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땅, 푸른 바다, 그리고 붉은 노을이 진 제주를 기억하며
제주 4.3 바로 알기 여정 그 두 번째. 어제가 4.3에 대한 이해를 하는 날이었다면, 오늘은 4.3을 몸으로 느끼는 날이다.
어제의 제주 4.3 평화공원에서의 짙은 여운을 그대로 간직한 채, 하루를 꼬박 지냈다.
밤이 길었다.
아침은 짧았다.
.
.
.
.
동광 큰 넓궤를 가기 전 마을에 들러 잠시 일정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거대한 현무암이 대포의 형태로 마을 회관을 향하고 있다.
어떤 의미를 지녔을까?
제주 4.3을 담당하고 있는 한상희 장학사와 오늘 살아있는 이야기를 전해줄 홍춘호 어머님이시다.
홍춘호 어머님은 당시 11살이었다고 한다.
진한 삶의 애환을 엿들을 수 있었다.
기억하고 싶기도 했고, 기억해야 하는 우리 사람이다.
후손으로 제주 4.3을 알리는 이와 그 시대의 아픔을 겪은 분이다.
영화 '지슬'은 처음 듣는 영화이다.
제법 영화를 많이 본다고 하지만, 이렇게 나는 우리의 역사에 무관심했다.
그저 지나간 역사라 치부하기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안전모와 장갑까지 끼고 동광 큰 넓궤를 향하는 이들.
이들은 큰 넓궤를 예상치도 못했다.
그리고 그곳이 삶을 어떻게 변화시킬지도.
물론 촌에서 자라나 웬만한 경험을 한 터이지만, 나 역시 전혀 생각지도 못한 현실을 맞아야 했다.
검은 땅이 붉게 물들었다고 생각하니 아직은 피지 않은 초록의 잎사귀가
차라리 다행이다. 그렇게 세월은 모든 것을 삼켜버렸지만,
아직도 잊지 않고 이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이를 알리는 이들도 많다.
나는?
열심히 길을 걷는다. 일정이 빡빡해서 걸음을 재촉해야 했다.
'궤'란 말이 '동굴'이란다.
동굴에 들어가는데 이렇게 빨리 걸어야 하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부지런히 걸은 덕에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비문 하나가 쓰린 마음을 아리게 했다.
"선생님도 잡아가는데 학교 다니지 마라. 집도 문짝도 다 불이 났다.
그래도 살아보자고 애쓰는데 감자 두 개 먹고 굴에서......."
제주 말을 알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하다.
큰 넓궤에 대한 설명은 위 사진으로 대체합니다.
여기가 동굴 입구이다. 그런데, 문제가 있어 보인다.
동굴인데 입구가 너무 좁다.
사람이 들어가기도 힘든, 아니 발을 내딛기 무섭다.
기어들어가야 겨우 들어가는 입구.
안전모를 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가 아니었다.
여기는 정말 편안한 곳이었다.
입구를 기어들어가니, 제법 넓은 공간이 있다.
한쪽엔 동굴에 숨어 살던 동광리 주민들이 쌓아놓은 방호벽이 보인다.
영화 '지슬' 촬영 전에는 저 사다리도 없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어둠에서 저 높은 곳에서 내려올 수 있었단 말인가?
일행의 플래시가 없었다면 암흑 속에서 갈팡질팡 했을지도 모른다.
이제부터는 그냥 사진만 느껴보시길 바랍니다.
쪼그려서 걸으며 통과할 수 있는 굴은 정말 편안한 곳이었다.
어둠 속에서 완전히 낮은 포복으로 기어야만 했다.
이런 곳에서 2개월을 120여 명이 살아야 했다는 사실에 놀라울 뿐이었다.
아니, 차라리 경악이었다.
완전한 어둠이었다.
카메라 플래시를 터트리는 일조차 쉽지 않았다.
절망의 신음 소리가 일행의 입에서 쏟아져 나왔다.
고통이었다.
한상희 장학사의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 살아가는 삶, 그 삶의 가치는 무엇이며
나는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잠시 고민했다.
삶의 불확실을 느낄 때 받아들이는 공포. 그 막연함에 대하여 잠시....
칠흑 같은 어둠에서 눈을 감았다.
차라리 감지 말 것을 했다.
눈을 감으니 오히려 세상이 더 밝았다.
내가 앉아 있는 동굴의 그곳보다 더 밝았다.
