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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그미 Jul 12. 2021

골목길 추억

그때 그 시절

비가 오거나 눈이 오거나

맑거나 흐리거나 어느날 문득,

늘어나는 아파트숲에 사라져가는

골목길이 그리운 날이 있다.


옹기종기 오래된 집들이 몰려있는 동네에는 미로처럼 이어진 골목들이 골목골목마다 은근히 쌓인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여기 골목길에 얽힌 추억 한 토막 꺼내본다.

중학교 다닐 때, 해남읍에서 장사를 하시는 삼촌의 일을 명절대목때 잠시잠깐씩 도우러 가곤 했다. 결혼전이라 할머니께서 같이 계시며 도우셨지만 일이 많을 땐 고양이손이라도 빌린다고 하지 않던가. 나는 가서 밥도 하고, 설거지랑 청소도 하고, 물건 정리나 장부정리도 돕고 그랬다.


삼촌집은 마당 하나와 우물을 가운데 두고 다섯 집이 빙 둘러 함께 사는 곳이었다. 제일 큰 주인집 빼고 나머지는 셋집이었다. 삼촌은 그 중의 한 집에 세를 들어 사셨다. 주변의 많은 집들이 그러했고, 처음에 멋모르고 나섰다가 집을 못 찾아 헤맸던 골목길은 두세 사람이 서면 꽉 찰듯 좁았다.

겨울방학 때는 며칠씩 삼촌집에서 먹고자며 일을 돕곤 했다. 그러던 어느 늦은 저녁, 답답해서 바람이라도 쏘이려고 집밖으로 나가 골목을 어슬렁대고 있는데 가녀린 목소리가 나를 불러세웠다.

"학생~ 안 바쁘면 나 좀 도와줄래?"

돌아보니, 다방에서 일하는 레지언니가 어딘가로 커피 심부름을 가는지 보온병과 컵을 싼 보자기를 들고는 나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무슨 일인데요?"

"내가 저기로 커피심부름을 가는데, 골목도 어둡고, 거기가 공사현장 근처라 혹시 안 좋은 일 생길까봐... 요즘 무서운 일들 많잖아. 학생이 같이 가주면 좋겠는데."

다방종업원이 커피배달 갔다가 사라져서 얼마 뒤 변사체로 발견된 사건이 세상을 시끄럽게 하던 때였다.

마침 별달리 할 일도 없고, 보디가드 노릇에 흥미도 생겨서 그러마고 썩 동행에 나섰다. 배달시킨 곳에 들어갔다가 일정시간 지나도 안 나오면 경찰에 신고 좀 해달라는 이야길 듣고는 밖에서 조마조마해하며 한참을 기다렸다.


그 밤의 골목은 왜 그리 어둡고, 언니가 들어간 건물의 외등은 왜 그리 침침한 백열등 불빛이었는지...

다행히 별탈없이 무사히 돌아온 언니와 집근처 골목까지 가면서 이런저런 얘기들을 꽤 나누었는데 다 잊고 또렷이 기억에 남는 건 하나.

"학생은 나중에 커서 이런 거 하지 마~"

아마도 공부 열심히 해서 번듯한 일 하라는 이야기도 덧붙인 거 같은데, 뭐 그건 늘상 듣는 말이니까 그렇다 치고 이 말이 내 기억에 강하게 각인된 이유는 그 말을 듣던 순간 내게 든 생각이

'언니도 참 나를 뭘로 보고~ 내가 이런 몰골로 무슨 레지를 하겠어요?' 였기 때문이다.

선머슴처럼 짧은 커트에 태권도장이나 합기도장을 기웃대며 열심히 수련할 생각을 하는 나에게 다방레지라니! ㅋㅋ 너무 안 어울렸다.

그리고 그 다음에 든 생각은

'아, 나도 여자는 여자구나~ 이런 말을 듣고!'

하면서 문득 나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마지막에 가서야 언니의 애잔한 삶이 느껴졌다.

참 이 어이없는 생각의 순서라니~

해남 오일장 너머 좁고 긴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언니와 나란히 걸으며 나눈 이야기가 새삼 떠오른 것은 중학교를 마치고 고등학교 가기 전 1년간 쉬면서 광주의 한 목욕탕에서 캐셔일을 보다 겪었던 한 페친의 추억담을 읽고나서였다.

어린 나이에 참 힘드셨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분의 이야기나, 내가 만난 다방 언니의 이야기나

80년대 남도 한 자락에서 살던 고단하고 애달픈 여인들의 이야기인데, 나의 추억은 왜 갑자기 희극이 되어버리는 것인지... 음냐.

[ 골목이라는 말 속엔 ]

골목이라는 말은 얼마나 따뜻한가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누군가 내다 버린 연탄재처럼

다친 무릎에 빨간약 발라주던

무뚝뚝한 아버지처럼

골목이라는 말 속엔 기다림이 있다

벚나무 아래 작은 의자 하나 누군가를 

기다리는어둠이 먹물처럼 번지는 시각

생 무를 깎아 먹는지

창밖으로 도란도란 들리는 목소리

골목이라는 말 속엔 아이들이 있다

너무 늙어버린 골목이지만

- 김지헌


* 아래는 장동주, 엄경근 작가님의 그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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