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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그미 Aug 30. 2021

예산의 대표한옥이 어디게요?

추사고택


예산 추사고택은 약 10여년 전 대전역사박물관에서 주관한 역사기행으로 처음 찾았던 곳이다. 박학다식하신 문화해설사님의 자세한 설명을 들으며 돌아보았던 추사고택이 참 좋아서 그 뒤로 어머님과 아이들을 동반해 함께 와서 또 둘러보고, 남편과는 오다가다 자주 들르며 담뿍 애정이 깃든 곳이다.

이 일대는 김정희가 나고 자란 고택과 그가 묻힌 무덤, 증조부 김한신의 묘와 증조모 화순옹주의 열녀문인 홍문, 김정희가 청나라에서 가져온 백송, 그가 수도하던 화암사 등의 유적이 있어 그의 자취와 숨결을 느낄 수 있다.

코로나 터지고는 한동안 못 가보다,

2021년 5월 1일 한 2년만에 가보았더니, 추사고택은 그대로인데 주변에 새로운 것들이 많이 조성되어 있었다. 위치는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추사고택로 261이며, 1976년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43호로 지정됐다.

조선후기 서예가이자 금석학자인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6년)가 태어나고 자란 추사고택은 증조부인 김한신이 영조의 부마(사위)가 되면서 하사받은 집이라고 한다. 이 집을 지을 때 서울에서 경공장이 내려오고, 비용은 충청도 53개 고을에서 한 칸씩을 부조하여 53칸짜리 저택을 지었다고 하니, 영조가 딸인 화순옹주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 수 있다.

김한신이 영조의 사위가 되었을 때 서울과 예산에 각각 저택을 하사받았는데, 서울의 필성위궁은 김정희가 관직 활동을 할 때 주로 지냈던 곳이고, 예산은 조상의 터전이 있는 곳이라 김정희는 성묘와 독서를 위해 자주 왕래하며 이곳에 머물렀다고 한다.

추사 김정희는 이 집에서 정조 10년 6월 3일 아버지 김노경과 어머니 기계 유씨(棋溪 兪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추사는 어머니 뱃속에서 스물넉 달 만에야 나왔다는데, 추사가 날 때 집 뒤뜰의 우물이 갑자기 말라 버리고 뒷산인 팔봉산의 풀과 나무들이 모두 시들었다가 그가 태어나자마자 우물도 다시 차 오르고 나무와 풀들도 생기를 되찾았다는 이야기가 '완당김공소전'에 나온다. 추사의 위대성을 기리기 위해 꾸며진 내용이 아닐까 싶은데, 그 전설같은 이야기가 담긴 우물이 고택 왼쪽 문밖에 있다.

 

추사고택은 대단한 건립기와 역사에 비해 그닥 화려한 편은 아니다. 추사의 직계손이 끊어져 다른 사람에게 넘어갔던 사이에 헐렸고, 다른 곳들도 변형이 꽤 심하게 되었다. 고택은 안채와 사랑채, 대문채(문간채), 추사의 영정을 모셔놓은 영당으로 구성돼 있다. 본래 곳간채가 더 있었다고 한다. 대문채와 영당은 1976년에 집을 복원할 때에 다시 세운 것이라 고졸한 맛은 좀 없다. 기둥마다 붙인 주련도 원래 있었던 것이 아니라 보수하면서 추사의 글씨들을 붙여 놓은 것이다.

대문채를 들어서면 사랑채가 오른쪽에 비껴 있고 그 너머로 안채가 있다. 건물 전체가 서에서 동으로 길게 배치되어 있는데, 안채와 대청이 동향하고 사랑채와 안채의 각 방이 남향하여 배치되어 있다. 사랑채는 ㄱ자형으로 남향하였는데, 안채와 분리되어 있다.

