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가기엔 시간이 여의치 않고, 늘상 가는 곳을 찾기엔 뭔가 아쉬울 때 종종 찾는 곳이 예산의 예당저수지이다.
예산군과 당진군에 걸친 넓은 홍문(鴻門)평야를 관개하기 위하여 1929년 4월에 착공하여 1963년에 완공한 예당저수지는 면적 약 9.9 km² , 둘레 40 km, 너비 2 km, 길이 8 km에 이른다. 관개면적이 3만 7,400 km² 에 달하는 넓은 호수로, 상류의 집수면적이 넓어 담수어의 먹이가 풍부하게 흘러들어오기 때문에 오래전부터 낚시터로서 유명하다.
또한 2019년 4월6일 개통된 예당호 출렁다리는 예산군의 새로운 대표관광지로 국내 최장 길이인 402m의 길이를 자랑하고 있다. 예당호를 따라 조성된 느린호수길이 2019년 10월 오픈했으며 예당호 출렁다리를 거쳐 대흥면의 예당호중앙생태공원까지 7km에 이른다. 이 길은 140m 길이의 부잔교와 함께 아름다운 경관을 보여준다.
보통은 예당호 출렁다리쪽으로 들어와서 다리 한 번 걷고 주변의 부잔교와 느린호수길을 조금 걷거나 조각공원을 둘러보다 차로 예당호 한 바퀴 둘러보며 돌아오곤 했는데, 이번엔 반대 방향에서 예당저수지로 진입하다 보니 전엔 못 보고 지나쳤던 곳들이 눈에 들어왔다.
낚시터 명소답게 예당호 곳곳에 낚시하는 수상좌대들이 둥둥 떠있는데 올 들어 최강추위라는 일기예보답게 물이 얕은 곳은 얼음이 얼어있었다. 이렇게 추운데도 물이 얼지 않은 곳에 낚싯대를 드리운 강태공들이 제법 많았다. 낚시에 빠지면 마누라도 필요 없다는데, 이깟 추위쯤이야 걸림돌이 되지 않겠지.
"저 사람들은 춥지도 않은가 봐~ 대단해~" 하며 지나치는데 저수지 안쪽으로 쭉 들어간 곳에도 낚시하는 사람들이 차를 가지고 들어간 게 보였다. 저기까지 길이 나있나? 어떻게 들어갔지? 궁금해하며 호수를 돌다 보니 섬 비슷한 곳이 보이고, 내비를 살피니 그곳까지 길이 나 있었다.
도로 옆으로 제법 크게 길이 나있어서 따라 들어가니 '전국 낚시대회'가 열리는 곳이란 표지판이 보였다. 화장실까지 갖추어진 장소로 섬의 반은 논이었다. 근처 마을 주민들이 이곳까지 들어와 농사를 짓는 곳이기도 해서, 추수 뒤 남은 곡식알들을 먹으며 겨울철새들이 자리를 잡고 겨울을 나는지 낚시하러 온 사람들보다 많은 건 겨울철새들이었다. 섬을 한 바퀴 돌며 새들 구경에 신이 났다. 흔히 보는 쇠오리, 청둥오리 외에도 처음 보는 검은 털에 잿빛 부리를 지니고, 길도 막 떼로 걸어 다니는 새들을 봤는데 예당호의 겨울손님인 '물닭'이라고 한다. 어쩐지 닭처럼 땅을 잘 걸어다닌다 했지~ 이외에 비오리, 흰죽지, 논병아리, 원앙도 많이 관찰되며, 운이 좋으면 희귀한 흰비오리도 볼 수 있다고 한다.
섬 맞은편에 조경이 잘 된 '예당정원'이란 곳이 보여서 정원수를 키워서 파는 곳인가 했는데, 알고보니 펜션이었다. 그곳에서 보는 조망도 꽤 좋을 듯하였다.
섬을 나와 다시 예당호를 따라 달리다 들른 곳은 느린호수길의 종점인 대흥슬로시티. 생태적으로 우수하고, 전통문화와 예술이 어우러진 예산군 대흥면은 우리나라에서 여섯 번째로 지정된 슬로시티이다. 이곳은 우리가 어릴 때 교과서에서 접한 '의좋은 형제'의 실제 인물들이 살았던 마을이라 '의좋은 형제 공원'이 조성된 곳이기도 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대충호장 이성만과 이순 형제가 모두 지극한 효성으로 자자했는데 부모가 돌아가신 후에도 이성만은 어머니 분묘를 지켰고, 이순 또한 아버지 분묘를 지켰다. 3년의 복제를 마치고도 아침에는 형이 아우 집으로 가고 저녁에는 동생이 형의 집을 찾았으며 한 가지 음식이 생겨도 서로 만나지 않으면 먹지 아니하였다 한다. 또한 이들은 부모가 살아 계실 때에는 맛있는 음식으로 봉양하고 봄, 가을에는 떡을 하여 부모님께 드리고 기쁘게 친척들과 나누어 먹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연산군 3년(1497년)에 가방교 옆에 이성만, 이순 형제의 갸륵한 행실에 대하여 왕이 정문을 세워 표창하고 자자손손에게 영원히 모범되게 하라는 173자를 기록한 효제비를 세웠다고 한다.
