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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그미 Feb 10. 2021

사그랑주머니

행복하면 뭐든 잘할 수 있어

겉모양만 남고 속은 다 삭은 물건을 '사그랑주머니'라고 한다. 자식을 위해 모든 걸 다 내놓고 희생한 부모의 모습을 빗댄 표현으로 종종 쓰이는 표현인데 [좋은생각] 2021년 2월호 53쪽에 실린 '사그랑주머니 이야기'를 읽다가 따스한 깨달음 하나를 얻었다.

40년 넘게 운영해오던 구멍가게를 접으시고 동네 외곽에 작은 정원과 텃밭이 달린 새 보금자리를 마련하신 권민정님의 할머니 이야기다.

할머니는 노년에 마련하신 예쁜 집에 손주들을 위해 다락방을 만들고 함박꽃, 수국, 능소화로 정원을 가꿔 가족들이 언제든 찾아와 편히 쉬었다 가길 바라셨다.
이토록 자식과 손주들에게 지극정성이시던 할머니가 지난 여름부터 기운이 없다며 자꾸 누우려고만 하시고, 할 일을 마쳤다며 시들시들하시더니 뜨거운 햇볕을 이겨내지 못하고 그만 사그랑주머니가 되버리셨단다.

그런데 할머니 집에 머물면서 임용고시를 준비하는 동안 나태해진 자신에게 화도 나고, 불안해하는 손녀에게 어느날 사그랑주머니가 된 할머니께서 하신 말씀.

"잘해야 행복해지는 게 아니라 행복하면 뭐든 잘할 수 있단다."

- 행복하면 뭐든 잘할 수 있다는 이 말씀이 어찌나 따뜻하고 좋은지 나에게도 마음을 가라앉히는 따뜻한 차 한 잔이 되었다. 질풍노도의 시기를 지나고 있는 내 아이에게도 전해주고픈 귀한 말씀이었다.

이제 알겠다. 사그랑주머니는 겉모양만 남고 속은 다 삭은 듯해 보이지만 텅빈 그 안에 인생의 지혜와 통찰이 담뿍 들어있음을. 뭐든 늙고 물러서 속이 빈 사그랑주머니가 된 것을 보면 무작정 섬겨야 하는 까닭을.


< 사그랑주머니 >
​​
​노각이나 늙은 호박을 쪼개다 보면
속이 텅 비어 있지 않데? 지 몸 부풀려
씨앗한테 가르치느라고 그런 겨.
커다란 하늘과 맞닥뜨린 새싹이
기죽을까봐, 큰 숨 들이마신 겨.
내가 이십 리 읍내 장에 어떻게든
어린 널 끌고 다닌 걸 야속게 생각 마라.
다 넓은 세상 보여주려고 그랬던 거여.
장성한 새끼들한테 뭘 또 가르치겄다고
둥그렇게 허리가 굽는지 모르겄다.
뭐든 늙고 물러 속이 텅 빈 사그랑주머니를 보면
큰 하늘을 모셨구나!하고는
무작정 섬겨야 쓴다.

- 이정록 시집 <어머니 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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