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밀껌
벌여 놓은 일이 분에 넘쳐, 잠시의 여유를 부리는 것이 호사스럽게 느껴진다. 어머님을 뵈러 고향으로 잠시 발길을 돌린다. 뭔가 삐딱하니 일이 풀리지 않을 때는 어머님, 아니 엄마의 얼굴을 보고나면 막힌 배수로의 물이 빠지듯 마음이 홀가분하다.
“어머니, 친정에서 간장 많이 담았으니, 올해는 힘들게 간장 담지 마세요.” 아내는 장모님의 간장을 주저리주저리 자랑한다. 간장, 된장을 많이 담아서 주변에 팔았는데, 인기가 이렇고, 저렇고. 자랑하는 입이 으쓱으쓱 한다.
“우리 집에도 간장 많이 있다. 올해는 힘들어서 담지도 못 하것다.” 팔순을 넘은 노모는 구십도 꺾인 허리로 기듯이 장독대로 간다.
“우리 집에는 삼십년도 넘은 간장도 있다. 맛 한번 봐라.” 굽은 허리로 힘들게 장독 뚜껑을 열어 막내 며느리와 아들에게 간장을 자랑한다.
살짝 찍어 먹어보니 정말 입 안에 맴도는 간장이 예사로운 간장이 아니다.
‘세상에, 이런 간장이 있다니.’
짭쪼름하면서 달콤한 맛, 그리고 알 수 없는 향이 입 안에서 끊이질 않는다.
“어머니, 진짜 맛있어요. 어떻게 간장이 이렇죠?” 아내는 연신 소리를 지른다.
“그 간장 너거 아부지 죽기 전에 담았으니까 한 삼십년도 훨씬 넘었는갑다.” 엄마는 오래된 간장이 잘 익어 아주 자랑스러운 듯하다.
마루에 잠시 앉았다. 산허리를 넘어가는 햇살이 따사롭다. 언뜻 마루에 아버지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어느 결에 아버지의 냄새가 났다. 오월의 밀껌과 같았던 아버지의 달콤함도 묻어난다.
그리 힘들게 유년기를 보낸 것 같지는 않다. 나의 기억이 저녁 늦바람에 흔들리는 호롱불마냥 가물거리는 것이 아니라면. 하지만 도시에서는 가난해서 먹었다는 라면이나 국수를 일 년에 한두 번 먹었으니, 돈이란 녀석을 참 귀하게 여기신 부모님이셨다. 여섯 남매 공부시키려니 당연하다고 이제야 이해되지만, 소매에 까만 콧물 때를 묻힌 예닐곱 살 꼬마에겐 그런 이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아버지 세대가 느낀 보릿고개를 나야 모르고 살았지만, 군것질에 있어서는 나 역시 남모를 보릿고개를 겪기는 했었다. 봄이 오면 분홍 진달래 꽃, 찔레 순, 송순으로, 여름엔 털이 복슬복슬 붙은 개 복숭, 손가락만 하게 늘어진 가지와 오이로, 가을이 되면 팔고 남은 상태가 썩 좋지 않은 감과 고구마로 주린 배를 채웠다. 겨울에는 홍시와 모래에 묻힌 무로 긴 밤을 잘도 지냈다.
‘우습지만, 요즘 세상으로 치면 참 건강 간식이다.’
하지만 볍씨를 뿌릴 때 즈음 노랗게 여물어 가는 밀을 손바닥으로 솔솔 비벼 꼭꼭 씹어 먹는 밀껌만큼 오랫동안 고소한 맛을 전해주는 간식은 드물었다. 논에 못자리를 만들려고 괭이를 들고 물을 대러 가시는 아버지를 졸졸 따라 다니면, 아버지는 어린 막내에게 까맣게 타버린 밀 먹을 얼굴에 묻히며 장난을 치셨다. 그리고 울먹울먹 눈물보를 터트릴 자식에게 밀알을 건네셨다. 울다가 웃으면 엉덩이에 털 난다고 허허거리시며 아버지는 막내의 손을 잡으셨다. 꼬맹이의 손으로 비비는 밀껌 맛도 대단했지만, 아버지가 밀기울을 불어내고 주신 밀은 세상 어느 비싼 수입산 껌보다 맛있고, 달콤했다.
“니 얼굴에 먹 팅깃다. 얼레리 꼴레리, 얼레리 꼴레리.”
아버지는 돌아가셨지만, 형과 나의 밀껌 사랑은 해마다 커져갔다. 아버지가 장난을 쳤듯이, 밀대의 검은 먹가루-중학생이 돼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밀이 깜부기병이 걸려 썩은 것-를 얼굴에 부비며 장난을 쳤다.
