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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그미 Jan 19. 2021

운이냐, 노력이냐?

응답하라 1988

넷플릭스 덕분에 오래전 드라마들을 하나하나 다시 보고 있다. 2016년작 '시그널'과 '달의 연인 보보경심 려'에 이어 보게 된 2015년작 '응답하라 1988'.

2012년 '응답하라 1997', 2013년 '응답하라 1994'의 인기에 힘입어 나온 응답하라 시리즈 마지막이다. 응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정주행을 했고, 응칠은 응사 끝나고 나서 뒤늦게 찾아봤으나 내 스타일이 아니어서 좀 보다가 말았다. 응팔은 방영당시에 재밌게 보다가 점점 시들해져서 16화 이후엔 안 봤던 걸 이번에는 20화 끝까지 다 봤다.

1988년 고2였던 도봉구 쌍문동 골목친구들 덕선 정환 택 선우 동룡을 주인공으로 해서 가족과 친구들의 감칠맛 나는 에피소드로 꾸려진 이 드라마는 2015년 덕선이의 현재 남편이 누구냐를 놓고 '어남류(어차피 남편/남주는 류준열)'와 '어남택(어차피 남주는 택이)'파로 나뉘어져 치열한 남편 찾기 공방이 펼쳐지기도 했다. 드라마에선 어남택파가 승리했지만 현실에선 어남류파의 바람대로 덕선이 역할의 혜리와 류준열이 실제 연인이 되어 몇 년째 잘 사귀고 있다는 사실도 뒤늦게 알았다.

나 역시 택이보다는 정환이(류준열 분)가 덕선의 남편이길 바랐는데, 드라마 흐름상 택이 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엔 타이밍을 못 맞췄다고 생각했지만 알고보니 타이밍보다 중요한 것은 누가 더 간절하냐였음을 정환이 인정한 것처럼 덕선과 사귀기를 더 간절히 바랐던 것은 택이었으니까. 덕선이랑 잘 안 되면 죽을 것 같다고 친구들 앞에서 고백한 택이의 간절함이 덕선을 끌어당긴 것이다.

타이밍이 그저 운이라면, 간절함은 온 몸과 마음을 기울이는 노력이다. 운칠기삼, 운이 칠할이고 기술(노력)이 삼할이란 말이 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일어나는 모든 일의 성패는 운에 달려 있는 것이지 노력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을 지녔다.

아무리 노력해도 일이 이루어지지 않거나, 노력을 들이지 않았는데 운 좋게 어떤 일이 성사되었을 때 쓰는 말이다. 자신의 주위에 어떤 사람이 있는데, 별로 노력을 하지 않았는데도 하는 일마다 잘되어 성공을 거둘 경우, 인생사는 모두 운수나 재수에 달려 있어 인간의 노력 가지고는 되지 않는다는 체념의 뜻으로 쓰기도 한다. 결국 운이 따라주지 않으면 일을 이루기 어렵다는 말인데, 이와 관련된 중국 설화가 있다.

한 선비가 자신보다 변변치 못한 자들은 버젓이 과거에 급제하는데, 자신은 늙도록 급제하지 못하고 패가망신하자 옥황상제에게 그 이유를 따져 물었다. 옥황상제는 정의의 신과 운명의 신에게 술 내기를 시키고, 만약 정의의 신이 술을 많이 마시면 선비가 옳은 것이고, 운명의 신이 많이 마시면 세상사가 그런 것이니 선비가 체념해야 한다는 다짐을 받았다. 내기 결과 정의의 신은 석 잔밖에 마시지 못하고, 운명의 신은 일곱 잔이나 마셨다.

옥황상제는 세상사는 정의에 따라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운명의 장난에 따라 행해지되, 3푼의 이치도 행해지는 법이니 운수만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로 선비를 꾸짖고 돌려보냈다고 한다.

쉬지 않고 꾸준하게 한 가지 일만 열심히 하면 마침내 큰 일을 이룰 수 있음을 비유한 우공이산(愚公移山)과는 정반대의 뜻이다.(두산백과 참고)

흔히들 이야기하는 운칠기삼이란 말과 달리 덕선의 남편자리는 운이 아닌 노력에 돌아갔다고 생각한다. 덕선의 마음이 결정적으로 기운 계기가 남친에게 바람맞고 혼자 공연을 관람하게 된 덕선의 사정을 알고 정환은 친구랑 영화 보는 내내 망설이다 뒤늦게 뛰쳐나가는 바람에 놓쳤던 기회를, 택이는 사정을 알게되자마자 그동안 바둑대회를 해오면서 한 번도 하지 않았던 기권을 선언하고 덕선에게 달려가 만났던 날이었으니까.

물론 정환이 함께 학교 다니면서 꾸준히 소소하게 덕선 주변을 돌며 챙겨왔던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덕선을 여자친구로서 더 간절히 원한 것은 정환이 아니라 택이었다. 일곱 살에 엄마를 잃고 아빠와 살면서 늘 엄마를 그리워하며, 바둑천재의 외로운 길을 혼자서 걸어와야 했던 택이에겐 마음 속 빈자리를 채워줄 이가 덕선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록 내가 응원하던 정환이가 덕선의 남편이 되진 않았지만 택이의 옆자리에 덕선이 있게 된 것이 참 다행이고 잘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운명이 아무리 큰 힘을 발휘하더라도 간절한 마음으로 노력하는 이를 물리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인간의 영역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기에 신의 영역을 넘볼 수 없는 인간으로선 희망을 걸어보는 마지막 보루라서 더 이런 생각이 드는 걸지도 모르겠다.

응팔을 다시 보면서,
내가 간절한 마음으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떠올려 보았다. 그리고 그 간절한 바람을 이루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도 자문해 보았다.
운명의 신마저도 나의 노력을 외면하지 않을 만큼 그렇게 열심히 살아야 하지 않겠나... 하고 올해의 화두를 던져본다. 어제 저녁에 뜬 초승달을 보며 음력으로는 아직 경자년 섣달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새롭게 각오하고 출발하기에 좋은 때다.


초승달 by 장준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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