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 마을을 잇다
마을공동체를 통한 사회복지를 엿보다
공동체 마을을 잇다
지역이 문화, 예술, 교육에 관심이 많다. 다양한 활동 영역에서 교육은 사회복지의 시작점이자 마지막이라 생각한다. 교육 참여를 통해 지역주민들이 스스로 경제력을 확립하고, 문화 활동을 지향하여 인간의 기본적인 행복과 만족감을 지향할 수 있다고 믿는다.
모 심리검사연구소 지사장 회의가 있어 서울 출장이 있었다. 서울은 거대한 마을었다. 전 세계의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거대한 멜팅팟이었다. 미국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몇 해 전만해도 이렇게 서울 도심의 특정 지역에서 다양한 인종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가는 곳곳이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하는 공간이었다. 지하철은 동서양의 만남의 장이었다. 출장을 갈 일이 있었다.
한국이 단일민족국가라 생각한 적이 있었다. 어릴 적에 그렇게 교육을 받고, 시골 집성촌에 살 때는 말이다. 성인이 되면서 단일민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일민족은 한 민족의 핏줄만이 흐를 수가 없다. 역사적으로 말이다. 먹이를 찾아 이동을 해야 하는 동물의 필연을 생각해보면 말이다. 그 사이 우리는 인간으로서 생각의 힘이 생기면서 어떻게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 문화를 어떻게 후대에게 전할 것인가? 어떻게 지금의 시대를 살아가야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했을 것이다.
현대는 도시와 시골이라는 공간을 넘어 인간 소외와 치열한 경쟁으로 살아남아야 하는 시간적 숙제를 가지고 있다. 단지 생존을 위한 숙제가 아닌 남들보다 더 잘 살아야하고 남들보다 권력과 돈을 가져야한다는 기이한 숙제를 가졌다. 서로를 삶의 동반자가 아닌 삶의 경쟁자로 바라보며 ‘함께’라는 가치보다는 ‘내가 더’라는 가치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면에서 치열한 승부수를 띄우고 있다.
공동체 정신은 사라졌다. 서부극에서 나오듯 나의 편이 아니면 적으로 간주하고 무차별적으로 총을 난사하여 죽여야 한다. 이렇듯 스스로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상황이 되자, 사람들은 스스로 새로운 삶의 길을 모색하고 있다. 잃어버린 공동체의 가치를 다시 찾아가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하지만 가야할 길은 멀기만 하다. 그렇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의 가치를 이룰 수 있을까? 답은 없지만 사람답게 살기위한 자구책은 필요하다.
세상의 가장 작은 공동체 단위는 가정이다. 가정의 회복이 공동체 회복의 첫걸음이다. 각자의 삶을 추구하기 위하여 둥지를 떠나 세상으로 나가는 개개인이 증가했고, 가정은 점차 무너지고 있다. 아니 무너졌다. 가정이 무너진 원인은 가정이 존재하는 지역공동체가 점점 불어나는 가정공동체를 지켜낼 경제, 문화적 역할을 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람이 나면 서울로 보내라.’는 말도 안 되는 말이 이를 반증한다. 한국전쟁 이후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던 지역은 식구들조차 먹여 살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결국 이들은 ‘돈’이라는 먹이를 찾아 이동을 택해야 했고, 이런 선택은 자신의 선택보다는 부모들의 과도한 욕심으로 시작된 경우가 많았다. 더불어 살아야한다는 마음보다는 내 새끼만 잘 되면 된다는 잘못된 생각에서 비롯되었을 수도 있다.(물론 한국의 아픈 역사가 만들어낸 괴물적인 생각일 수도 있다.)
이런 교육과 사상에 젖은 사람들은 계속 그들의 자식에게 자신들의 생각을 주입했다. 서울처럼 거대한 도시의 냉정한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서울은 거대해졌지만, 서울로 먹이를 찾아 자식을 떠나보낸 농어촌 지역과 중소도시의 상황은 이와 또 다른 상황을 맞게 되었다. 좁아터진 서울에서 냉정한 인간의 모습을, 텅 비어가는 중소도시와 시골의 허전한 인간의 모습은 닮았다. 군중 속의 고독과 고독 속에서 군중을 찾는 외로움이 더 이상 인간을 인간으로 존재할 수 없게 만들고 있다. 인간을 더 이상 인간으로 만들어가지 않는다.
