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문인협회 경남문학 원고
거류산(巨流山) 허리를 걷다
길의 끝에만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가는 길에서 나는 무엇을 찾을 것인가? 산의 정상을 밟는 것만 목적이 아니다. 산의 정상에 올라 내가 느끼는 희열이나 성취감이 목적이라면, 정상은 목표라 불러야 한다. 그렇다고 산을 오르는 모든 이들의 목표가 정상이 아니다. 어떤 이들은 산새가 우는 길을 걸으며, 어떤 이들은 멀리서 웅대히 솟은 산봉우리를 바라보며, 어떤 이들은 산자락을 맴돌며 숲의 매혹을 느끼며 나름의 만족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유년시절 동네 뒷산을 뛰놀았다. 봄엔 진달래를 땄고, 여름엔 소를 먹였다. 가을엔 밤을 주워 담았고, 겨울엔 토끼를 쫓고 나무를 했던 산. 좁게 난 산길을 따라 또는 없는 길을 만들어가며 줄기차게 오르내렸던 산. 남동으로는 나무가 우거지고 북서로는 돌이 많은 산. 거류산. 세월이 지나면서 거류산 동쪽방향으로 거류산성으로 향하는 임도가 생겼다. 봄이 되면 임도를 따라 아낙의 허리춤을 껴안은 듯 벚꽃이 춤을 춘다.
경남 고성군 거류면 봉림마을에서 당동 마을까지 연결되는 산길은 겨우 차 한 대 지나갈 수 있는 임도로 총 거리는 6Km쯤 된다. 봉림 마을에서 오르나, 거류면사무소 뒤편 당동 마을회관을 시작으로 오르나 같은 거리만큼 오르면 정자를 만날 수 있다. 겨울의 끝자락에 거류산 허리길을 걸었다. 봉림마을에서 오르는 길에 할머니 한 분이 냉이를 캐고 계신다. 이제 오르막 시작이다. 시멘트로 포장된 도로가 끝이 보이지 않는다. 포장도로가 끝나면 파쇄석이 깔린 길이 늘어진다. 정자까지 꼬불꼬불 이어지는 산길을 오르자 아이들의 투정이 쏟아진다. 천천히 산허리를 간질이며 걸어도 좋으련만. 오르다 못 오르면 돌아가도 좋으련만. 아이들에게 욕심을 부려본다.
“목표를 설정했으면 이뤄내야지. 조금 더 힘 내봐.”
“언제까지 가야돼요?”
“너희들 어릴 때 여기 차타고 온 적이 있는데. 기억 안 나니? 조금만 더 가면 너희들 예전에 마시던 약수터가 있을 거야.”
“우리가 여기에 왔었어요?” 작은 아들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래, 아빠 친구가 만들어 놓은 약수터에서 물도 마시고 좋았지. 물론 그땐 차타고 왔지만. 약수터에서 정자까진 가까워. 그 다음은 내리막이고. 자. 빨리 걷자.”
헉헉거리며 길을 올랐다. 땅만 보고 걸었더니 세상을 놓치고 말았다. 고작 내 앞만 보며 전부라 생각했다. 산허리에 서 길을 내다보니, 360°로 꺾이는 구간이 곳곳에 보인다. 마치 가던 길을 처음으로 되돌아가는 기분이다. 세상일도 이와 같지 않을까? 끝이 보이지 않는 듯, 끝인 듯 보이는데 처음부터 다시 시작인 듯, 헷갈리는 그런 세상 말이다. 꺾어 돌아서자 맞은편 구절산의 경치가 시원하게 눈을 씻어 내렸다. 멀리 당동만 바다도 스쳤다. 지친 걸음을 달래려 예전에 있던 약수터를 찾았다. 아쉽게도 약수터는 사라지고 말았지만 정자에 도착하자 시원한 당동만이 한 눈에 들어온다. 여전히 나아가야할 길은 남아있지만, 그 길의 중간에서 행복을 느꼈다.
“이 산에 관한 전설이 있는데. 옛날에는 이 산이 걸었다는 거 아냐.”
“걸어 다녔다고 거류산이에요?”
- 이 마을 저 마을, 자리 잡기 좋은 땅을 찾아 걸어 다니던 산이 있었다. 이 산이 경남 고성 들녘을 걸을 때, 부엌에서 저녁을 짓던 할머니가 걸어가던 산을 보고 “게, 섯거라.” 하니 산이 깜짝 놀라 멈춰서 지금의 거류산이 되었다. -
실제로는 줄기가 힘차게 뻗어나가는 형세로 ‘크게 흐른다.’라는 의미로 거류산이란 이름이 지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전설 하나 정도는 있어야 동심을 이어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정자에서 거류산성을 따라 정상(571M)까지 조금만 오르면 되지만 산길을 걷기로 했으니 그저 길 따라 걷는 재미도 쏠쏠하다.
“정상에 안 올라가요?”
“봄에, 벚꽃이 거류산 허리를 감싸면 그때 또 걷자. 그땐 정말 장관일거니까. 봄에는 산성을 따라 정상에도 가볼까?”
아직은 유명세를 타지 않았지만 걷는 맛이 일품인 길, 익숙한 듯 낯선 길, 마을길 끝에서 시작해서 옛 거류산성으로 오르는 길에서 계절의 향취를 느낄 수 있는 길. 봄이 되면 분홍꽃띠가 산허리를 수놓는 길에서 건너편 산세를 볼 수 있고, 한반도를 닮은 당동만을 한눈에 즐기는 이 길을 걸어보자. 산을 오르내리면서 내가 지나간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도 잊지 말아야겠다.
특기 사항
1) 약력: 2013년 서정문학 등단
하루 48시간, 시시콜콜 잡다한 이야기(전자책), 감도둑 잡아라(전자책)
<실례합니다, 실내합니다> 출간 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