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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그미 Dec 09. 2020

청산개비 꼼짝 마라!

머리카락 꼬시르는 날

"자~ 이제 봐라잉. 하나 둘 셋! 때린다!!"

우르릉 꽈광~~~

어머님께서 숫자를 세는 소리에 맞춰
천둥소리가 요란하게 울린다.
멀쩡하던 하늘이 갑자기 시꺼매지더니
번개가 내리치고 우레소리가 무섭던 날이었다.

"옛날에는 이런 날 머리카락을 태웠단다.
평소에 모아뒀다가 꼭 뇌성벽력 치는 날에
화롯불에 태웠지야. 너는 기억 안 나냐?"

"전혀 안 나는데요~ 할머니랑 같이 살았어도
벼락 때리고 비오는 날에 머리카락 태우시는 건
한 번도 못 봤어요."

"그냐? 나 어릴 땐 천둥번개만 치면
우리 할머니가 머리카락을 화로에 꼬실라서
집안에 노린내가 진동했단다.

'할미! 냄새 나~ 그것 좀 꼬시르지 마!' 하믄
'이래야 청산개비가 못 찾는단다~' 함시롱 태우셨재."

"청산개비가 뭔데요?"

"정확히는 모르겄다만... 할머니 말씀하시는
폼으로 봐서는 죄 있는 사람 찾아 댕기는 요물단지같은디~. 천둥번개가 요란한 날이믄
'온 백성이 한마음 한뜻이란다.' 하심시롱 머리카락을 꼬시르셨재."

"에? 그게 무슨 말이래요?"

"죄가 있건 없건 천둥번개 치믄 무서워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다 똑같다는 말 아니까?
베락 때리고 천둥 울믄 엥간히 무섭잖애~
죄 없어도 벌벌 떨게 된께 하는 말이재.

전에는 머리카락을 아무데나 안 버렸어야.
동그란 박 속을 파고 작은 구멍 하나 만들어선, 토방 한쪽에다 걸어두고는 머리 빗을 때마다 나오는 멀카락을 손가락에 딸딸딸 말어. 옛날 사람들은 머리카락이 길었응께~

그라믄 공처럼 동그랗게 말린 머리카락을 박 속에 쏘옥 집어넣었재. 그렇게 1년이고 2년이고 모아뒀다가 오늘같은 날 꼬시르면서 청산개비 오지말라고 주문처럼 외우셨더란다."

"머리카락 꼬시르면 고게 안 오나 보네요?"

"노랑내 풀풀 난께 냄시가 싫어서 안 오는 갑재.
멀카락 꼬시르는 냄시가 보통이간?"

"그나저나 그럼 머리카락 꼬시르는 건 한여름에나 가능했겠네요? 천둥번개 치는 날만 꼬시르니..."

"화로 옆에 박을 가져다놓고, 그 구멍 속에서 손에 집히는 대로 꺼내서 꼬실랐응께 몇 년 된 머리카락도 꼬시르고, 며칠 전에 빗어둔 것도 꼬시르고 그랬겄재."

"옛날 분들은 머리카락 하나도 함부로 안 버리시고 참 요긴하게 쓰셨네요."

"아이구야~ 몇 년씩 묵은 머리카락 생각만 해도 드럽다! 바로바로 버려야재 뭐할라고 그런 걸 모아놓고 살 것이냐?"

머리 감은 날이면 유독 머리카락이 많이 빠지는 나는 이번 기회에 나도 머리카락을 어디다 차곡차곡 모아놨다가 뇌성벽력 요란스런 날, 가스불에 한 번 꼬실라볼까나? 했다가... 깔끔하신 울 어머님 기함하실까봐 포기했다.

혹 청산개비한테 발각되어
그동안 죄지은 거 닦달당할 게 무서우신 분은
머리카락 잘 모셔두었다가 천둥번개 칠 때
홀랑 꼬실라보시길~^^

* 천둥벼락 치는 날 머리카락 태우는 풍습에
아래와 같은 의미를 부여하시는 분이 계시더군요.

- 신체발부는 수지부모라, 신체와 관련된 모든 것을 소중히 여겼고, 자연을 두려워하였기에 착한 심성을 간직할 수 있었던 우리들의 옛날 이야기지요 -

머리카락 한 올도 함부로 버리지 않는 것엔 부모에 대한 효가, 천둥번개 소리에 청산개비 이야길 두런두런 하면서 모아둔 머리카락을 태우는 것에는 자연을 두려워하는 선한 심성이 담겨있었음을 알 수 있었어요. 조상들이 몸소 보여주신 삶의 철학에 다시금 머리가 숙여집니다.


** 소나기 개인 뒤 해질 무렵 거실에서 바라본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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