사랑채는 남향집으로 온돌방이 남쪽에 한 칸, 동쪽에 두 칸 있으며, 나머지는 대청과 마루로 되어 있다. 대청 쪽으로 난 문은 모두 들어열개 문으로서 위로 활짝 열 수 있어 개방적이다. 손님을 접대하고 문학적인 유희를 즐기는 곳인 사랑채의 특성이 잘 살아 있는 구조이다. 고택에 있던 김정희의 장서는 수만 권이었다고 하는데. 1910년 무렵 화재로 불타버렸다니 너무도 안타깝다.

사랑채 앞에 추사가 직접 제작한 네모난 돌기둥이 있다. 추사의 아들이 추사체로 ‘石年’(석년)이라고 글씨를 새겨 세운 빗돌인데 그림자 길이로 시간을 알아볼 수 있도록 한 해시계라고 한다. 이 독특한 해시계가 추사고택의 첫 번째 포인트이다.

두 번째 포인트는 사랑채와 대문채 사이 담장 옆에 있는 오래된 매화나무이다. 햇빛 좋은 날, 마당에 드리워진 나무 그림자가 고색창연하고 푸르게 익어가는 매실의 향이 은은히 퍼지는 공간이 참 매력적이다. 초봄 꽃 필 때 오면 더욱 장관일 텐데 그 시기를 꼭 놓친다.

안채는 입 구(口)자 모양으로 6칸 대청에 안방, 건넌방, 부엌, 광 등을 갖추고 있다. 6칸 대청은 흔치 않은 규모의 마루이다. 대청 대들보에는 김정희가 쓴 것으로 보이는 글씨가 붙어 있다. 여성들의 생활공간인 안채는 밖에서 바로 들여다보이지 않는 구조로 되어 있다. 특이한 것은 안채 내의 부엌은 난방용으로만 쓰이고 요리를 위한 부엌은 따로 두었다는 점이다. 이는 황실 주택 구조로서, 황실 사람인 화순옹주가 살았던 곳이기 때문이다.


안채 뒤 후원으로 이어지는 돌계단을 따라 추사영실(秋史影室)로 올라가는 길이 세 번째 포인트이다. 추사영실은 고택에서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한 건물로 김정희가 세상을 떠난 뒤 아들 김상무가 세운 영당이다. 영당 안에는 추사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추사영실’이라 쓴 현판 글씨는 추사의 지기인 이재 권돈인이 쓴 것이라고 한다. 김정희의 평생의 벗 권돈인은 영당 세우는 일을 돕고 추사체로 현판을 직접 썼다. 또한 김정희의 제자였던 이한철에게 대례복을 입은 김정희의 초상을 그리게 했다. 권돈인은 이 초상화에 창문을 쓰고, 김정희를 추모하는 여덟 수의 시를 지어 김상무에게 주었다. 현재 초상화의 원본은 국립중앙박물관에, 현판의 원본은 간송미술관에 있다. 도난사고가 자주 일어나니 소중히 보관할 곳에 옮긴 듯한데 원래 있던 자리엔 가짜만 있다는 현실이 서글프다.


추사영실에서 왼쪽으로 내려오는 길에 오래된 배롱나무가 있고, 그 아래 붉디 붉은 작약꽃이 한창 피었다 진 흔적이 보인다. 역사기행으로 처음 추사고택을 찾았던 때엔 작약꽃이 참 예쁘게 피어있어 눈호강을 했는데, 이번엔 작약은 지고 있으나 금낭화, 영산홍이 반겨주었다.

내려와서 안채를 한 번 더 둘러보고 서쪽으로 난 문으로 나가면 우물이 보인다. 추사가 태어날 무렵 말랐다가 다시 솟아났다는 우물이다. 이 우물은 1976년 추사고택 정화사업 전에 추사고택에 거주하던 현 씨 집안이 생활에 편리하도록 일제강점기 무렵에 파놓은 우물을 새롭게 정비한 것이라고 한다.

이 우물을 지나 100m쯤 서쪽으로 난 길을 따라가면 추사의 무덤이 보인다. 고택 주차장에서 바라보자면 왼쪽에 뚝 떨어진 자리에 있다.

