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갑자기 오토바이 한 대가 옆을 스쳤다. 그녀가 내 팔을 당겼다.
-위험해요.
-아, 참. 저런.
화가 났다. 배달이 급했나 보다. 그래도 그렇지. 빠름은 가끔 엉뚱한 것을 먼저 요구하기도 한다. 가령 타인이 다치거나 자신이 다치거나. 몇 푼의 돈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앗아가는 법이다.
-평소에도 이렇게 여자가 바깥쪽으로 해서 걷나요?
-아. 네. 아니. 딱히 생각 없이. 그래도 도로 안쪽은 위험하니. 뭐.
생각지도 못한 말에 내가 그랬나 싶었다. 그러고 보니 지금껏 그랬던 것 같기도 했다. 횡설수설하다 보니 어느새 봄 해는 건물 옥상 너머 지고 있었다.
- 술 한잔 하실래요? 어제 빚도 갚아야 하는데.
-어. 예. 그러죠.
시원한 맥주가 그리웠다. 긴장하고 말고 할 나이도 아니건만 이상하게 떨렸다.
-혹시 아시는 데 있나요?
-아뇨. 별로 나다니질 않아서요. 매번 동네만 기웃거리거든요. 내가 사는 동네가 제일 편하더라고요.
말이 끊어지면 그녀가 먼저 말을 시작했고 나는 대답만 하는 앵무새처럼 쭈뼛거렸다. 골목 귀퉁이에 오래돼 보이는 호프집이 있었다. 호프집이라? 요즘도 버티고 있는 걸 보니 주인장 솜씨 아니면 마음을 알 수 있었다. 시대는 호프집을 그냥 두지 않았다. 학창 시절에나 다니던 호프집이 번화가 어느 골목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반가웠다.
-들어가요.
-네. 이런 곳 괜찮은가요? 오래돼서 좀 옛날식 같은데요. 전 이런 곳이 좋습니다만.
-저도 이곳이 좋아요. 사실 가끔 오거든요.
안으로 들어서니 외관과 다름없이 오래된 테이블과 의자, 예전 시골에서 보던 물건들이 소품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다만 호프집 분위기가 아니라, 시골 막걸릿집을 닮아 있었을 뿐. 그래도 마산 번화가에 이런 곳이 아직도 호프집으로 남아 있다는 게 반가웠다. 마산을 내 집처럼 생각하던 내가 모르는 곳. 손님도 없이 한산했다.
-여기 맥주 500 두 잔이랑 요. 안주는 뭐 드실래요?
-아무거나요.
-안주는 아무거나 주세요.
그녀가 주문한 아무거나는 신기하게 내가 제일 좋아하는 안주였다. 동네 단골집에 가면 아무거나 시키면 아무거나 주니까 말이다.
-닮은 점을 찾았네요.
반가운 마음에 먼저 입을 열었다. 긴 머리를 손으로 쓸어 넘기며 그녀가 나를 빤히 쳐다봤다.
-고마웠어요.
-아뇨. 뭐 별 거 아닌데요.
-그래도 그 시간에 갑작스럽게 도와 달랬는데.
그녀의 까만 눈동자에 형광등 빛이 반사됐다. 하얀 티셔츠가 더 하얗게 보였다.
-저도 잠이 안 오고 해서 걷다 보니 인연이 되었네요. 그런데 연락처는 어찌 아시고......
-아이고. 좋은 사람들이 왔네.
할머니가 맥주를 들고 오시며 말을 끊었다.
-그래. 둘이 커플로 맞춰 입고 보기 좋네.
-아. 네. 하하. 커플은 아니지만 우연히 그리 됐어요.
-아이코. 처자도 곱고. 보기 좋다.
-아닌데요. 오늘 일이 있어 처음 만났는데요.
-이러나저러나 같이 있다 아이가. 내 맛난 거 해줄께. 얘기해라.
그녀는 별말 없이 웃으며 나를 봤다. 오히려 머쓱해진 건 나였다. 할머니가 참 오지랖도 넓었다. 여전히 동네 인심으로 버티는 분이라 생각되었다. 어른들의 저런 마음이 그나마 세상을 지키는 밑천이라 믿는다.
-아직 이름도 모르네요. 성함이?
-정이예요.
-성이 정 씨면 이름은?
-성도 이름도 정이예요. 딱 한 글자. 정. 그것도 맑을 정.
뜬금없는 대답에 정신이 복잡했다. 뭐? 성도 정이고 이름도 정이라고? 그런데 딱 한 글자? 이상해도 한참은 이상하지 않은가? 정정이면 정정이지 그냥 정?
사연 없는 사람 없다지만 이 무슨 사연이란 말인가?
혼자 복잡한 생각으로 천장을 쳐다보고 실내를 돌아볼 사이 안주를 들고 할머니가 오셨다. 그 사이 그녀의 잔이 절반으로 줄어 있었다.
-애들아. 내가 담은 탁주 있는데 한 잔씩 줄까?
할머니가 내려놓은 안주는 간단했지만 딱 내 마음에 들었다. 역시 동네가 최고지. 미더덕 무침에 소면. 소면이 약간 푸른빛을 띠고 있는 걸 빼면 말이다.
-탁주 좋죠. 오랜만에 시골맛 느끼겠네요.
-세진 씨는 할머니랑 얘기 잘하시네요. 저하곤 별로가 봐요.
-아닙니다. 할머니가 말을 거시니까. 그런데 제 이름은 어찌?
갑자기 전화번호와 이름이 머리를 스치며 심장이 두근댔다. 그때 주방에서 독을 긁는 소리가 세차게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