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마다 높이 솟았던 굴뚝이 사라진 지 오래다. 그나마 **탕이라 남아있는 구도심의 몇몇 기둥도 조만간 없어지고 말 것이다. 굴뚝에 연기가 오르면, 연례 행사를 맞은 꼬마들은 부모님의 손을 잡고 목욕탕으로 향했다. 따뜻한 물도 넉넉하고, 시원한 물도 넉넉했던 목욕탕은 아이들의 작은 놀이터였다. 북적대는 탕에 들어가, 때를 불리고, 바가지로 물을 퍼 몸을 적시며 등을 밀어주던 엄마, 아버지의 손길도 추억이 되고 말았다.
가마솥에 물을 끓여 커다란 대야에 들어가 돌멩이로 몸을 밀던 시골 꼬마들은 도시의 목욕탕조차 부러웠다. 적당한 물 온도에 맞춰 때를 불리고, 물이 식기 전에 후다닥 씻고 나와야 했던 시간도 추억이 되고 말았다. 이제는 시골이나 도시나, 집집마다 욕실이 생기고, 개인이 원하는 적정한 온도의 물이 샤워기에서 쏟아진다. 대중탕이나 대야 속이나 물 온도와는 달리 개인의 기준에 맞춘 물 온도 말이다.
욕실에서 함께 샤워를 하던 아들이 뜬금없는 말을 던졌다. "아버지랑 **탕에서 목욕하러 가고 싶다. 우리는 온탕에서 때 불리다가 냉탕 가서 놀았잖아. 아버지는 불은 때가 다시 몸에 달라붙는다고 뭐라하고. 냉탕에서 놀다가 다시 온탕에 오면 엄청 뜨겁잖아. 온탕은 원래 따뜻한 데, 그치? 그 온탕보다 뜨거운 데가 뭐지?", "열탕 말이제?", "어, 냉탕에서 열탕에 바로 가면 심장마비 오나? 그 반대인가?" 냉탕에서 놀다가 열탕으로 기어들거나, 열탕에서 몸을 불리다 냉탕으로 바로 뛰어든다면 어떤 느낌일까. 너무 뜨거워 발을 담그지도, 너무 차가워 발을 뺄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냉탕과 열탕 사이의 '온탕'에 잠시 들러 몸을 추스르지 않나 싶다.
아들이 무심코 던진 냉탕과 열탕 사이의 온탕의 의미를 곰곰이 씹어보았다. 온탕? 아마 우리 삶에서도 어느 선택의 기로에 서서 바라보는 '중간쯤'이 되지 않을까. "짜장이 좋아?", "짬뽕이 좋아?", 이러면 "짬짜면은 어때?"하는 정도 말이다. '중간쯤'이란 말이 이도 저도 아닌 미지근한 결정장애라는 말로 치부되고 있지는 않을까. 우리는 매일의 순간에 끊임없는 선택을 하고 산다. 한번의 선택은 되돌릴 수 없는 결과를 낳게 된다. 선택은 권리이지만, 결과는 책임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늘 치우치지 않으려 신중하게 고민하고 넘치거나 모자라지 않은 선택을 하려고 한다. 특별하거나 유별난 것이 아닌 아주 평범한 진실을 택하게 마련이다.
예기의 중용편에 [中者 不偏不倚無過不及之名 庸平常也(중자 불편불의무과불급지명 용평상야] '中은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의지하지 않아서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는 것이며, 庸용은 평범하고 일상적인 것이다'라고 적혀있다. 저마다의 해석이야 다르겠지만, '중간쯤'이란 말이 나쁘지 않다는 말은 확실한 듯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양 극단(냉탕과 열탕)은 ‘적당한 정도(程度)’(온탕)로서의 중간을 기준으로 하여 그곳으로부터의 일탈(逸脫)로서 잴 수 있다"고 중용의 덕을 말했다. 세상일이 늘 상대적일 수밖에 없지만, 냉탕과 열탕 사이의 온탕은 냉탕과 열탕을 나누는 잣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우리네 삶에서 '중간쯤'이라는 말이은 어떤 의미인가?
꼬마 철학자는 온탕에 있다가 냉탕으로 가면 시원함을 느끼고, 온탕에 있다가 열탕으로 가면 따뜻함을 느낀다고 한다. 그 말이 '중용'으로 대체될지 모르겠다. 내가 있기에 네가 있기 마련인데, 그럼 너와 나 사이에는 무엇이 있을까. 기준은 누구의 기준인가. 깊은 생각에 잠기게 하는 물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