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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그미 Aug 02. 2021

거북이와 함께 근심을 잊는 풍경

거창 수승대

주말에 내린 비로 기승을 부리던 더위가 한풀 꺾이니 문득 작년 가을(2021.10.17)에 찾았던 거창 수승대가 떠오른다. 계곡에 흐르는 물이 좋고, 기암괴석이 아름다워 여름에 찾으면 더 좋겠다 싶었던 곳이다.

거북바위 암구대

거창군청 홈피를 찾아보니 역시나 야외수영장이 마련되어 있어 여름 성수기엔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었다. 여름에는 물썰매, 겨울에는 눈썰매장을 개장하고 있다. SBS 드라마 '그 겨울, 바람이 분다' 촬영지로도 잘 알려진 수승대는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황산리 황산마을 앞 구연동에 있는 명승지 제53호이다.

거창군청 홈피 야외수영장 사진

어느 고장에나 고달픈 일상을 잠시 잊고 하늘을 바라볼 수 있는 숨구멍 같은 쉼터 하나쯤은 있게 마련인데 거창사람들에게는 수승대가 그러한 곳이라고 한다. 여기 사람들은 함양의 화림동, 용추계곡의 심진동, 거창의 원학동 계곡을 무주 구천동에 버금가는 것으로 친다. 영남 제일의 동천(洞天: 산천으로 둘러싸인 경치 좋은 곳)으로 손꼽혀온 이른바 안의삼동(安義三洞)이다.

그 가운데 맑은 물이 있고 조촐한 정자와 누대, 듬직한 바위가 있어 이들이 어우러지며 그려내는 풍광이 자못 아름다운 경승지가 수승대이다. 품 너른 덕유산이 이룬 맑고 아름다운 골짜기 아래 위천(渭川)이 남실남실 흘러내리는 원학계곡 한 구비에 수승대가 자리잡고 있다. 널따란 화강암 암반으로, 깊은 계곡과 숲이 어우러져 탁월한 자연경관을 이룬다.

삼국시대에는 신라와 백제의 국경지대였고 조선 때는 안의현에 속해 있다가 일제 때 행정구역 개편으로 거창군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른다.

수승대는 삼국시대 때 백제와 신라가 대립할 무렵 백제에서 신라로 가는 사신을 전별하던 곳으로 처음에는 돌아오지 못할 것을 근심하였다 해서 근심 수(愁), 보낼 송(送)자를 써서 수송대(愁送臺)라 하였다. 한편 수송대는 속세의 근심 걱정을 잊을 만큼 승경이 빼어난 곳이란 뜻으로 불교의 이름에 비유되기도 한다.

그 후 조선 중종 때 요수 신권(樂水 愼權)이 은거하면서 구연서당(龜淵書堂)을 이곳에 건립하고 제자들을 양성하였고 대의 모양이 거북과 같다하여 암구대(岩龜臺)라 하고 경내를 구연동(龜淵洞)이라 하였다.

지금의 이름은 1543년에 퇴계 이황(退溪 李滉)이 안의현 삼동을 유람차 왔다가 마리면 영승리에 머물던 중 그 내력을 듣고 급한 정무로 환정하면서 이곳에 오지는 못하고 이름이 아름답지 못하다며 음이 같은 수승대(搜勝臺)라 고칠 것을 권하는 사율시(四律詩)를 보내니 요수 신권이 암구대의 면에다 '수승대'를 새기면서 비롯되었다.

수승대의 상징인 거북바위는 바위가 계곡 중간에 떠있는 모습이 거북처럼 보인다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세월의 아픔을 견뎌낸 소나무들이 바위 곳곳에 자라고 있어, 마치 평지같은 인상을 준다. 또한 바위둘레에는 이황이 수승대라 이름지을 것을 권한 4율시를 비롯, 옛풍류가들의 시들로 가득차있다. 처음에 보고선 누가 저렇게 바위에다 잔뜩 글자를 새겨놨나 하고 놀랐다.

경내에는 구연서원(龜淵書院) 사우(祠宇) 내삼문(內三門) 관수루(觀水樓) 전사청(典祠廳) 요수정(樂水亭) 함양제(涵養齊) 정려(旌閭) 산고수장비(山高水長碑)와 유적비(遺蹟碑) 암구대(岩龜臺) 등이 있는데 이는 유림과 거창 신씨 요수종중에서 공동 관리하고 있으며, 솔숲과 물, 바위가 어울려 경치가 빼어나고 또한 자고암과 주변에는 고란초를 비롯한 희귀식물들이 자생하고 있다.


