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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그미 Nov 25. 2020

생라면을 굽다

라면을 씹으며 함께 씹다

아이들이 모두 등교한 간만의 자유로운 점심,
시간 맞춰 차려먹기도 구찮아서 책 보며 시간만 보내는 중이었다. 1시 넘어서 슬슬 배가 고파지니 어머님이 좋아하시는 옥수수나 삶아볼까 했더니 어머님은 이미 콩고물밥을 드셨단다.

점심은 생각 없다고 하시거나 오전에 어딜 다녀오시느라 두 시 넘어서 드실 때도 많아 좀 늑장을 부렸더니, 오늘따라 배가 빨리 고프셨나 보다.

해서... 점심용 끼니로 간단히 라면을 구워먹으려고 에어프라이기 안에 농심 사리면을 넣었다.(여러 회사의 사리면중에 농심이 제일 맛나다) 남편이 연애 때 집에서 생라면을 가스그릴에 구워준 적이 있었는데, 그때 처음 맛본 구운 라면은 라면의 신세계였다. 바삭바삭하고 구수한 맛이 일품이었다. 결혼 뒤엔 어쩌다 먹는 간식이었는데, 에어프라이기 생긴 뒤론 사리면을 박스로 사두고 종종 만들어먹는 간식 겸 끼니가 되었다.

옆에서 생라면을 굽는 날 보시더니 어머님도 생라면에 얽힌 추억 하나가 떠오른 모양이셨다.

"내가 00(둘째 시누) 임신했을 때, 일손 돕느라 시골에 가서 있는데 어찌나 생라면이 먹고잡던지~ 그란디 할머니가 주전부리하는 걸 원체 싫어하셨단마다. 그래서 밤에 할머니 잠드셨을 때 방에서 이불 뒤집어쓰고 몰래몰래 먹고는 봉지는 아궁이에 집어넣고 태워부렀다~"

그 말씀을 하시며 개구쟁이처럼 웃으신다. 몇십 년 세월이 지났어도 어머님의 깐깐하신 시어머니를 속아넘기신 게 꽤나 짜릿하셨던 듯.

"시골 가면 천지에 곡식이 있어도 그걸로 손주들 간식거리 한 번을 안 만들어주신 냥반이랑께. 밥 먹으면 됐지 뭔 간식이 필요하다냐? 이러시는 분잉께. 뻥튀기 한 번씩 튀겨다 놓으면 애들이 한동안 먹을 꺼신디... 튀기는 값이 비싼 것도 아니고. 한창 크는 손주들이 친구도 없는 시골에 와서 무쟈게 심심할 것인디, 입이라도 덜 심심하게 해줘야재~ 그 생각까지는 못 하시더라. 그래서 들에 참 내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중간에 마을회관을 지나치는디 거그 슬쩍 들러서 과자 한 봉다리 사다가 애들 불러서 그릇에 부어주고 껍질은 또 아궁이에 넣고 홀랑 태워부렀재. 할머니 돈으로 사는 것도 아니고, 내 돈으로 사서 멕이는데도 들켜서 한소리 들을까 봐 그렇게 조마조마했어야."

"시골에 그냥 놀러 온 것도 아니고, 일 도와드리러 내려온 며느리가 고마워서라도 손주들 군것질 좀 시켜주시지~ 할머니도 차암."

"그런 생각 하시는 양반이냐? 처음에는 밥이나 좀 해달라고 하시면서 나를 불러다 놓고는, 나 도착하면 할머니는 집안일은 손끝도 안 대신다~ 새벽에 일어나시자마자 이따가 아침밥은 밭으로 가져오너라 하시곤 호미 들고 휭 나가신다잉~

그람 난 밥해야지, 할아버지 진지 차려드려야지, 애들 깨워서 먹여야지, 돼지 밥 줘야지, 거기다 고양이 할라 키웅께 괭이 밥까지 주고, 할머니 진짓상 차려서 머리에 이고 밭까지 갈라믄 얼마나 바쁘던지... 밭이 가깝기나 하간? 개울 건너 한참을 가야한디 비가 와서 물이 불믄 징검다리가 잠길랑말랑해서 아슬아슬했재.

한 번은 콩알이 가득 든 자루를 밭으로 가져오라시는데 임신해서 무거운 몸에, 전날 내린 비로 미끌미끌해진 징검다리를 건너는디... 어찌나 조마조마하던지. 거기서 콩자루 물에 빠치면 한해 콩 농사 다 망치는 거라 온 신경을 다 쓰고 건너니라 진이 다 빠졌당께. 그랄 때 집에서 놀고 계신 할아버지가 좀 갖다 주시면 오죽 좋겄냐? 그 해에 환갑 되셨응께 그 정도는 옮겨주실 정도로 팔팔하셨는디.... "

어디 밥 짓기만 집안일이랴, 청소 빨래하는 틈틈이 애들 챙겨야지, 식사 셔틀은 하루 두 번씩 댕기셔야 하고, 거기다 밭일도 거드셔야 했으니 몸이 몇 개라도 부족할 지경이었다고 하신다.

한 번은 집에서 놀던 애들이 하얀 이불을 방안 가득 펼쳐놓고 고추장 단지 풀어헤쳐 이불에다 치덕치덕 처발르며 그림 그린답시고 노는 걸 지나가던 동네 사람이 보고 밭에 달려와 알려줘서 뒤늦게 수습하러 가신 일도 있으셨단다.
흐미~ 세탁기도 없던 시절 그 이불빨래를 어찌 다 하셨을꼬.

또 한 번은 가을 추수 때였는데, 큰애 둘이 소꿉장난하며 놀다가 갓난쟁이 막내한테 마당에서 콩 타작 끝난 뒤 굴러다니던 노란 콩알을 먹여서 큰일 날 뻔한 적도 있었다고~

밭일 끝내고 돌아와 젖 물리려고 보니 애기 입안에 뭐가 있어서 뭐다냐? 하고 입을 벌리고 보니 불어 터진 콩알이 있어서 깜짝 놀라 빼내셨다고. 쫌만 늦게 발견해서 그 콩알이 목으로 넘어가기라도 했다면 어짤 뻔 났으까 싶으셨단다.

이야기 끝에 어머님께서 내리신 결론,

"할머니가 나쁜 분은 아니었어야. 그래도 좋은 시어머니라고 하기엔 쫌 그랬재. 내가 셋째 임신해서 막달이 되어가도록 며느리 임신한 줄도 모르고 일만 시키신 분이었응께. 그 몸으로 할아버지 환갑잔치까지 음식 직접 준비해서 차리고 내고 치우고를 다 했는데도 고생했다는 말 한마디가 없으시더라. 그뿐이냐? 애 낳으러 올라가기 전까지도 담뱃대 뽑아놔라, 채마밭에 나가서 뭐 해놔라~ 임신한 며느리한테 그렇게 일을 시키셨으면서도 애 셋 낳을 동안 한 번도 들여다보러 우리 집에 와보신 적이 없지야. 미역국은 커녕 미역 줄거리 하나도 따로 보내신 적 없으니 말 다 했재. 나 같음 손주 보고 싶어서라도 한 번은 찾아갔겄다. "

그런 모진 시어머니를 겪으시고도 나한테는 세상 좋은 시어머니 노릇을 해주시니 고개가 숙여진다.
고부간에 앉아 구운 라면을 오독오독 씹어먹으며 시할머님의 무심함을 같이 씹는 칠월 오후.
오늘따라 라면이 유독 맛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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