봉분도 나지막하고 석물 치장도 화려하지 않아 흔히 고택만 둘러보고 묘는 지나치기 쉬운데, 추사기념관 가는 길에 있으니 꼭 들러보시길. 묘 앞에 가지를 드리운 반송의 운치가 그윽해서 그것만으로도 한참을 머물게 되는 곳이다.


추사기념관은  2008년 12월 5일 개관한 지하 1층, 지상 2층 철근콘크리트 건물로 지하 1층은 수장고, 지상 1층은 상설 전시장과 다목적 영상실 및 체험실과 기념품 판매장이 있고, 2층은 기획 전시실과 사무실, 도서실로 구성되어 있다. 추사기념관에는 46점의 유물과 작품이 전시, 소장되어 있는데 국보 180호인 '세한도'도 진품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있고, 여기엔 모사품이 있어 아쉬웠다.

추사 무덤과 고택 사이 뒷산에 최근 새롭게 공원이 조성되어서 들어가보니 추사고택 산림욕장으로 연결된 공원이었다. 우리가 찾았던 5월 1일엔 초록 잔디에 진분홍 철쭉꽃들이 어우러지고, 중간중간 멋드러진 자태를 뽐내는 소나무들이 눈길을 끌었다. 산책로를 따라 여전히 피어있는 수선화향을 맡으며 어슬렁어슬렁 걷다보니, 산 위로 이어진 길까지 쭉 따라 가게 되었는데 그 위에서 추사고택을 내려다보는 풍경도 좋거니와 추사의 생애를 간단히 정리한 표지판들을 보면서 찬찬히 추사의 삶을 돌아볼 수 있다. 무엇보다 여기까지 올라오는 관람객들이 거의 없다보니, 산책로 내내 우리 부부만 걷게 되서 마스크를 벗고 전나무와 소나무의 피톤치드를 실컷 들이마실 수 있었던 것도 참 좋았다.

이 공원 산책로를 다 내려가면 끝에 백송공원과 화순옹주 홍문 및 묘소가 있는데 이에 대해선 다음 편에 자세히 설명하기로 한다.

추사고택 앞 주차장 너머에는 추사체험관이 새로 생겼는데 이 곳에서 각종 체험을 할 수 있다. 추사체 써보기, 세한도 그리기, 난초 그리기, 그림접기, 탁본뜨기, 나비부채 꾸미기, 원형부채 꾸미기, 소원지 작성하기 등으로 소원지 작성하기를 제외하고 유료(1,000원 -2,000원)로 운영된다고 한다. 꽤 많이 준비되어 있음에도 코로나로 인해 체험행사가 원활하게 진행되는 것 같지는 않아보였다. 향기로운 수수꽃다리만이 오월의 태양 아래 보랏빛으로 환히 빛나고 있었다. 아이들과 함께 체험을 하시고자 하면 미리 전화해서 확인하시고 가시길~

* 추사고택 안내소 : 041) 339-8242


* 추사 김정희가 누구예요?

추사 김정희는 글과 그림, 글씨가 독창적이며 이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학자이며 예술가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기억력이 뛰어나고 일찍 글을 깨우치며 천재성을 보였다고 한다.

24세인 순조 9년 청나라에 사신으로 떠나는 아버지 김노경을 따라간 김정희는 청나라 제일의 학자 옴방향, 환원을 만나 재능을 인정받고 이후 일생 교유하였다. 또한 청나라에서 유행하던 고증학에 관심을 가졌다. 귀국한 후에는 '사실을 밝혀서 진리를 추구한다'는 실사구시의 정신에 입각하여 학문을 완성해 나갔다.

김정희는 제자가 많아 "추사의 문하에는 3천의 선비가 있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는데, 그들 중에 19세기 후반 개화 사상가로 이름을 남긴 아들이 많다. 55세 때인 헌종 6년에 당쟁에 휘말려 제주도에 약 9년간 유배되었는데, 이 시기에 추사체라는 독창적인 글씨체를 이루었다. 그의 글씨는 인기가 높아 청나라와 일본에서도 찾는 사람들이 많았다. 특히 현종은 김정희의 글씨를 사랑하여 유배 중에도 글씨를 요구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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