참 사연이 있는 기념비가 요수정 뒤에 있으니 그것도 눈여겨보시길~


[문화재를 지킨 요수기념비]란 표지판과 기념비가 보인다. 2012년 9월 17일 초강력 태풍 “산바" 가 200년생 소나무를 뿌리채 뽑아 요수정을 덮쳤으나 요수의 제자와 후손들이 선생을 기리며 세운 기념비가 소나무를 받쳐 요수정의 피해를 막았다고 한다. 이는 요수의 제자와 후손들의 정성이 재앙을 예방한 걸로 회자된다.

* 수승대 이용안내 아래에 '답사여행의 길잡이' 중에서 모셔온 글을 올리니 수승대에 얽힌 자세한 이야기가 궁금하신 분은 끝까지 내려가 보셔요. 긴 글이라~ ^^

* 이용안내

입장료 무료/ 연중무휴 / 주차시설 약 700여대 주차 가능

야외수영장은 야영장 주변에 위치하고 있으며, 여름성수기엔 수영장으로 겨울철에는 간이스케이트장으로 운영되고있다.

※ 여름성수기 이용객 안전관리를 위해 18시까지로 이용시간을 제한하며, 반려동물은 출입할 수 없다.

썰매장(눈썰매/물썰매)

Check In : 오전 10:00시Check Out : 오후 5:00시오전반( 10:00~13:00), 오후반(14:00~17:00) 구분 운영

13:00~14:00 시설물 정비 및 중식시간 (*이용객 감안 신축운영)

[숙박시설]

오토캠핑장 15동 : 체크인 14:00 이후 / 체크아웃 13:00까지 (익일)

카라반캠핑장 : 체크인 14:00 이후 / 체크아웃 13;00까지 (익일)

야영장 데크 84동 : 체크인 14:00 이후 / 체크아웃 13;00까지 (익일)

※ 인터넷 사전예약 하지 않으면 데크 시설 이용 불가

[문화유산여행길]

1코스 : 수승대-정온선생종택-모리재-강선대-농산리고인돌-만월당-갈계숲-행기숲-농산리석조여래입상-용암정-수승대 (14km, 4:30)

2코스 : 수승대-정온선생종택-농산리석조여래입상-강선대-농산리고인돌-만월당-갈계숲-행기숲-용암정-수승대 (9.9km, 2:40)

& 수승대에 얽힌 이야기들 &

햇빛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달빛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고 한다. 그 역사와 신화가 세월에 닳고 여러 입에 씻기면 사화(史話)로 바뀌고 전설로 굳어지는 것이니 수승대에는 전설처럼, 사화처럼 옛이야기가 주절주절 매달려 있다.

거창지방이 백제의 땅이었을 무렵, 나라가 자꾸 기울던 백제와는 반대로 날로 세력이 강성해져가는 신라로 백제의 사신이 자주 오갔다. 강약이 부동인지라 신라로 간 백제의 사신은 온갖 수모를 겪는 일은 예사요, 아예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때문에 백제에서는 신라로 가는 사신을 위해 위로의 잔치를 베풀고 근심으로 떠나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잔치를 베풀던 곳이 이곳, 근심[愁]으로 사신을 떠나보냈다[送] 하여 여기를 ‘수송대’(愁送臺)라 불렀다 한다.

어느 만큼 사실에 바탕을 둔 얘기인지는 알 길이 없다. 아마도 아름다운 경치를 즐기며 ‘근심을 떨쳐버린다’는 뜻이 ‘수송대’라는 이름에 담긴 본디의 뜻이었을 것이다. 그 속내에 백제의 옛땅에서 대대로 살아온 민중들이 안타깝고 한스러운 백제의 역사를 슬며시 얹어 입에서 입으로 전했던 것이 아닐까 모르겠다. 아무튼 그렇게 불리던 이름이 지금처럼 바뀐 것은 조선시대다.

거창 신씨 집안은 이 고장에서 널리 알려진 가문이다. 그들이 자랑스러워하는 조상 가운데 한 사람으로 신권(愼權, 1501~1573)이 있다. 자(字)는 언중(彦仲), 요수(樂水)가 그의 호(號)이다. 일찍이 벼슬길을 포기한 그는 이곳에 은거하면서 자연을 가꾸어 심성을 닦고 학문에 힘썼다. 거북을 닮은 냇가의 바위를 ‘암구대’(岩龜臺)라 이름짓고 그 위에 단(壇)을 쌓아 나무를 심었으며, 아래로는 흐르는 물을 막아 보(洑)를 만들어 ‘구연’(龜淵)이라 불렀다. 중종 35년(1540)부터는 정사(精舍)를 짓고 제자를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정사의 이름 또한 ‘구연재’(龜淵齋)라 했으며, 아예 동네 이름조차 ‘구연동’(龜淵洞)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이태 뒤에는 냇물 건너편 언덕에 아담한 정자를 꾸미고 자신의 호를 따서 ‘요수정’(樂水亭)이라 편액을 걸었다.

