 남편과 파티를 하기 위해 산두레이는 삼페인을 사고 옷도 하나 장만합니다.

 

마침내 내일 새벽이면 꿈에도 그리던 남편이 돌아올 시간... 하지만 산두레이는 행복하지만은 않습니다. 그녀의 서성거림에는 조급하게 남편을 기다리는 모습보다 이 선택이 과연 잘한 것인지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자문해보는 괴로움이 묻어납니다.


사랑의 아픔을 술로 이기려는 듯 만취한 킨스키는 침대에 곯아떨어지고, 선택의 순간이 차츰차츰 다가오자 산두레이 역시 안정을 찾지 못하다 급기야는 남편과 함께 터뜨려야 할 샴페인을 따서는 한 병을 다 마셔버립니다. 그리고는 킨스키의 침대로 가서 그의 옆에 자신을 가만히 누이지요.


새벽 공기를 가르며 먼 나라에서 달려온 이방인을 태운 택시 한 대가 킨스키의 낡은 저택 앞 언덕을 따라 미끄러져 들어옵니다. 그리고는 벨을 누르는 검은 손가락만이 화면 가득히 클로즈업되죠. 한 번 두 번 그리고 세 번... 놀라 잠에서 깬 킨스키와 산두레이의 황망한 얼굴이 아주 잠깐 스쳐 지나갑니다.


여섯 번째 벨이 울렸을 때 거의 울먹일 듯한 산두레이가 대에서 일어나고... 이어 외국 여행길에 만날 수 있는 낯선 언덕길이 우편엽서의 한 장면처럼 스크린 가득히 나오며 이 영화의 엔딩을 알리는 자막이 올라가죠.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킨스키가 산두레이에게 쏟아도 쏟아도 채워지지 않는 감성의 욕망을 조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제가 느끼기에 그가 원한 건 산두레이의 탄력 있는 육체도, 바르게 살고자 하는 그녀의 정신세계도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다림질에 열중하는 모습... 아프리카 음악에 맞추어 흔드는 가벼운 몸짓... 킨스키에게 산두레이의 일거수일투족은 죽은 듯 고요하던 자신의 메마른 생활에 활력 그 자체였겠죠. 그는 그녀의 이국적인 분위기에 끌렸고 활기찬 생활에 매료되었습니다. 피아노 너머로 그녀를 훔쳐보며, 스스로 몰입했고, 자신의 사랑에 취했지요.


이 영화를 보면서 어쩌면... 정말 어쩌면... 사랑은 일방적으로도 소통이 가능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지금까지 사랑은 일방적인 소통이 아닌 쌍방향의 소통이어야 한다고... 두 사람의 커뮤니케이션이어야 한다고 굳게 믿었던 제가 말이죠.  


아닐까요? 저는 좀 혼란스럽습니다. 아니, 이런 헌신적인 사랑은 받아보지도... 꿈꿔보지도 아니했기에 킨스키의 사랑은 참 낯섭니다. 그의 헌신이 결코 공기 중에 부유하는 먼지처럼 가벼운 것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왠지 허해 보이고 위태로워 보이는 건 왜일까요?   


나선형 계단을 관통하는 벽장 안의 도르래를 통해 한 송이 꽃을 내려보내고, 숙모로부터 물려받은 반지를 내려보내는 헌신적이지만 일방적인 사랑... 위태롭게 밧줄에 매달려, 산두레이의 남편을 구해낼 비자금이 되기 위해 내려오는 킨스키의 피아노... 이 영화에서 사랑의 증거는 위에서 아래로, 그리고 킨스키로부터 산두레이에게로 내려옵니다. 하지만 이들 사랑의 증거는 모두 위태로운 줄에 자신의 운명을 기탁한 채, 산두레이에게 암묵적으로 단 하나의 선택만을 강요하지요.


감독이 씨네 21에 인터뷰한 것을 읽다 보니 이런 말을 했더군요. 장 콕도의 대사를 인용했다면서 말이죠.  '사랑은 없다. 사랑의 증거만 있을 뿐'이라고... 우리도 그러할까요? 단 하나의 선택으로 한때 사랑이라고 믿었던 것들... 지금 우리 곁에 사랑은 사라지고 사랑의 증거라 할 것들만 남아 있나요?


하지만... 하지만 말이죠. 사랑은 남지 않고 단지 증거만이 남을 뿐이라 해도 저는 그리워하면서 증거만 남아 가는 사랑을 음미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데 제게는 너무나 어려운 일이군요...


매거진의 이전글 달콤한 행복의 다른 이름, 속물근성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