“이씨—행님, 니 두고 보자.” 나도 밀대의 먹을 꺾어 들고 형을 쫓아갔다. 한참을 뛰어가다 보면 밀대의 검은 먹은 오뉴월의 바람에 실려 모두 날아가고 손에는 까만 흔적만 남아있었다. 오뉴월이 되면, 보리와 밀을 베어내고 벼를 심어야 했기에, 농촌의 일손은 바쁘게 돌아갔다. 어머님의 농사일을 도와 논으로 나가는 길이 그렇게 싫지만은 않았다. 밀껌을 씹을 수 있다는 작은 기대도 한 몫 했다. 익기 전의 밀은 적당한 수분을 머금고 있어 아주 부드러웠다. 그리고 밀 이삭을 따서 손으로 살살 비비면 껍질과 밀알이 나누어졌다. 입 바람으로 밀 껍질을 살살 불어 날리고, 손에 남은 밀알을 한 입에 털어 넣으면 너무도 행복했다. 그렇게 밀알을 삼키지 말고 꼭꼭 씹으면 존득존득한 껌이 되었다. 밀도 수매를 하고, 집에서 직접 빻아 밀가루로 만들어 귀한 손님이 오시면 대접하는 음식이었기에 함부로 먹을 수 있는 음식은 아니었다. 그런 귀한 밀을 한 입에 씹어 삼켜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밀을 꼭꼭 씹어 껌으로 만들고, 그 껌을 계속 씹다 보면 어느새 눈 녹듯 스르르 목구멍으로 넘어가버리는 밀알 껌. 아버지의 향기와 함께 밀껌은 입안에서 서서히 녹았다. 어찌 세월이 흐르고 풍족한 삶을 살고 있다고 한들 그 밀알 껌의 맛을 잊을 수 있겠는가?
중학교를 졸업하고, 창원으로 유학을 왔다. 내가 자취를 시작한 곳은 창원의 반송아파트, 비록 열 평짜리 작은 아파트였지만, 방도 두 칸이나 있고, 좁지만 아담한 부엌도 있고, 수세식 화장실도 있었다. 수세식 화장실, 정확히 말해 좌변기를 처음 본 것도 그때였다. 모든 것이 신기한 창원이란 동네에도 사람이 사는 맛은 시골처럼 느껴졌다. 지금은 대단지 아파트로 바뀌어 사람 사는 맛은 다소 떨어졌을 지도 모르나 아직도 그 곳에는 내가 사랑하는 반송시장 칼국수 집이 있다. 자취생의 허기를 쉬이 달래줄 수 있는 칼국수. 그랬다. 나는 아파트도 처음 보았고, 좌변기도 처음 보았으며, 잘 정리된 주택단지도 처음 보았다. 그리고 그 곳에서 분식집이란 것도 처음 보고 들었다. 분식집에 가면 김밥, 떡볶이, 순대는 지천으로 널려있었다. 물론 시장 도로에 펼쳐진 포장마차에도 먹을거리는 지천이었으나, 분식집의 칼국수는 어떤 누구도 따라올 수 없을 만큼 맛있고, 그 양도 푸짐했다. 피 끓는 고등학생, 특히 굶주린 야수같은 자취생의 배를 충분히 채우고 남을 만큼 그 인심은 더했다. 분식집이 어떤 집인지도 모르고 들락날락 했었다. 중국집은 중국요리를 하고, 한식집은 한식을 팔며, 고기 집에는 고기를 구워 먹을 수 있다. 횟집에는 회를 파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지만 나는 분식집은 그냥 이것저것을 파는 곳이라고만 생각했다. 참 단순하긴 단순했나 보다. 분식집을 몇 차례 드나들고서야 그 곳은 밀가루 음식을 파는 곳이란 것을 알았다. 가루 [분]을 나는 왜 몰랐을까? 아니, 당연했다. 분식집에는 밀가루 음식보다 김밥과 떡볶이, 어묵이 더 유명하니 그럴 수밖에 없는 입장이 아닌가? 반송 칼국수 집에서 열심히 배를 두드리며, 친구들과 수다를 떨며 칼국수를 먹을 때였다. 한 친구가 친절한 주인아주머니께 질문을 던졌다.
“아줌마, 이 밀가리 수입이지예? 안그라모 이리 마이 줄 수 있습니꺼?”
“그라모, 다 수입이제. 국산가꼬 답이 나오것나? 택도 없다. 그래도 옛날에는 국산 밀가리 썼는데. 인자는 국산을 찾아 볼라케도 별로 없을끼거마는.”
밀가루, 밀가루가 국산이 없다니. 아니 밀가루를 수입해 쓴다는 사실을 그때 또 처음 알았다. 시골에서 자란 나는 당연히 밀가루를 국내산 밀로 만들 것이라 생각했다. 참 순진하고 멍청했던 것 같다.
친구가 이런 사실을 알고 있다면, 나는 그 보다 더한 행복을 알고 있었다.
“아지매, 아지매도 밀알 껌 씹어 봤지예? 억수로 꼬시다 아입니까? 입에서도 살살 녹지예?” 나는 반송 칼국수 아줌마에게 넌지시 도움의 눈길을 보냈다.
“그라모, 안무거 본 사람은 모리제. 요새 도시 아들은 알랑가 모리것다.” 아주머님의 한 마디에 친구들은 모두 동그란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기분이 좋았다. 도시에의 화려한 모습이 부럽고, 좋은 집에서 편안하게 학교를 다니는 친구들이 부러웠지만, 그 순간만은 시골 출신이란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들에서 익어가는 밀 이삭 하나 마음대로 따 먹을 수 없이 귀한 밀이었지만, 아버지와의 소중한 추억을 준 밀. 우리에게 행복이란 지금의 부유함보다 살아오면서 나에게 켜켜이 쌓인 추억 한 조각일지도 모른다. 어머님께 인사를 드리고 올라오는 차창 저 너머로 아버지가 밀먹을 튕겨 늦가을의 해를 가린다. 밤을 재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