이렇게 자연에 묻혀 자신만의 세계에 침잠하던 그에게 반가운 소식이 닿았다. 십 리 아래 영송마을(지금의 마리면 영승마을)로부터 이튿날 거유(巨儒) 이황이 예방하겠다는 전갈이었다. 안의삼동을 유람차 왔던 퇴계가 마침 처가가 있는 영송마을에 머물고 있었던 것이다. 아직 골짜기의 잔설이 희끗희끗 남아 있는 1543년 이른 봄날, 정갈히 치운 요수정에 조촐한 주안상을 마련하고 마냥 기다리던 요수를 찾은 것은 그러나 퇴계가 아니라 그가 보낸 시 한 통이었다. 급한 왕명으로 서둘러 발길을 돌리게 되었다는 양해의 말과 함께. 신권은 이 시에 화답시를 보냈다. 이렇게 두 사람이 주고받은 시로 말미암아 그때부터 이곳을 ‘수승대’라 부르게 되었다.

이렇게 새 이름을 얻은 암구대, 곧 거북바위에는 두 사람의 뒤를 이어 이곳을 찾았던 선비들이 읊조린 시문이나 이름 남기기 좋아하는 이들이 새긴 성명 석 자가 빈틈없이 가득하다.

거북바위에는 짤막한 전설도 얽혀 있다. 장마가 심했던 어느 해, 불어난 물을 따라 윗마을 북상의 거북이 떠내려왔다. 이곳을 지키던 거북이 그냥 둘 리 없어 싸움이 붙었는데, 여기 살던 거북이 이겼음은 물론이다. 그때의 거북이 죽어 바위로 변했으니 거북바위가 바로 그것이라 한다. 옛날 이곳을 범한 거북을 물리쳤듯 바위가 된 거북은 오늘도 이곳을 지키는 지킴이 구실에 어김이 없다는 얘기다.

시내 건너 바위 언덕에 선 정자가 요수정이다. 요수 선생이 처음 세웠던 정자는 임진왜란 때 불타버렸고, 1805년에 다시 만든 것이 지금의 정자다. 정자의 볼품이야 대단할 게 없지만 옛 주인의 마음이 담긴 주련(柱聯)은 가볍게 음미함직하다.

요수 선생이 죽은 뒤 그가 제자들을 가르치던 재실은 서원이 되었다. 구연서원(龜淵書院)이다. 그 문루(門樓)인 관수루(觀水樓)가 볼 만하다. 앞면 3칸 옆면 2칸의 이층 누각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왼편으로 덩그렇게 놓인 크고 펑퍼짐한 바위를 적절히 이용하면서 천연스러움을 한껏 살렸다. 덤벙주초 위에 놓인 누하주(樓下柱)는 굽으면 굽은 대로 그저 껍질만 대충 벗긴 나무들을 그대로 썼다. 특히 안쪽 것들이 그렇다. 그리 크지 않은 집인데도 네 귀퉁이마다 추녀를 받치는 활주(活柱)를 세웠다. 왼편의 둘은 바위 위에 맞춤한 구멍을 뚫어 짧은 돌기둥을 박은 뒤 그 위에 올렸고, 다른 둘은 외벌대 기단 위에 길숨한 돌기둥을 마련한 다음 나머지를 나무로 이었다. 조금 되바라진 느낌이 있긴 하나 좌우로 뻗쳐올라간 처마선이 시원스럽고, 무엇보다 듬직한 바위와 어우러진 모습이 천연덕스럽다.

관수루를 찾을 때 반드시 생각해볼 인물이 있다. 공재 윤두서(恭齋 尹斗緖, 1668~1715)와 함께 우리 회화사의 가장 빛나는 한 시기의 실마리를 풀어간 문인화가 관아재 조영석(觀我齋 趙榮祏, 1686~1761)이다. 광해군과 세조, 그리고 숙종의 어진(御眞)을 새로 그릴 때 영조 임금이 그의 그림 솜씨를 높이 사 그때마다 그림 그리기를 명했으나 하찮은 기예로써 임금을 섬기는 것은 사대부가 할 일이 아니라며 끝내 붓 잡기를 거부했다는 유명한 일화를 남긴 바로 그 사람이다. 관수루는 조영석이 안음(현재 함양군 안의)현감으로 있던 1740년에 지은 누각이다. 그때 그는 고을의 수령으로서 누각의 이름을 ‘관수루’라 명명함과 동시에 「관수루기」를 지어 일의 내력을 밝혔다. 관수루 다락에 오르면 지금도 그의 글과 시를 볼 수 있다.

* 원문 : 답사여행의 길잡이 13 - 덕유산 가야산 편

https://m.terms.naver.com/entry.naver?docId=2056566&cid=42840&categoryId=42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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