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힐 듯 하지만 지워지지 않는

효도는 기억에서 사라져도 불효는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by 말글손

사진을 남길까 하다, 다른 세상에 사시는 아버님의 사진은 그냥 딸들의 가슴에 남기기로 했습니다.


"장서방, 아버지 한번 보게나." 어머님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아빠, 할아버지가 이상해.”토요일 오전, 늦잠에 빠진 나를 깨우는 큰 아들의 목소리도 떨렸다. 습관처럼 벌떡 일어나 아버님의 의료용 침대로 갔다. 창백하게 식은 얼굴과 이미 굳은 몸. ‘아! 아버님. 이런 불효를 또 하고 말았습니다.’

처가에 살며, 장인 장모를 모신 지 7년 만에 아버님은 먼 길을 떠나셨다. 7년을 아버님을 업고 병원에 오갔지만, 정작 떠나는 그 날은 아버님의 넘어가는 숨소리를 듣지 못하였다. 어린 시절 아버님의 숨소리를 듣지 못했던 것처럼. 홀로 가시는 그 순간이 얼마나 외로우셨을까?


젊은 호기를 빼고는 정말 가진 것이 없었다. 보증금 이백만 원에 월세 20만 원 셋방이 전부였다. 운영하던 학원도 생각처럼 쉽진 않았다. 처가에서 나를 반가이 맞이 할 턱이 없었다. 하지만 아내의 고집을 장모님도 꺾지는 못했다. 나는 집에서 보태준 천이백만 원과 아내가 보낸 천오백만 원으로 결혼식도 올리고, 작은 방도 구했다. 학원은 갈수록 어려웠다. 전세방 보증금도 다 날리고, 월세로 힘겨운 생활을 이어갔다.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첫아들이 태어났다. 녀석이 보물인지 생활은 조금씩 안정을 찾았다. 그리고 삼 년 뒤 둘째가 태어났다. 새옹지마라 했던가? 모든 것이 자리를 잡아갈 무렵, 장인어른은 파킨슨병을, 장모님은 중풍을 진단받았다. 청천벽력이었다.


처가에서 제일 가까이 살았기에 자연히 두 분의 병원 걸음을 내가 돕게 되었다. 학원 수업이 오후에 이뤄지니 오전에는 한가하기에 그리 어려운 점은 없었다. 또 두 분 모두 경증이라 큰 무리 없이 수발을 할 수 있었다. 몇 달을 그리 지내다, 아버님의 병환이 점점 심해지셨다. 어머님 도마 찬가 지였다. 누군가는 장인, 장모를 모셔야 했다. 아내는 네 딸의 막내지만, ‘못난 놈이 선산 지킨다,’는 말이 생각났다. “그냥 우리가 모시는 게 어떨까? 두 집 살림보다 한 집에 합치는 게 안 낫겠나?” 세 살 아들과 갓난이를 보고, 처가에 들러 병시중을 하고, 간호사로 3교대 근무를 하는 아내가 안쓰러워 먼저 말했다. “당신이 먼저 말해줘서 너무 고마워요.” 그렇게 나의 처가살이는 시작되었다.


수시로 장인, 장모님을 모시고 병원을 오갔다. 늘 내게 고마워하는 동서와 처형들의 격려도 나를 버티게 하는 힘이었다. 물론 처가살이가 쉽지는 않았다. 지지고 볶고. 일상의 삶이 전쟁터와 같았다. 홀로 외출하셨다 머리를 다친 장인은 치매 증상도 왔고, 엉치뼈가 깨져 수술을 하고 나신 뒤는, 침대에 누워만 계셨다. 다행히 장모님은 꾸준한 재활치료로 조금씩 나아지셨지만, 파킨슨병과 치매를 동시에 앓는 장인을 모시는 것은 정말 힘들었다. 변이 딱딱히 굳어 손가락으로 변을 파내는 일도 부지기수요, 화를 내고 침을 뱉는 것도 그냥 그러려니 해야 했다. 이제 꼬마 두 놈을 키우며, 학원 일과 집안일을 동시에 하는 것도 늘 긴장의 연속이었다. 아내도 마찬가지였다. 한 달 몇 번씩 장인어른을 업고 응급실로 향했다. 장인어른을 요양병원에 모시자는 의견도 나왔지만, 일언지하 거절했다. 그냥 그랬다. 생활은 힘들었지만, 마음은 편했다.


시골 노모님도 처음엔 “보리 세 말만 있어도 안 그러는데.”하셨지만 농사지은 쌀이며 채소를 늘 챙겨 보내셨다. 힘들었지만,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 했다. 세월이 흐르니 모든 것이 익숙해졌고, 두 아들도 큰 녀석은 초등학생이 되었고, 둘째도 유치원에 다니니 말귀도 통했다. 그렇게 세월은 흘렀고, 다시 일상은 잠잠해졌다. 그런 일상이 반복되던 어느 토요일 아침이었다. 나는 피곤에 지쳐 늦잠이 빠졌고, 아내와 진주 처형은 막내 처형을 만나러 서울로 가는 중이었다. 장모님이 날 깨우셨다. 아들이 급하게 나를 깨웠다. 그 순간, 세상의 시계는 그 순간에 멈추고 말았다. 아내에게 전화를 했다. 119에 전화를 했다. 병원으로 전화를 하라고 했다. 병원으로 전화를 했다. 새하얀 천으로 아버님을 덮었다. 아버님을 들었다. 그리고 아버님을 바퀴 달린 침대에 뉘었다. 그리곤 아버님을 보낼 수 없어 이를 악물고 병원 침대를 부여잡았다. 하늘을 볼 수 없었다.


조금만 일찍 일어났더라도 아버님 가시는 길이 외롭지 않았을 터인데, 피곤하단 핑계로 늦잠을 자버리다니. 홀로 가시는 마지막 순간이 얼마나 외로우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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