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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그미 Dec 31. 2020

뒤엉킨 실타래를 정리하며

2020년 마지막 날 단상

방을 치우다 보니 컴퓨터 책상 위에 마구 엉킨 실타래가 널브러져 있었다. 선물용 포장끈으로 쓰이는 거칠거칠한 질감의 두꺼운 실이었다.

딸이 간밤에 푼다면서 두 손에 들고 있는 걸 봤는데, 전혀 정리되지 않은 채로 여전히 뒤엉켜있었다.

"딸아~ 이거 안 푸니?"

"하다 하다 안 돼서 그냥 포기했어요."

"그렇다고 그냥 두면 어떻게 쓰려고? 엄마랑 같이 풀자~"

크리스마스 장식의 컵 종이 홀더를 납작하게 눌러 실패로 만든 뒤 거실 바닥에 마주 앉아, 나는 풀고 딸은 감고 하며 뒤엉킨 실타래를 풀기 시작했다.

어찌어찌 잘 되는가 싶다가 중간쯤에 이르니 완전 꼬여서 가위로 잘라내지 않으면 도저히 풀 방법이 없어 보였다.

고민이 됐다.
끙끙대며 묘수를 찾을 것인지
편하게 가위로 싹둑 자를 것인지.

"딸아, 이거 어떻게 할까?"

"모르겠어요. 엄마 알아서 하세요."

어떻게 하나 고민하는 동안 딸은 졸리다며 침대에 가서 누워버렸다. 지가 쓰다가 엉킨 걸 풀어주려 했더니, 또 포기하네... 배신감도 들었지만 이왕 시작한 거 끝을 보자며 혼자 고민하다 결정했다.

끝까지 실을 안 자르고 푼대서 누가 상 줄 것도 아니고, 어차피 필요한 만큼 잘라서 쓸 거라 중간에 가위로 자른다고 해서 큰 일 날 것도 아닌지라 꼬여서 단단히 매듭진 부분을 자르기로 했다. 엉킨 실을 한 번 자른 뒤 풀기 시작하니 대책 없어 보이던 뒤엉킨 실타래가 어느덧 깔끔하게 정돈이 됐다.

"다 풀었다, 이거 봐."

잠들었다 깬 딸에게 잘 정리된 실타래를 보여주니 배시시 웃으며 좋아한다.

올해 고3을 맞은 딸이 새로운 도전 앞에 서기까지의 과정은 마치 뒤엉킨 실타래와 같았다. 코로나가 터지고, 온라인 학습이 지속되며 학교 갈 날을 고대하던 딸은 막상 학교에 다니게 되자 열심히 하는 듯했으나 점차 힘들어했다. 러다 공부를 한다고 는데도 중간고사 성적이  잘 안 나오자, 1학기 후반부터는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그냥 시간만 보내는 것 같았다.

그 전까진 믿어주고 응원해주고 필요한 거 해주는 선에서 머물러 있었 나는 이러단 아무것도 안 되겠다 싶어서 딸의 공부에 적극 개입했다.
딸이 오래전부터 하고 싶어 하고 잘하는 일을 찾아 그 일을 하는 데 필요한 공부를 할 수 있게 했다. 그러자 다시 정신 차리고 열심히 하기 시작했다. 힘들겠다 싶은데도 일정에 맞춰 열심이더니 한 달여만에 비교적 빠른 성과를  냈다. 오랜만에 맛본 성취감에 기뻐하는 딸을 보니 나 역시 기분이 좋았다. 어릴 때부터 시험에서 뛰어난 성적을 받아도, 대회에서 큰 상을 받아도, 기관에서 장학금을 받아도 무덤덤하던 아이가 처음으로 활짝 웃었다. 뒤엉킨 실타래가 풀린 느낌이었다.


이제야 첫 관문을 통과했지만 앞으로는 깔끔하게 정리된 실타래에서 실이 술술 풀리듯 딸이 인생의 관문들을 술술 통과하길 바란다. 그래서 어제 고등학교 졸업을 하며 새로운 세상에 발을 내딛게 된 딸이 좋아하는 일을 하며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가길 빈다.


한 해의 마지막 날은 그 날이 그 날 같은 하루하루의 연속을 깔끔하게 끊어내게 해 준다. 그래서 한 해동안 해온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해 후회와 미련과 아쉬움이 남더라도 깨끗하게 정리하고 새로운 시작을 가능하게 한다.


그 어느 해보다 다사다난했던 2020년을 헝클어진 실타래 정리하듯 잘 정리하시고, 모쪼록 복된 새해 맞이하시길 바란다.


절반쯤 정리한 엉킨 실타래. 처음 꺼를 찍었어야 했는데... 진짜 엉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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