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기종기 오래된 집들이 몰려있는 동네에는 미로처럼 이어진 골목들이 골목골목마다 은근히 쌓인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여기 골목길에 얽힌 추억 한 토막 꺼내본다.
중학교 다닐 때, 해남읍에서 장사를 하시는 삼촌의 일을 명절대목때 잠시잠깐씩 도우러 가곤 했다. 결혼전이라 할머니께서 같이 계시며 도우셨지만 일이 많을 땐 고양이손이라도 빌린다고 하지 않던가. 나는 가서 밥도 하고, 설거지랑 청소도 하고, 물건 정리나 장부정리도 돕고 그랬다.
삼촌집은 마당 하나와 우물을 가운데 두고 다섯 집이 빙 둘러 함께 사는 곳이었다. 제일 큰 주인집 빼고 나머지는 셋집이었다. 삼촌은 그 중의 한 집에 세를 들어 사셨다. 주변의 많은 집들이 그러했고, 처음에 멋모르고 나섰다가 집을 못 찾아 헤맸던 골목길은 두세 사람이 서면 꽉 찰듯 좁았다.
겨울방학 때는 며칠씩 삼촌집에서 먹고자며 일을 돕곤 했다. 그러던 어느 늦은 저녁, 답답해서 바람이라도 쏘이려고 집밖으로 나가 골목을 어슬렁대고 있는데 가녀린 목소리가 나를 불러세웠다.
"학생~ 안 바쁘면 나 좀 도와줄래?"
돌아보니, 다방에서 일하는 레지언니가 어딘가로 커피 심부름을 가는지 보온병과 컵을 싼 보자기를 들고는 나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무슨 일인데요?"
"내가 저기로 커피심부름을 가는데, 골목도 어둡고, 거기가 공사현장 근처라 혹시 안 좋은 일 생길까봐... 요즘 무서운 일들 많잖아. 학생이 같이 가주면 좋겠는데."
다방종업원이 커피배달 갔다가 사라져서 얼마 뒤 변사체로 발견된 사건이 세상을 시끄럽게 하던 때였다.
마침 별달리 할 일도 없고, 보디가드 노릇에 흥미도 생겨서 그러마고 썩 동행에 나섰다. 배달시킨 곳에 들어갔다가 일정시간 지나도 안 나오면 경찰에 신고 좀 해달라는 이야길 듣고는 밖에서 조마조마해하며 한참을 기다렸다.
그 밤의 골목은 왜 그리 어둡고, 언니가 들어간 건물의 외등은 왜 그리 침침한 백열등 불빛이었는지...
다행히 별탈없이 무사히 돌아온 언니와 집근처 골목까지 가면서 이런저런 얘기들을 꽤 나누었는데 다 잊고 또렷이 기억에 남는 건 하나.
"학생은 나중에 커서 이런 거 하지 마~"
아마도 공부 열심히 해서 번듯한 일 하라는 이야기도 덧붙인 거 같은데, 뭐 그건 늘상 듣는 말이니까 그렇다 치고이 말이 내 기억에 강하게 각인된 이유는 그 말을 듣던 순간 내게 든 생각이
'언니도 참 나를 뭘로 보고~ 내가 이런 몰골로 무슨 레지를 하겠어요?' 였기 때문이다.
선머슴처럼 짧은 커트에 태권도장이나 합기도장을 기웃대며 열심히 수련할 생각을 하는 나에게 다방레지라니! ㅋㅋ 너무 안 어울렸다.
그리고 그 다음에 든 생각은
'아, 나도 여자는 여자구나~ 이런 말을 듣고!'
하면서 문득 나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마지막에 가서야 언니의 애잔한 삶이 느껴졌다.
참 이 어이없는 생각의 순서라니~
해남 오일장 너머 좁고 긴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언니와 나란히 걸으며 나눈 이야기가 새삼 떠오른 것은 중학교를 마치고 고등학교 가기 전 1년간 쉬면서 광주의 한 목욕탕에서 캐셔일을 보다 겪었던 한 페친의 추억담을 읽고나서였다.
어린 나이에 참 힘드셨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분의 이야기나, 내가 만난 다방 언니의 이야기나
80년대 남도 한 자락에서 살던 고단하고 애달픈 여인들의 이야기인데, 나의 추억은 왜 갑자기 희극이 되어버리는 것인지... 음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