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는 세상은......
저는 모든 것을 잡으려는 욕심이 많은가 봅니다. 때론 잊어야 하는 것을 잊지 못합니다. 문득 생각나는 그 순간을 떠오르기도 합니다. 우리의 행복도 아픔도 그렇게 잊혔다가 다시 찾아온 시간 여행인지도 모릅니다.
나는 몰랐어요. 나는 어쩔 수 없었어요. 하지만 나의 말과 행동이 누군가에겐 아픔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내왔을까요? 아직도 갈 길이 멀게 느껴집니다.
이제라도 많이 물어보고, 많이 듣고,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고, 그리고 많이 느끼며 살아보렵니다.
1. 인생의 갈림길
2. 그럴 수밖에 없다면
3. 그래도 우리는
4. 새로운 인연
5. 이제라도 알았으니
1. 인생의 갈림길
1
1980년. 세상은 이렇게 저렇게 시끌벅적하지만, 텔레비전도 전화기도 없는 석이네 시골 마을은 봄맞이로 분주했습니다.
“석아, 새 운동화 신고 학교 재미있게 다녀.”
올해 입학하는 석이는 엄마가 처음 사 주신 운동화에 신이 났습니다.
2
개나리가 피고 진달래도 피니 석이네 암탉도 푹신한 짚 위에 알을 낳았습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아유, 예쁜 알을 다섯 개나 낳았네. 고생했다. 잘 품어라.”
석이 엄마는 엄마 닭을 토닥여주었습니다.
“아가들아, 알에서 힘을 키워 세상으로 건강하게 나오너라.”
엄마 닭은 다섯의 알을 소중히 품고 품습니다.
3
“엄마, 우리 내일 소풍 간데요.”
학교를 다녀온 석이는 첫 소풍에 신이 났습니다. 하지만 엄마는 지레 걱정이었습니다.
‘뭘 싸주지? 집에 마땅히 싸 보낼 게 없으니…….’
“엄마, 엄마도 내일 소풍 올 거지? 친구들이 엄마가 김밥 싸서 오신 댔는데.”
“그래, 엄마도 김밥 싸고, 사이다도 한 병 사 가지고 갈게.”
2. 그럴 수밖에 없다면
4
엄마는 암탉이 있는 곳으로 갔습니다.
“미안하다. 암탉아. 내일 석이가 소풍을 간다네. 그래서…….”
갑자기 석이 엄마는 암탉이 품고 있던 알 두 개를 꺼냈습니다.
“안 돼요. 안 돼요. 이제 세상으로 나올 아이들이란 말이에요.”
석이 엄마의 하얀 손이 점점 검게 변했어요.
엄마 닭은 있는 힘을 다해 소리쳤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엄마 닭의 저항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으니까요. 엄마 닭은 그만 그 자리에 앉아 펑펑 울고 말았습니다.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자신이 너무 원망스러웠습니다. 둘째와 넷째의 빈자리가 너무 허전했어요.
5
하지만
엄마 닭은 울고 있을 수만은 없었어요.
‘나머지 아이들이라도 잘 품어야지.’
엄마 닭은 다시 힘을 내야만 했어요.
엄마 닭은 첫째, 셋째, 그리고 막내를 다시 소중히 품었습니다.
그때였어요. 알들이 조금씩 꼼틀대기 시작했어요. 암탉은 자리에서 일어나 부리로 알을 톡, 건드렸습니다.
6
봄이 깊어지니, 세상은 온통 녹색으로 변했어요. 애벌레도 알을 깨고 세상으로 나왔어요.
“와, 세상은 정말 신기한 곳이구나! 배가 너무 고픈데 뭐라도 먹어야겠어.”
애벌레는 꼬물꼬물 자신이 태어난 나뭇잎을 갉아먹기 시작했어요.
“안 돼. 난 네가 태어날 수 있게 널 감싸주던 잎이잖아.”
“미안해. 그래도 배가 고파서 움직일 수가 없어. 세상 구경 가려면 힘이 있어야지. 미안해.”
애벌레는 자신을 품어 주었던 나뭇잎을 다 갉아먹고 말았어요.
3. 그래도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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젖은 깃털을 단 병아리 세 마리가 세상에 나왔습니다. 엄마 닭은 모두 건강하길 바랬습니다.
첫째와 셋째가 건강하게 태어났습니다. 얼마 뒤에는 노랗고 보송한 털을 가진 멋진 병아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비틀대는 막내를 보는 엄마의 마음은 아팠습니다. 듬성듬성 빠져나간 털과 여윈 몸. 어떻게 힘을 내어 살아갈지 엄마는 걱정입니다. 첫째와 셋째는 무럭무럭 자라 건강한 어린 닭이 되었지요. 하지만, 막내는 여전히 보잘 것 없었습니다.
