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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그미 Aug 20. 2021

망가져도 괜찮아

'나의 아저씨' 두 번째 이야기

사람은 평생 내가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보일지를 의식하며 살아간다.

그러지않고 사는 이를 괴짜, 돌아이로 부르기도 한다.

남들 눈에 괜찮아보이려고 애쓰며

망가지지 않은 채 살고자 하는데

이게 뜻대로 안될 때가 있다.

나이들수록 더욱.

그렇게 망가짐을 염려하는 사람들에게

여기 "망가져도 괜찮아~"라고 말해주는 이가 있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 6회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영화배우 최유라.

동훈의 삼형제 가운데 막내인 기훈이 동네 아는 형에게서 인수한 건물청소일을 하다가 매번 계단에 술 먹고 토사물을 뱉어놓는 몰상식 인간을 잡고 보니, 과거에 자신이 만든 영화에 출연했다가 동반으로 망한 배우 유라였다.

유라는 그 뒤 기훈을 찾아 형제청소방 사무실은 물론 단골동네술집인 '정희네'까지 찾아다니곤 한다. 아주 싱글벙글 웃으며.

한때 술에 쩔어살던 그녀가 이젠 술을 잘 마시지 않는다고 하니 정희가 왜 술을 마시지 않는지 묻는다.

"이제 술을 안 마셔도 기분이 좋아요~"

하며 씽긋 웃는 유라.

"기훈이가 망해서?"

"모르겠어요. 그냥 기분이 좋아요."

"이해해~ 나도 어떤 놈 하나 있거든. 완전 쫄딱 망해서 내 앞에 나타나 엉엉 울었으면 하는 인간.

병이라도 걸려라 확!"

이렇게 정희하고도 마음이 통한 유라가 기훈과 동네형들이 모인 술자리에서 말한 대사가 내 머리를 때렸다.(이 부분은 7회에 나옴)

유라에게 동네 형이 묻는다.

"우리 기훈이 어디가 좋아요?"

"전 망가진 게 좋아요. 사랑해요"

다들 '뭔 개소리여?' 하며 떨떠름해하고 있자 기훈이 열불내며 따발총을 날린다.

은행부행장에, 자동차연구소 소장에, 제약회사 이사에, 천재라 불려지던 영화감독... 한때 잘 나갔던 남자들이 지금은 모텔에 물수건을 배달하거나, 미꾸라지를 수입하거나, 백수이거나, 빌딩청소를 한다. 어찌 보면 다 망가진 인생들이 모여앉은 술자리에서 뭐가 좋다고 웃냐고.

"너보다 못한 인간들 보고, 아~ 난 저 사람들보다는 낫지~ 하고 있는 거 아니냐"

고 기훈이 힐난하자 이에 대한 유라의 항변이다.

"인간은요,

평생을 망가질까 봐 두려워하면서 살아요.

전 그랬던 거 같아요.

처음엔 감독님이 망해서 정말 좋았는데,

망한 감독님이 아무렇지 않아 보여서

더 좋았어요.

망해도 괜찮은 거구나,

아무 것도 아니었구나,

망가져도 행복할 수 있구나,

안심이 됐어요.

이 동네도 망가진 거 같고,

사람들도 다 망가진 거 같은데,

전혀 불행해 보이지가 않아요, 절대로.

그래서 좋아요, 날 안심시켜줘서."

이 말을 듣는 순간 뾰족하게 날이 섰던 분위기는 사라지고, 스스로 망한 인생이라 부끄럽다 여겼던 중년의 아저씨들이 위로를 받는다.

망가져도 괜찮다는 말에 왠지 안심이 된다. 그들에게 유라가 천사로 보이는 이유다.

직장에 충성하며 앞만 보고 열심히 달려왔던 이들이, 직장에서 떠밀려 사회에 다시 첫발을 내딛는 순간 그들은 인생의 초보자들이 된다. 그러나 거기서 체념하지 않고, 과거의 영화만 떠올리며 술로 인생을 낭비하지 않고, 새로운 삶에 적응하며 열심히 사는 한 그들 모두는 나름대로 잘 살고 있는 것이다.

내게 주어진 삶을 바지런히 살고 있다면

미꾸라지를 팔든, 물수건을 배달하든, 청소일을 하든 겉으로 보이는 게 뭐 대수인가?

힘든 하루를 친구들과 만나 술 한 잔에 털어버리고 왁자하게 웃으며 내일을 살 힘을 얻을 수 있다면,

그렇게 인생을 즐길 수 있다면 좀 망가져도 괜찮다.

망가졌다고 두문불출 스스로가 만든 감옥에 갇혀 자신을 더욱 망가트리는 게 아니라, 망가진 모습도 나의 모습으로 인정하고 불끈 일어서는 것이다. 그리고 "그게 뭐 어때서? 다시 살면 되지~!" 하고 토닥토닥해줄 수 있는 사람들이 곁에 있다면 불행하지 않다. 그들이 유라눈에 행복해 보이는 것은 이때문이다.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하는 말처럼 그들에게 돈은 없어도

돈으로 살 수 없는 진정한 친구가 있는 것이다.

망가져도 괜찮아~

사람이 살다보면 그럴 수 있지.

넌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거야.

이렇게 말해줄 사람이 단 하나라도 있다면,

그리고 그 사람이 당신이라면

당신의 이번 생은 결코 망한 게 아니다.

* '가오'는 일본어로 원래는 얼굴, 체면, 표면 등의 뜻이지만 우리나라에선 멋, 허세, 센척 등의 의미로 쓰이고 있다. 이보다는 '뽐내다'가 더 적절한 표현이라고 한다.

* 드라마 대사와 리뷰 일부를  DalDal님 포스팅에서 참고했습니다.

https://m.blog.naver.com/gang_zui/221327797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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