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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그미 Dec 28. 2020

겨울이면 생각나는 그 사람

달성, 남평 문씨 본리 세거지

오소소 추운 겨울이 오면 유독 더 생각나는 사람.
목화씨를 들여와 일반 백성들이 따스하게
겨울을 나게 해준 문익점을 다들 아실 테다.

성탄절 연휴 동안
삼우당 혹은 강성군으로 불린 그의 후손들이 모여사는 달성군 화원읍 인흥 3길 16에 있는 남평 문씨 본리 세거지에 다녀왔다.

1840년을 전후로 해서 문익점의 18대손 문경호가 터를 닦은 뒤 그 일족들이 모여 살게 되었다고 한다. 원래는 '인흥사'라는 절이 있던 명당터를 구획하여 집터와 도로를 반듯하게 정리해 집을 지은 덕분에 도로망이 편리하게 정리된 한옥마을이다. 2016년에 방영된 드라마 '달의 연인' (이준기, 아이유,강하늘, 서현 등 출연) 촬영지이기도 했다.

세거지 건너편에는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의 화를 피하여 창건 당시의 원형을 보존하고 있으며,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7호로 지정된  <명심보감판본> 31매가 소장된 인흥서원이 있다.  

마을 앞에 마련된 주차장에 차를 세우면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이 문익점의 동상과 그 뒤에 쫘악 펼쳐진 목화밭이다. 박물관이나 학교 등지에서 관상용 또는 교육용으로 목화를 조금씩 키우는 곳들은 본 적이 있지만 농촌도 아닌데 이토록 넓은 곳에 목화를 재배하는 곳은 처음이어서 놀랐다.

달성의 마비정 벽화마을 가는 길에 차들이 많이 주차되어 있길래 어떤 곳인가 하는 호기심에 들렀기 때문에 처음엔 이곳이 어떤 곳인지 잘 몰랐다. 주차장 바로 앞의 동상과 그 아래 쓰인 글을 보고서야 이곳이 문익점의 후손들이 사는 마을임을 알았다. 너른 목화밭을 보면서 역시 문익점의 후손답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이 목화밭 또한 농사로서의 목적보다 보여주기용 목적이 더 큰지 목화솜이 거둬지지 않은 채 가지마다 하얗게 벙그러진 채 겨울을 맞고 있었다.
 
남평 문씨 세거지는 최근 한옥마을 붐을 타고 새로 생긴 곳이 아닌 이백 년 가까운 세월 동안 잘 관리되며 유지해온 기와집들이 골목골목 자리한 데다, 여전히 살림하며 사는 집들이 대부분이라 옛 부잣집들 한복판을 거닐다 온 느낌이었다. 한 집안 아홉 대소가와 재실 두 채, 인수문고와 부속건물 등 한울 안에 총 70여 채의 전통 기와집이 들어서 있다.

코로나만 아니면 옛 사우들이 모여 강론하던 재실 광거당, 우리 전통건축이 얼마나 튼튼하고 정교하게 지어질 수 있는가를 본보기처럼 보여주는 건물이자 각종 모임장소였던 수봉정사의 아름다움도 자세히 살펴보고, 국내에서는 드문 문중서고로 수만의 전적들을 수장한 인수문고와 열람과 독서를 위한 거경서사, 문고를 보완하는 중곡서고도 볼 수 있었을 텐데 출입이 금지되어 안타까웠다.

안쪽 모습이 너무 궁금해 나무 대문 사이사이에 난 틈으로 들여다보았더니, 대문을 들어서도 바로 집안이 보이지 않도록 쌓은 작은 담이 또 있었다. '헛담장'이라 불리는데 그 옛날에도 사생활을 참 중시해서 만든 구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세거지 한가운데 당당히 서서 300년간 마을을 굽어살핀 회화나무를 볼 수 있었던 건 큰 소득이었다. 느티나무와 같이 괴목으로 불리는 회화나무 노거수는 여간해서 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세거지를 돌아보는 동안 감탄하고 또 감탄했던 것은 잘 관리된 흙돌담길이었다.  얼마나 잘 관리를 하는지 티끌 하나, 무너진 곳이나 잡초 한 포기 없이 잘 관리된 높다란 흙돌담(민가의 담장 치고 꽤 높아서 2m 이상 되어 안을 도저히 들여다볼 수 없게 해 놓았다) 사이사이 골목길을  거니는 맛은 꽤 고적하니 좋았다. 비록 높다란 담벼락과 기와지붕만 본 건 아쉽지만 코로나가 종식된 언젠가는 내부도 꼭 볼 기회가 오리라 기대해본다.


* 국내 최대의 문중문고, 인수문고에 대해 더 알아보면...
인수문고는 문경호의 손자와 증손자인 후은 문봉성과 수봉 문영박 부자가 세운 광거당(廣居堂)에서부터 시작된다. 이들 부자는 1910년 자제들의 학문과 교양을 쌓기 위해 광거당을 지어 책을 수집하고 선비와 후손들이 공부할 수 있는 장소로 삼았다. 만 권의 전적을 소장하였으며 국내의 많은 학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었다. 이후 1970년에 수봉정사(壽峰精舍) 구내에 존안각을 지었는데, 이곳에서 수봉 정사의 서책과 광거당의 서책을 통합하여 보관·관리하게 되었다. 인수문고라 명명한 것도 존안각으로 옮겨 관리한 이후이다.

지금의 인수문고 위치로 옮겨진 것은 1982년이다. 국고 보조로 비좁았던 존안각을 헐고 수봉 정사 옆에 있던 밭에 서고 건물을 새로 지어 인수문고의 서책을 보관하였고, 인수문고 서책을 열람하고 그 내용을 담론하기 위한 건물로 거경서사(居敬書舍)를 함께 신축하였다. 1993년에는 20세기에 간행된 한국학 관련 장서를 보관하기 위해 중곡 서고(中谷書庫) 한 동을 지어 완전한 체계를 갖추었다.

2007년 조사 당시 고서는 모두 1,342종 8,556건, 고문서는 6,814건, 책판은 5종 558판, 유물은 신주함, 문갑, 벼루, 도자기 등으로 27점이며, 현판은 모두 27점이 소장되어 있다. 이것은 중곡 서고에 보관되어 있는 현대서 3,961종 5,590책을 제외한 것이다.
(향토문화전자대전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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