그런데 1964년 예당저수지가 완공되면서 수몰되었다가 1978년 극심한 가뭄으로 예당저수지의 물이 빠지면서 우연히 발견되어, 의좋은 형제가 실제로 존재했던 인물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의좋은 형제 이야기는 서로의 형편을 생각해 밤중에 형은 아우의 볏단에, 아우는 형의 볏단에 자신의 벼를 몰래 나르다 서로 만나는 내용으로 1964년부터 2002년까지 초등학교 국어 국정교과서에 실렸다. 이들의 이야기를 주제로 조성된 의좋은 형제 공원은 충남 예산군 대흥면 상중리에 위치하고 있는데, 바로 앞에는 알록달록 예쁜 대흥초등학교가 있고, 위로는 대흥관아와 면사무소, 달팽이미술관이 있다.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74호인 대흥관아와 아문도 꼭 들러서 볼만한 곳이다.
대흥관아는 조선시대 대흥군의 현청으로서 <여지도서(異地圖書)> 대흥군 공해조에 의하면 객사에는 정청 3칸, 동대청 12칸, 은사정 14칸, 서헌방 16칸, 하마대 4칸이 있었고, 아사에는 구동헌 9칸, 신동헌 16칸, 남상방 4칸, 북상방 5칸, 대청 6칸, 초당 5칸, 행랑 7칸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현재는 동헌과 아문만이 남아 있다.
동헌은 역대 군수들이 집무를 보던 정청으로 정면 6칸, 측면 2칸, 팔작지붕의 목조 기와집이다. 중앙에 정청인 대청이 있고, 좌우에 온돌방이 있다. 전면으로 툇마루가 이어져 있고, 북쪽에는 2칸 규모의 대청이 있다. 4벌대로 높게 쌓은 장대석 기단 위에 전면에는 방형의 초석을, 후편으로는 덤벙주초석을 혼합하여 놓았다.
아문은 대흥동헌으로 들어서는 문이다. 지붕을 높게 올린 솟을대문 형태로 '임성아문'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임성' 은 통일신라때 대흥지역을 부르던 명칭이라고 한다. 예산군에 남아있는 유일한 관아건물로 역사적, 건축학적 가치가 있다.
아문 앞에는 예산 이성만 형제 효제비(유형문화제 제 102호)가 서있다. 원래 가방교 옆에 있었는데, 예당저수지에서 발견된 뒤 현재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이 효제비와 아문 사이에 218년된 느티나무 보호수가 멋드러지게 서서 마을을 지켜주고 있다.
동헌 건물 뒤로는 대원군 때 세운 척화비와 영조의 11녀인 화령옹주의 태실이 있고, 작은 연못 앞에 제법 큰 장독대가 놓여있다. 이곳은 드라마 '산너머 남촌에는'의 종가집 촬영지로 알려진 곳이기도 하다.
동헌 뒷담 너머로는 봉수산 자연휴양림과 임존성이 보이고 그 아래 유서 깊은 예산 내포 천주교 성지인 대흥 봉수산 성지가 보인다. 그곳은 이따가 가보기로 하고, 깨끗하게 잘 관리된 동헌을 한 바퀴 천천히 둘러본 뒤 나오면 의형제 동상 왼쪽으로 예쁘게 꾸며진 화장실과 달팽이미술관이 나온다. 달팽이미술관은 이 지역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의 전시공간 마련을 위해 세워졌는데 마침 '중산 남철우 초대작가전'을 하고 있길래 오랜만에 서예작품과 전각작품 들을 구경했다. 의좋은 형제 공원 안에는 교과서에 실린 이야기를 재현한 조각상도 있고, 형제의 집을 복원한 모형과 포토존, 관아거리 등이 잘 꾸며져있다. 공원을 나와 바로 옆에 있는 봉수산 성지로 향했다.
이곳은 조선시대 대흥형옥원이 있던 자리이기도 하다. 형옥원은 죄인들을 가두는 옥, 고신과 형벌을 가하는 환토를 가리킨다. 조선시대에는 대흥군 중심인 동서리에 행정시설, 상중리에 병사 · 옥사 · 제사시설, 교촌리에 교육시설이 있었다고 한다. 대흥군의 옥은 상중리 296번지 일원 옥담거리에, 처형장은 예당호 내천변에, 저잣거리는 동서리 173번지 일원에 있었다. 이 같은 형옥시설은 조선시대 대흥군의 위상과 역사·문화, 그리고 한국 초기 천주교를 이해하는데 중요하여 '대흥 봉수산 순교성지' 인 이곳 상중리 367 번지에 당시의 대흥옥을 재현한 것이다.
