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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하지 않을 권리

뜻밖의 엄마 전화를 받고

by 말글손

추석 연휴 마지막 일요일.

한 주의 새로운 일 준비로 사무실에 갔다.

금방 끝날 줄 알았는데 몇 건의 강의 계획서를 보내고 강의안을 짜고 준비물을 챙기고 나니 여섯 시간이 훌쩍 지났다.

집으로 와 짐 정리를 하고 장모님과 아이들 밥을 챙겨 먹는데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석이가? 너희가 나물 좀 해 오까가?

..,...

-이번 추석에 너희가 나물 해 온다 했제?

-엄마. 달력 한번 보이소. 추석 지났다 아이요.

-추석이 지났나?


멍하니 잠시 수저를 멈췄다. 형제들 단톡에 글을 올렸다.

-엄마가 추석에 나물 해 올 거냐며 전화가 왔어요. 자주 연락드리길 바랍니다.

설거지를 하는 동안에도 잡념과 상념과 후회가 밀려왔다.


드러누워 텔레비전을 보다가 내 모습이 한심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하니 있고 싶은데 머릿속엔 자꾸 뭔가를 하라고 시킨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을 보내면 나의 공간은 변하고 난 세상에서 도태되고 말 거야.

또 한심한 나를 발견했다. 엄마도 그렇게 세상에서 잠시도 쉬지 않고 일을 하셨다. 지금도 기억 너머에서도 일을 찾고 계신다. 전화를 하면 그냥 있다고만 하시는 엄마는 그냥 있는 게 아니다.

잃어버린 기억과 잊어버린 시간을 여전히 되찾으며 늘 앞을 보며 뭔가를 하고 계신다. 평생 단 한 번도 아무것도 하지 않을 권리를 누리지 못하셨다. 조금 더 조금 더.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