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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그미 Dec 16. 2020

월남양반~ 우리 놀러 왔소!

당신의 택호는?

지금은 결혼을 해도 이름을 부르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몇십 년 전만 해도 남녀가 결혼을 하면 이름을 막 부르기가 거시기해서 출신지에 따라 택호를 지어 이름을 대신했다. 주로 여자의 친정 지명을 따르는데, ‘출신지+댁’의 형태이다.(관직이나 당호 등을 사용하기도 함) 남편을 부르는 이름 역시 부인의 택호를 기준으로 '~양반'으로 칭해진다.

그런데 실제로는 시댁에서는 부인의 출신지에 따라, 친정에서는 남편의 출신지에 따라 택호가 지어지므로 한 사람이 2개의 택호를 갖고 있는 셈이라고 한다.

나의 경우를 예로 들자면 해남 출신의 내가 서울의 김씨 집안으로 시집을 갔으니 시댁에서 나는 ‘해남댁’, 남편은 ‘해남양반’으로 택호가 정해지지만, 반대로 친정에 가면 나는 ‘남편의 출신지+남편의 성씨+실이’로 ‘서울 김실이’, 남편은 ‘출신지+성씨+서방’으로 ‘서울 김서방’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대전으로 내려와 산 지 십수 년이 넘었으니 이제는 '대전 김실이, 대전 김서방'이 맞겠다.

엄마는 같은 해남의 다른 면으로 시집을 오셨는데, 계곡면 방춘리가 고향이시라 계곡댁 혹은 방주간댁으로 불리셨다고 한다. (방죽을 막아서 땅으로 만든 곳이라 방주간이라 불리던 곳을 행정지명을 한자로 하면서 '방춘리'가 되었다고 함)
 
그런데 우리집 바로 위에 사시던 큰할머니께서도 엄마랑 같은 마을에서 시집을 오셨다. 이처럼 한 마을에 같은 동네에서 시집온 며느리가 두 명 이상일 경우, 같은 택호를 사용하면 변별성을 가질 수 없으니까 서로 중복되지 않도록 더 큰 곳의 지명이나 더 작은 곳의 지명을 붙이기도 한단다. 그래서 두 분이 같은 공간에 계시면 큰할머니는 방주간댁, 엄마는 계곡댁으로 불리셨기에 엄마 택호는 친정 이름 기준으로 해도 두 개가 되는 셈이다.

하지만 엄마는 택호로 불리기보다 누구 엄마로 불리는 경우가 더 많았다고 하신다. 엄마 말씀으론 민촌과 반촌의 차이인 것 같다고 하시지만(엄마 고향에선 다들 택호로 불렀는데, 시집 와서 보니 이 동네는 안 쓰더라고 하시면서 아무래도 민촌이라 그런 것 같다고 하셨다. 택호를 부르는 것이 반촌의 풍습이라고 생각하시길래, 그런가? 하고 자료를 찾아보니 택호는 반촌 민촌 가리지 않고 다 썼다.) 아무래도 시대가 변했기 때문이리라. 젊은 엄마들이 많은 동네에선 택호 대신 점차 아이들 이름을 붙여서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내친김에 할머니의 택호를 여쭈니 '몽몰댁'이라고 하셨다.
그 택호를 듣는 순간 사람들이 할머니를 몽몰댁이라고 부르던 일들이 바로 기억났다.
할머니의 고향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천년 고찰 '대흥사'가 있는 마을이다. 행정명으론 해남군 산삼면 구림리. 그런데 아마도 부락별로 불리는 이름이 따로 있었고, 그 부락 이름이 '몽몰'이었던 모양이다. 우리 할아버지는 그래서 '몽몰양반'이라고 불리셨다.
  
외할머니의 택호는 운동댁이라고 하셨다. 계곡면 방춘리 옆에 대운리(6만 7천평의 녹차밭이 있는 곳. 태평양 자회사가 운영한다)라는 마을이 있는데, 그 마을 이름을 그곳에선 택호로 부를 때 '운동'이라고 불렀단다. 아, 정말이지 들으면 들을수록 오묘한 택호의 세계!

어머님은 강진이 고향이시지만 시어머님이 같은 동네분이라 그런지 시댁에서든 친정에서든 서울댁 또는 서울떡이라 불렸고, 아버님은 서울손이라고 불리셨단다.

그럼 어머님의 시어머님 택호는?
사실 이 택호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된 계기는 시할머님의 택호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시할머님의 고향은 강진군 성전면사무소가 있는 죽전리인데 죽전댁이라 부르기가 거시기해서 '월남댁'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래서 시할아버님의 택호는 자연스레 '월남양반'이 되셨다.

월출산이 바로 건너다보이는 영암군 덕진면 백계리의 키 크고 잘 생기고 입담 좋으셨던 시할아버님은 근방에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인기가 어찌나 좋으셨던지 일 끝난 저녁이면 동네사람들이 자주 놀러오셨다고 한다.
저녁 먹고 방안에 앉아있으면 밖에서
 
"월남양반~ 우리 놀러 왔소!"

하는 소리가 창호지문 안으로 우렁차게 들려온다.
문을 열어보면 동네사람들(대부분 아줌마들)이 떼로 놀러들 오셔서 밤 10시까지 왁자지껄 할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며 놀다 가셨다고 한다.

할머니는 말씀을 잘 하실 줄 모르는 양반이라 그냥 옆에 계시고, 워낙 말씀을 재밌게 하시는 할아버지께서 혼자 그 많은 이들을 다 상대하셨다고.

때론 저녁을 막 차리려고 할 때 들이닥치실 때도 있는데
그럼 할아버지께선 같이 먹게 저녁을 차리라고 하셨단다. 미안해진 동네사람들이
 
"객식구가 한동자나 와서 밥 적으믄 어짜까?"

하면 옆에서 시할머님이 손사래를 치시면서

"우리 며늘아가 손이 커서 밥 안 적으꺼싱께 걱정 하들들 마쇼잉~"

하시곤 두레상에 모두 둘러앉아서 맛있게들 드셨단다.
생각만 해도 참 재미나고 정겨운 풍경이다. 그 많은 손님들 밥시중 드시느라 새댁이셨던 어머님은 힘드셨겠지만 말이다. "안 힘드셨어요?" 하고 여쭈면 그땐 다 그러고 살았니라 하시며 웃으신다.

어머님의 친정할머니 택호는 외촌댁이셨다고 한다.
어머님의 어머님은 월평댁.
외촌댁 할머니는 월평댁 며느리를 어찌나 미워하셨던지
주무시다가도 꿈속에서 막 며느리 욕을 냅다 하시곤 하셨다고. 월평댁 며느리는 동네에서 다들 효부라며 칭송이 자자했던 분이셨지만, 유독 시어머님 눈에는 못 잡아먹어서 시원찮은 며느리였다니 우째 그랬을까나.

이에 얽힌 구구절절 긴 이야기는 다음에 합쥬~^^

*  영주 소백산 귀농드림타운 입교생들 택호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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