이런 삶 같지 않은 삶을 회복하고자 마을공동체문화가 인기를 끌고 있다. 마을 공동체는 붕괴된 가정을 살리고, 무너지는 국가의 근간을 세우는 새로운 대안이 될 수 있다. 지역사회의 복지는 마을공동체에서 다시 시작될 수 있다. 마을도서관, 공동육아, 공동경제 등은 공산주의와는 다르다. 예전 부족국가 시절의 장점만을 잘 살린다면 든든한 사회의 기본이 될 수 있다. 부족 간의 경쟁이 없어져야하는 숙제는 남아있지만 말이다.
그런데 슬픈 현실은 또 존재한다. 자발적인 마을공동체 문화를 통해 자생 가능하고 지속가능한 마을을 통해 사회복지를 이루려면 엄청난 시간이 필요하다. 빠름을 추구하는 시대라고는 하지만, 어제 태어난 아이가 갑자기 스무살 청년이 되길 바라는 마음처음 세상은 빠른 결과만을 요구하고 있어 슬프다. 갈등을 극복하고 상호 이해와 소통을 통해 하나씩 이루어져 나가야할 공동체가 한 해 만에 뚝딱 만들어지길 원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쏟아지고 있다. 정치는 표를 받기 위해 억지로 사람들을 동원하고 있다. 행정은 정치의 눈치를 보면서 성과내기에 급급하고 지역마을은 조금 더 지원을 받기 위해 서로 아귀다툼을 하고 있다.
오랫동안 지속되어야 마을 우물 하나가 생겨나고 마을 사랑방 하나가 생겨나는 법인데, 포크레인으로 우물 하나 팠다고 공동체가 형성될 수 없다. 동네 한 사람으로 시작된 공동체문화는 이웃주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더디고 더디게 이뤄진다. 얼마간의 지원으로 만들어진다면 전 세계 어느 곳에서도 공동체문화를 만들 수 없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실적위주의 행정 낭비를 버리고, 단기에 성과를 내기를 바라는 마음 없이, 정치적 수단으로서가 아닌 진정한 후대를 위한 인간성 회복을 지금부터라도 해야 한다. 비단 도시만의 문제가 아닌,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 전 세계의 문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는 희망이 넘치는 시대를 살아간다. 대규모의 마을공동체를 통한 복지 실현이 아닌, 작은 단위의 마을 공동체를 통해서 우리는 사람이 살아있는 따뜻한 복지를 실현할 수 있다. 이미 실천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통해 희망을 엿본다. 마을이 학교가 되는 마을학교, 마을이 육아공간이 되는 마을유치원, 마을이 경제공동체가 되는 마을기업, 마을이 평생배움터가 되는 마을도서관, 마을 주민이 함께 돌보는 마을 돌봄센터 등 다양한 변화가 사회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행정은 공간지원을 통해 자립의 기반을 마련하고, 초기 안정을 위한 운영지원 후에는 자발적 운영이 되도록 기다려야 한다.
우리는 이런 시도가 한 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긴 시간이 걸리는 일임을 기억해야 한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더디게 가더라도 올바른 방향이라면 기다려야한다. 돈을 쫓는 이들의 가치관도 인정하되 그들도 지역 공동체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고, 돈보다는 공동의 가치를 추구하는 이들과 함께 어울리며, 개인적 성향이 강한 이들에게 각자의 영역을 빛낼 수 있는 문을 열어 다양한 존재가 다양한 방식으로 어울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마을 공동체를 통한 지역복지가 어떤 정해진 형태가 아닌 살아 움직이는 유기적인 관계를 만들고 이를 인정해야 한다. 지속가능한 공동체야 말로 진정한 지역복지, 사회복지를 만드는 밑거름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