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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그미 Dec 18. 2020

내리사랑

중1이 되던 해 3월
그해 봄은 유난히 심란해서
학교에서 교과서를 나눠주던 날은
하루종일 머리가 아프고 속이 메슥거렸다

집까지 걸어걸어 오리길을
차마 무거운 교과서까지 들고
올 수가 없어 교과서를 들고
교무실로 찾아가
담임선생님께 맡기고
털래털래 힘없이 집으로 왔다

피나면 쑥 따다 찧어서 바르고
배 아프면 생된장 물에 풀어 마시던 시절
이런 병에 딱히 쓸 약이 있을리 만무해
저녁도 먹는둥 마는둥
밤새 끙끙거리다
다음 날 새벽 동 트기 전
시퍼런 여명이 마당을
한가득 채우고 있을 때

방문 밖 토방으로
부르르 뛰쳐나가
철푸덕 고개를 숙이고
토방 아래
일곱 식구 신발이 그득한
섬돌 위에 토를 했다

마침 아침을 준비하기 위해
아궁이 재를 고무래로 끄집어내어
삼태기에 담아 두엄 위에 비워내시던
엄마가 아무 말 없이 오셔선
놀란 기색도 없이 토한 것들을 치워내셨다

고맙다고 말했을까?
죄송하다고 말했을까?
엄마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도
기억하지 못한 채
겨우 속이 진정된 난
다시 방으로 들어가
밤새 자지 못한 잠에
까무룩 빠져들었다

그리고 3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오늘 새벽 내내 잠을 못 자던 딸이
내가 건넨 한방소화제 스무 알을 삼키고
슬슬 걸어다니며 속을 다스리는 것 같더니만
갑자기 와라락 토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거실 베란다에 연거푸 토를 하길래
아침 준비하느라 애콩 씻던 바가지를
들고 달려가 얼굴 아래 받쳐주고 등을 두드렸다.

다 토한 듯 하여
걸레 가져다 치우니
어떻게 하냐고,
여기다 토해서 죄송하다고
딸이 어쩔 줄을 모른다.
괜찮으니 어서 씻고 오라 이르고
마저 치우는데...

치우는 내내
30여 년 전 새벽, 토방 앞 섬돌 위에
어지러이 분분한 토사물을 말없이 치우던
엄마의 뒷모습이 선명히 떠올라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렇게 사랑은
말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완주 화산지 by 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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