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혼자서 보령호를 가면 꼭 비가 온다는데 나랑 같이 가는 날은 늘 날이 좋았다. 언젠가 한 번은 나랑 같이 간 날도 비가 철철 내렸다는데, 난 전혀 기억에 없다. 도대체 누구랑 간 거야?
이런 대화를 나눌 만큼 우리 부부가 자주 찾는 곳이 보령호이다. 페이스북에 뜬 '과거의 오늘'을 보니 작년 딱 이 무렵에도 보령호를 한 바퀴 돌면서 귀한 눈 봤다고 열심히 사진을 찍어 올렸더랬다.
보령호(保寧湖)라는 호수는 대한민국 보령시에 두 개가 있다. 보령댐이 이룬 호수와 보령방조제가 이룬 호수. 이 가운데 오늘 소개할 곳은 댐을 만들며 생겨난 충남 보령시 미산면 보령호로 819에 있는 보령호이다.
보령호는 1998년 10월 준공하였으며 성주산(성주면)과 성태산(외산면)에서 발원된 두 개의 작은 하천이 만나 이루어지는 웅천천에 댐을 막아 물을 가두어 미산면 풍계리 · 용수리 · 평라리 등 9개 마을이 호수에 잠기고 아미산 · 양각산의 허리까지 물이 들어찼다. 산 깊고 물 맑은 곳으로 꼽히는 미산지역에 자리하고 있는 보령호는 서해 인근 7개 시군에 생활용수를 공급하고 있어 산업적 가치가 높을 뿐만 아니라 경치가 좋아 관광명소이기도 하다. 봄이면 벚꽃이 가을이면 단풍이 아름다워 많은 이들이 찾는 곳이며, 굽이굽이 푸르른 산으로 둘러져 있어 드라이브 코스로도 좋다.
호수를 바로 옆에서 바라보며 달릴 수 있기 때문에 드라이브를 좋아하는 남편이 보령호를 자주 찾는 이유이기도 하다. 보령호 드라이브는 미산면 617번 국도를 따라가는 여정이다. 보령호를 둘러싸고 나있는 도로가 617번 국도인데 미산초등학교를 기점으로 해서 들어가는 게 풍경이 더 멋지다. 보령댐 애향박물관을 중간기점으로 해서 반대편인 미산면사무소 쪽에서 들어오는 길은 2차선 도로 가운데 보령호 바깥쪽에 있는 데다, 보이는 풍광이 덜 멋지다.
애향박물관은 댐 건설로 고향을 잃은 사람들을 위한 전시공간으로 보령호가 만들어지며 물에 잠긴 9개 마을의 추억을 사진과 영상을 통해 만나볼 수 있다. 코로나로 인해 한동안 문이 닫혀있어서 오래전 온 가족이 함께 들어가서 본 뒤로 들어가 보질 못했는데, 이번엔 단체관람만 아니면 방역 절차에 따라 발열체크, 방명록 작성, 손 소독을 거쳐 입장이 가능해서 들어가 보았다.
백제 시대부터 수몰되기 전까지 이 고장의 유래를 잘 정리해놓았고, 판서골의 나무꾼과 금지샘의 신선 이야기 등 수몰된 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과 미담도 볼 수 있고, 정든 고향 그리운 사람들 코너는 수몰되기 전 마을에 살던 분들의 사진이 한 장 한 장씩 모여 가득하게 전시되어 있어 수몰로 인해 고향을 떠나야 했던 사람들의 애잔한 마음을 들여다보게 만든다. 우리 고장의 생활관에는 마을에서 사용하던 농기구와 생활용품들이 종류별로 설명과 함께 전시되어 있어 오래전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소트레, 극쟁이, 못줄, 써레, 탈곡기, 씨앗통, 고무레, 죽가레, 살포, 오줌장군 등의 농기구, 전통 혼례 때 입었던 단령과 원삼부터 시작해 갓골, 패철, 물레, 요강, 먹통, 소주통, 괘종시계, 타자기, 이발기, 학교종, 학생가방과 교과서, 예고편필름까지도 있다. 이 많은 물건들이 다 수몰민들의 기증으로 모아진 것이라고 한다. 1층은 역사와 생활관이고, 2층으로 올라가면 이 지역의 풀, 꽃, 곤충, 물고기 등의 자연환경과 미산면의 아름답던 봄 풍경 사진을 대형 파노라마 사진으로 볼 수 있다. 올라가는 계단참에는 '보령댐 수몰 전 현황사진도'가 크게 걸려있어 수몰 전의 모습을 항공사진으로 확인할 수 있다.
박물관을 나와서 호수 쪽으로 20m쯤 걸어가면 '망향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이곳에 서면 정면으로 양각산, 오른쪽으로 아미산이 호수를 사이에 두고 보인다.