다산 정약용은 '목민심서' 에서 이승의 지옥인 옥에는 '옥중오고'가 있다고 했다. 큰칼, 갈취, 질병, 추위와 주림이다. 그 중 출옥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유체고가 으뜸이라 했다. 천주교인들과 같은 양심수들에게 옥중오고가 길어지면 신념을 버리고 배교하거나 끝까지 믿음을 지켜 순교하는 경우로 나뉜다. 신유박해(1801) 때 대흥인 복자 김정득 베드로와 여사울(예산군 신암면)인 김광옥 안드레아는 공주 무성산에서 잡혀 대흥과 예산에 투옥되었다가 홍주· 청주 · 포청옥으로 이송되며 긴 옥고를 치루었다. 마침내 두 분은 대흥옥과 예산옥에서 각각 마지막 밤을 보내고 1801년 8월 25일 정오에 대흥과 예산 형장에서 참수되어 '의좋은 순교자' 가 되었다고 한다.(순조실록 2권). '내일 정오 천국에서 만나세'라는 현판이 달린 대흥옥의 문을 들어서면 이들이 옥에 갇힌 모습을 재현해놓았다. 성지 가운데 서있는 성모마리아상을 처음엔 그냥 지나쳤는데, 뒤따라온 남편이 보더니 "어 이게 '참수대'였네?" 해서 돌아오며 자세히 살펴보니 성모마리아상이 서있는 오목한 돌에 '참수대'라고 쓰여있었다. 갑자기 눈이 땡그래졌다.
조선시대 사형에는 사약을 받는 사사형, 백지사형, 교수형, 머리를 자르는 참형, 살을 저미고 몸을 자르는 능지처사형이 있었다. 사사 · 백지사 · 교수형은 형률에 따라 비공개적으로, 참형과 능지처사형은 군율에 따라 공개적으로 집행하였다.
참형은 추분을 기다렸다가 이듬해 춘분까지 형조· 포도청, 의금부가 집행하는 대시참형과 때를 가리지 않고 군기관이 집행하는 부대시참형이 있었다. 참수형장은 장터, 갈림길, 물가, 군사훈련장, 시신을 버리는 곳, 정치적 의도가 있는 장소(대흥 · 예산 · 갈매못 ·절두산)였다. 복자 김정득과 김광옥은 1801년 8월 25일 사안의 중대성과 긴급성 때문에 군율에 따라 '부대시참형' 으로 공개 처형되었고, 잘린 머리를 장대에 며칠간 매다는 효수경중 의식을 거행하였다고 한다.
종교적 신념을 위해 옥고를 치루고 머리가 잘려 효수되는 참혹한 죽음도 마다하지 않은 그들의 꿋꿋한 의지 덕분에 오늘날 많은 천주교인들이 종교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게 아닌가 한다. 천주교도는 아니지만 성지 안에서 느껴지는 이런 숭고한 느낌은 뭔가 삶을 더 감사하고 깊이있게 만들어준다.
성지를 나오는 길에 '619 대흥역'이란 건물이 눈에 띄어서 가보니 아직 준비중인 곳으로 '원홍장'이란 대흥판 효녀 심청의 이야기를 주제로 '원홍장 둘레길'을 조성하고 있었다.
원홍장은 백제 때 여인으로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용모가 뛰어나고 효심이 지극하여, 앞을 보지 못하는 아버지를 성심을 다해 봉양했다.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매일 관세음보살께 기도를 드리던 원홍장은 효심과 불심으로 자신을 봉양하여 진나라로 건너가 황후가 되었고, 착한 마음씨로 진나라 황제의 총애를 받았다. 원홍장은 아버지에 대한 효심과 고국에 대한 그리움으로 불상과 나한상을 만들어 백제로 보냈다. 한편, 홍장이 떠난 뒤 슬피 울던 아비 원량은 앞을 볼 수 있게 되어 평안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
예산군 대흥면 원홍장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쓰인 '관음사적기(觀音寺積記)'에 기록된 '충청도 대흥에 원량이라는 앞을 보지 못하는 장님이 살았다'는 가기록을 바탕으로 쓰여졌는데, 원홍장의 착한 성심과 효심을 널리 알려 현시대에 사라져가는 ‘효’와 ‘예'의 의미를 되새기고자 예산군 대흥면에 원홍장 둘레길을 조성하게 됐다고 한다.
대흥초등학교를 지나서 출렁다리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대흥향교도 나오는데 거기는 들러보지 않았다. 향교가 있는 마을이라 그곳은 교촌이라고 불린다.
대흥슬로시티는 작지만 구석구석 볼 것들이 많은 동네였다. 아담하면서도 정갈하게 꾸며진 게 참 마음에 들었다. 날이 좋으면 의좋은 형제 공원 앞에서 출렁다리까지 이어진 '느린 호수길'을 걸어볼 만도 하련만 너무 추워서 엄두를 내지 못한 게 아쉽다. 다음에 날이 좀 따스해지면 사브작사브작 거닐며 맑은 예당저수지와 유서 깊은 장소들을 다시금 오래오래 바라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