“막내야. 따라 오너라. 몸에 좋은 게 있는지 찾아보자.”
8
점점 몸집이 커진 애벌레는 나뭇잎에서 버티지 못하고 ‘툭’하고 떨어지고 말았어요.
“어이쿠. 아파라. 젠장. 허리가 부러지는 줄 알았네. 여긴 뭐 먹을 게 있으려나?”
욕심 많은 애벌레는 부지런히 먹이를 찾아 다녔어요.
“여기 있구나. 막내야.”
“이게 뭐에요?”
“응, 몸에도 좋고 맛도 좋은 애벌레야. 이렇게 통실한 먹이를 찾아서 다행이구나.”
“엄마, 그런데 너무 커요.”
“괜찮아. 저 정도는 먹어야 너도 건강하게 자라지. 얼른 먹으렴.”
엄마 닭이 막내를 재촉했어요.
“안 돼요. 전 이제 곧 꽃에게 희망을 줄 나비가 될 거란 말이에요.”
“미안해. 우리 막내가 몸이 너무 안 좋아서 너라도 필요하구나. 미안해.”
4. 그렇다 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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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 저희 왔습니다.”
석이 큰 형이 군에서 휴가를 나왔어요. 도시에서 대학을 다니는 둘째 형도 함께 왔어요.
“아유, 어서 오너라. 안 그래도 전보 받고 기다리고 있었다. 더운데 얼른 등목이라도 치거라.”
“네, 날씨가 엄청 덥네요. 한참 걸어왔더니 옷이 다 젖었습니다.”
“그래, 맛있는 거 해 줄 테니 조금만 쉬고 있어.”
10
석이 엄마는 닭이 놀고 있는 곳으로 갔습니다. 그리곤 약해 보이는 막내는 쳐다보지도 않고, 건강하게 잘 자라는 첫째와 셋째 닭에게 다가갔습니다.
“미안한데…….”
엄마 닭은 석이 엄마의 손이 검게 변하는 것을 알아챘습니다. 갑자기 그때가 생각났습니다. 엄마 닭은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이번에는 절대로 아이들을 그냥 보낼 수 없었습니다.
“도망쳐, 애들아.”
“아유, 애들이 왜 이렇게 빨라?”
“이번엔 절대로 안 돼요.”
엄마 닭도 날개를 퍼덕이고, 부리로 석이 엄마 손을 쪼았습니다. 하지만 석이 엄마의 손은 더욱 검고 커졌어요. 검은 손이 빠르게 흩날리더니 금방 첫째와 둘째는 금방 모습을 감추고 말았습니다. 엄마 닭은 그만 쓰러지고 말았어요.
“엄마. 엄마…….”
볼품없는 막내의 애절한 울음만이 조용한 시골 여름밤의 정적을 깼습니다.
5. 이제라도 알았으니
11
아침이 밝자, 엄마 닭은 다시 힘을 내었습니다. 아직 어린 막내를 혼자 둘 수 없었지요. 막내에게 먹일 음식을 찾아 나설 요량이었어요. 그때였어요. 우락부락 아저씨가 나타났어요.
“계십니까? 석이 엄마!”
“무슨 일이십니까? 아침부터.”
“전에 봄에 석이 운동화 산다고 빌려간 오천 원은 언제 갚을 거요?”
엄마가 석이 운동화를 사 주려고 아저씨에게 빌린 돈이 화근이었습니다.
“가을걷이를 해야 돈이 나올 건데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엄마는 양손을 싹싹 비벼야 했어요.
“아, 우리도 급하게 돈이 필요해서 어쩔 수 없어요. 미안해요.”
“집에 지금 돈이 없는데…….”
“그럼 암탉이라도 가져가서 팔 수 밖에요. 으흠. 미안해요. 우리도 워낙 급해서.”
아저씨는 급하게 엄마 닭을 낚아채 가버렸어요.
12
볼품없는 막내만 남아 멍하니 마당을 지키고 있습니다. 막내 병아리를 바라보던 엄마의 눈에는 눈물이 흐릅니다.
“미안하구나. 미안하구나. 너라도 내가 잘 키워줄게.”
엄마는 조용히 막내를 껴안아 줍니다. 석이도 엄마 옆에 조용히 앉았습니다.
운동화 한 켤레만 덩그러니 축담에 놓여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