우리나라에는 거창, 보령, 이천, 금산 등에 양각산이란 이름을 가진 산들이 있는데, 거창에 있는 양각산(兩角山)은 두 개의 소뿔을 의미하지만 보령에 있는 양각산(羊角山)은 양의 뿔을 의미한다고 한다. 411m의 그리 높지 않은 산이지만 양각산은 산세가 아주 멋지다. 개인적으로 미산초에서 보령호를 끼고 들어가며 오른쪽으로 보이는 양각산 풍경을 보령호에서 으뜸으로 치는데, 정말 아무리 보고 또 봐도 질리지 않는 아름다운 풍경이다.
나는 산이 멋지다고 감탄만 할 뿐 올라간 적은 없지만 등산을 좋아하시는 분들은 양각산을 기점으로 그 주변을 한 바퀴 빙 도는 산행을 많이들 하시는 것 같다. 양각산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보령호 풍경은 백두산 천지연을 축소해놓은 듯 멋지다고 하니, 언젠가는 양각산 등반을 꼭 하고 싶다. 미인의 눈썹같이 아름다운 산이라는 뜻을 가진 높이 349m의 “아미산”에는 천년고찰 중대암이 있다. 아미산에 있는 중대암에서 산으로 둘러싸인 보령호의 멋진 경치를 구경할 수 있다고 하여, 운전초보는 절대 올라오지 말라는 안내문이 붙은 가파른 경사길을 재돌이 타고 올라갔다. 겨우 차 한 대 지나갈 수 있는 외길이라 교행이 불가능해, 마주 오는 차가 있으면 뒤로 후진을 할 수밖에 없는 길이다. 다행히 초입에서 차 두 대를 마주쳐 한 번 후진한 뒤로 더 이상은 차를 마주치지 않아 중대암까지 바로 갈 수 있었다.
중대암은(아래 자세히 소개) 신라시대에 창건된 절이지만 임란 때 소실되었다가, 조선 후기에 중건되었으나, 1960년대 이르러 다시 개보수를 시작해 2012년 정비가 완전히 끝나서 천년고찰이라지만 건물들이 너무 새것인 데다, 법당 하나 외엔 그럴싸한 건물이 없다. 보령호의 풍경을 높은 곳에서 내려다볼 수 있겠다는 기대로 올라갔으나, 어중간한 높이로 인해 맞은편의 양각산과 주변의 산들만 보이고 보령호의 물빛은 볼 수 없어 많이 아쉬웠다. 상대암인 보현선원까지 올라가야 보령호가 보일 듯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 앞을 지키는 오래된 감나무의 기묘한 모습들, 차 한 잔 들고 가시라고 몇 번을 부르시던 친절한 보살님 덕분에(코로나 상황이라 극구 사양했지만 참 감사했다) 좋은 인상으로 남았다. 운전에 자신이 있다면 한 번쯤 올라가 보시라고 추천하고 싶다. 등산을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아래에 차를 두고 올라가도 괜찮을 것 같다. 우리가 절을 둘러보고 내려올 무렵 한 떼의 등산객들을 만났는데, 등산객들이 많이 찾는 곳인 듯했다. (그러고 보니 대적광전 옆의 고목에 등산객들을 향한 경고문이 있었는데 인상적이었다. 절대 불 놓지 마시고 육류 등 취사를 하지 말라고... 사람들이 등산 와서 고기들을 막 구워 먹었나 보다.--;;)
중대암을 내려와 보령호를 쭉 돌다가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용수리에 있는 금강암이었다. 애향박물관에서 보령호 주변의 유서 깊은 곳들을 표시한 지도를 보니 금강암에 있는 미륵석불이 사암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해 관심이 갔다.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대부분의 석불은 화강암을 재료로 한다.
보령 금강암 석불 및 비편은 지방유형문화재 제158호로 보령시 미산면 용수리 산 59번지에 있다.(아래 자세한 설명 있음) 석불과 비편은 암자 초입의 커다란 느티나무가 지키고 서있는 미륵전에 안치되어있다. 미륵전 앞의 느티나무는 신기하게 나무속에 구멍이 뚫려있고 그 안에 새로 만든 불상이 모셔져 있다. 나무속의 커다란 구멍으로 하늘이 보이는데도 나무가 살아있다는 게 신기하다. 원주 법천사지를 지키던 구멍 뚫린 느티나무와는 느낌이 또 다르다.
