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책임을 넘어, 또 다른 나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되면서 아버지가 되었다. 쉽지 않은 여정임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안다는 것과 할 수 있는 것에는 꽤 많은 차이가 있다.
아들이 집을 떠나고 나니, 내가 집을 떠날 때의 어머니 마음을 알겠다. 그렇게 또 한 번의 아버지가 되었다.
아들이 대학에 입학하면서 기숙사로 짐을 옮겼다. 아내와 둘째와 함께 대구 여행도 할 겸 함께 움직였다. 조촐한 기숙사를 보니 과거 고시원에서 살 던 때가 떠올랐다. 짐을 풀고 OT에 가는 아들만 두고 우리는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집으로 온 아들. 시골 할머니께 인사드리고, 마산 할머니께 인사드리고 녀석은 선배들과 풋살을 하기로 했다면서 예정보다 하루 일찍 대구로 갔다. 그리고 그 빈자리에 마음이 허전하다. 무슨 난리냐고 하겠다. 그래도 솔직한 마음이니 하나씩 기억을 떠올려 보려고 한다.
사랑하는 여자를 만났고, 행복한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꿈도 많았고, 그 꿈을 실현시켜 보란 듯이 사회에서 인정받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어머니는 물론 형제들에게도, 처가에도, 친구들 사이에서도 정말 보란 듯이 괜찮은 삶을 산다고 인정받고 싶었다. 그만큼 그간의 삶이 녹록지 않았음을 반증하는 나만의 위로였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리 쉽진 않았다. 아니 어려웠다. 늘 쫓기면서 살아내었다. 하루하루 살아내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살아내다, 절망의 순간순간이 쳇바퀴처럼 돌아오는 시기였다. 그때 아내가 이렇게 말했다.
"우리 아이가 생겼어."
아무 말없이 아내를 안아주었다. 기뻤다. 행복했다. 그리고 기쁨과 환희의 순간이 스친 후에는 걱정이 밀려왔다.
'삶은 살아가는 게 아니라, 최선을 다해서 살아내어야 한다.'
현재의 상황을 살펴보면서 어떻게 살아내어야 할지를 고민했다. 하지만, 그 마저도 잠시였다. 아이는 아내의 뱃속에 있었고, 여전히 삶은 그냥 살아가는 시간의 연속일 뿐이었다. 조금 더 부지런히 살뿐이었다. 그렇다고 큰 변화가 있었다고 말하기도 힘들다. 그냥 일하고, 지쳤다는 핑계로 소주 한 잔으로 하루를 달래고, 그러다 사고도 치고. 그렇게 나는 덜 준비된 아버지로 아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조산의 위험이 있어 아내가 입원을 했다. 한 달이 넘도록 입원했다. 그렇게 그 해가 끝나갈 무렵의 크리스마스 전날에 아들이 태어났다. 두 달을 먼저 태어난 아들. 아무 문제없을 거라며 나는 아내의 분만 순간을 함께 했다. 고통스러워하는 아내를 보며 엄마의 위대함은 물론이요, 어쩔 수 없는 아버지의 무책임한 간절함만 느꼈다. 한 손엔 탯줄을 자를 가위를 들고 멍하니 서 있었다. 아이가 잘 나오지 않았다. 아이가 나오는 순간이었다. 의사의 외침이 들렸다. 뭐라고 말했는지 아무 기억도 없다. 내 손의 가위는 무용지물이 되었고, 의사가 급히 탯줄을 자르고, 간호사는 아이를 데리고 어디론가 떠났다. 나는 멍하니 서 있었다.
"괜찮아? 미안해. 고마워."
아내에게 할 말이 없었다. 아내가 나를 위로했다.
"괜찮을 거야."
그렇게 새벽이 왔다. 여전히 나는 아이를 볼 수 없었다. 새벽 세 시가 다 되었을 때였다. 의사가 불렀다.
"........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준비를 하셔야 할 지도 모르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갑자기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그렇게 잠시.
"살려만 주이소."
아내에게 들렀다. 아내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는 없지만, 아내 역시 기대와 걱정 반이었을 것이다.
"괜찮데. 조금 지켜보자네."
아이는 인큐베이터에서 삶의 처음을 시작했다. 외부 세계로의 위험은 줄었으니, 이제 스스로 살아내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부모의 간절한 믿음과 기도만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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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아들은 다시 우리 품으로 돌아왔다. 비록 준비된 것이라곤 단칸방에 없는 살림이지만, 내가 아버지가 되었다. 그렇게 처음 아버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