180m가 된다는 굴을 다 돌아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
굴 안에는 2층이 있다.
120여 명이 모여 산 어둠의 공간.
그 좁은 공간에서도 모두가 어울려 살 수 있는 나름의 규칙이 있었다고 한다.
정말 존경스럽다.
동굴 내부에 있는 2층 동굴. 저곳에서도 마을 사람들이 살았다고 한다.
어찌 가능했을까?
원시인들이 삶도 이렇게 검은 어둠과 함께 하진 않았을 듯하다.
다시 기어 나와야 하는 곳이다.
카메라라도 들이댈 수 있는 여유가 있는 공간은
그나마 나은 곳이었다.
마음이 막혔다. 숨이 막혔다.
그리고 살고 싶어 졌다.
먼발치에서 보이는 밝은 햇빛.
저 빛은 틀림없는 생명의 빛이었다.
그
러
나
그들은 그 빛조차 어둠의 나락으로 인도하는.......
'지슬', 감자
집터만 덩그러니 남아있는 마을을 찾았다.
70년 전 그날 이후, 이제는 사라진 마을.
그리고 이야기만 남아 있는 마을
이제는 이야기마저 사라져 가는 마을
무등이 왓 마을의 넓은 공터였다고 한다.
이 곳에 사람들을 불러 모았고, 모인 사람들에게 아무런 말도 없이
탕!
잠 복학 살터.....
위의 사진에서 보다시피 제주민들은 묘를 잘 가꾸어 두었다.
바람에 흙이라도 날릴세라 돌담을 쳐 무덤을 지켰다.
그만큼 죽은 사람에 대한 예와 가족애가 진했다고 한다.
시신이 공터에 방치되어 있다면......
살아남은 마을 주민들은 시신을 수습하러 나오고......
매복한 그들은........
죽창!
아!
제주의 집터 주변에는 이렇게 족대(우리는 수릿대라고 한다)가 기본적으로 있다.
족대가 이렇게 둘러쳐 있으면 집터라고 한다.
죽음의 순간에 족대 숲 사이로 숨어서 생명을 건진 사람들도 몇 있다고 한다.
몇!
점심 식사를 위해 동알 오름에 올랐다.
가장 광활한 제주의 바다를 볼 수 있는 곳이란다.
저 섬들의 이름조차 잊어버린.....
쌍둥이 섬만 기억에 남는다.
제주 전통의 도시락, 차롱!
그리고 셋 알 오름과 섯알오름, 알뜨르 비행장을 돌아본다.
이 곳 또한 그저 눈물이 흐르는 곳이다.
그리고 가슴이 메어 오는 곳이다.
이유가 있을까?
저 자리에 서 있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것이 아프다.
유해 발굴 시 130여 시신과 함께 엉켜있던 콘크리트와 철 구조물.
철골이 붉은 이유는 그저 산화되었기 때문일까?
차가운 철 구조물을 가만히 잡아보았다.
일본군의 알뜨르(아래 뜰) 비행장 일제 비행기 격납고 모습.
참으로 튼튼히 지어 부수기도 힘들다고 하니......
알뜨르 비행장이 있던 그곳의 마을은 대정마을 - 크게 조용한 마을-이다.
크게 조용한 마을이 이렇게......
제주 4.3의 진실과 기록을 남길 자신이 나지 않았다.
7년 7개월의 수많은 아픔과 고통.
그리고 두려움.
제주를 찾는다면, 꼭 다시 가보아야 할 곳이다.
역사를 알아야 하는 이유는 그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함이다.
누군가를 탓하거나 벌하기 위함이 아니다.
나는
그저
아픈
역사이건
자랑스러운
역사이건
그를 통해
지금을 바로 살고
내일을
만들어 가길 바란다.
제주 4.3
- 말글 손
3.1이라 우리는 즐거운 노래를 불렀다
지나간 그 순간이 지금의 우리를 노래한다
말발굽에 차인 아이 분노한 군중
하늘을 메운 총성 쓰러진 여섯 송이 꽃
모두 일어나라 제주여 일어나라
모진 세월 이겨낸 제주여 일어나라
하늘을 덮은 함성은 총칼의 무자비함에 막을 내리고
공포의 시간만이 제주를 감싸니
아, 여리고 여린 우리의 동백꽃이여
아, 강하디 강한 우리의 동백꽃이여
이제는 잊지 않을 우리의 순간이여
제주 4.3 그 순간을 우리는 기억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