금강암의 미륵부처님은 다른 사찰의 크고 웅장한 모습과는 달리 작으면서 소박한 모습을 하고 있다. 이는 왕권과 위엄을 과시하고 권위를 세우려는 왕족 귀족 불교와는 대조적으로 일반서민의 모습을 닮고 있다. 특히 얼굴 뿐만이 아니라 상륜부의 모자는 조선시대 일반 서민들이 쓰고 다녔던 모자를 그대로 표현했다. 이것은 왕족, 귀족을 위시한 상류층의 불교에서 일반대중으로 불교가 전파되는 이른바 대중 불교로의 전환점이 되는 좌표로 볼 수 있어, 상징적 의미가 큰 석불이라고 한다.
실내에 안치되어 있는데도, 까만 석불에 연녹색의 이끼꽃이 피어있는 모습이 특이했다. 밖에 세워져 비바람 맞고 있는 풍찬노숙형 석불도 아닌데 이끼꽃이 핀 건 사암이라는 특성때문인지, 아니면 그저 절의 관리소홀때문인지 궁금증을 자아냈다.
금강암 자체의 규모는 중대암보다 작은 듯한데 미륵전과 산신각까지 갖추어진 탓에 느낌상 중대암보다 더 큰 느낌이었다. 하지만 처음에 미륵석불이 있는 곳을 바로 찾지 못해 한참 절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헤맸는데도(업은 애기 삼 년 찾는다고 바로 눈앞에 두고도, 미륵전 문이 닫혀있는 데다 잘 열리지를 않아서 거기가 아닌 줄...) 사람 그림자 하나 볼 수가 없어 왠지 쓸쓸하단 인상으로 남았다. 이 금강암도 원래는 다른 곳에 있었는데, 수몰 위기를 피해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한다. 그래서 천년고찰이란 이름이 무색하게 역시나 새 건물들이다.
늘 보령호 주변만 돌다가, 이번엔 산속으로 들어가 머물면서 이 지역의 역사와 생활상들을 엿볼 수 있었다. 때론 이렇게 익숙한 길이 아닌 옆으로 새어 새로운 길에 도전해야 색다른 볼거리와 생각거리들을 얻게 된다. 우리 인생길에서도 익숙함만을 고집할 게 아니라 새로운 도전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이유이리라.
* 중대암은 신라 49 대 원강왕 4년 (879년) 무술년에 보선국사가 개산창건하시고, 산 이름을 아미산이라고 지으셨으며 중대암을 비롯 위쪽에 상대암(보현선원) 아래에 하대암 등을 세우셨다. 그 후 고려 숙종 2년(1097년)에 중수하여 산내의 남쪽에 지장암과 서쪽에 미타암이 있어 사찰 규모가 수도 선원으로 발전하던 중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침입으로 사찰이 모두 전소되고 인근 피란민들이 중대암을 중심으로 뒤쪽 산골짝과 남쪽 절골 등에 피란 왔으나 사찰 전소 등으로 모두 피해를 봐서 이름이 '적시골'이 되었다고 한다.
중창은 조선 중종 17년(1522년) 기미년 4월에 이뤄졌다. 순조 15년(1815년)에 홍중운 당시 이조판서가 중대암 중건을 위해 사유재산이던 산을 중대암 소유로 기증하고 관음전을 해체, 축소복원하였다. 1964년 홍토관 스님께서 중대암 주지로 임명받아 잘못된 사찰 재정을 바로잡아 1967년 중대암으로 등기 환원하고, 중창불사의 기반을 조성하여 1964년~1979년에 개수, 1988년에 전통 보존 사찰 충남 29호로 지정되었다. 관음전은 1995년에 국비보조와 사찰 신도 성금으로 구건물을 모두 해체한 후 원형대로 복원하여 1996년 5 월 7일 (음 3월 20일)에 준공하였다. 2002년 대적광전 불사를 시작하여 2010년 내부단청 및 기단불사하고 2011년 비로자나 부처님 신중탱화 불단 탁자 닷집 불사를 완료하여 2011년 10월 26일 준공 회향하였다. 2012년 8월 대적광전 중앙 석재 계단 및 주변 정비사업을 완료하였다.
* 금강암은 조선 3대 태종의 후비(后妃)였던 권씨의 소원을 빌기 위한 원당으로 무학대사의 제자 영암스님이 1412년 (태종12)에 건립하였는데, 건립을 주관한 사람은 후비 권씨의 아버지인 권홍과 딸인 옹주 이씨였다. 이때 조성된 석불은 2단의 좌대 위에 양손을 가지런히 하여 연꽃 봉오리를 받쳐 들고 다소곳하게 앉아 있는 모습의 미륵불이다. 금강암과 석불 조성 사실을 기록한 비편은 현재 절반 정도 파손된 상태로 남아 있는데 청석에 16줄 241 자만 남아있다. 비편의 기록은 조선 초기 왕실의 불교신앙 모습과 금강암과 석불의 조성시기를 알려주는 자료로서의 의미가 있다. 최근 극락전 해체 과정에서 나온 영조 때 만들어진 상량문에도 비편과 비슷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