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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그미 Oct 01. 2021

영화를 보고 책을 펼치다

자산어보

영화 '자산어보'를 보고서야

10여년 전에 사두고도 펴보지 않았던

책 [자산어보]를 펼쳐서 읽기 시작했다.


이 영화 한 편으로

정약전의 존재를 알게 된 이가,

[자산어보]를 읽게 된 이가 얼마나 많을까?

그리고 민초 중의 하나였던 섬소년 창대를 알게 된 이들도.

(이 글은 영화 줄거리도 나오니 이 점 참고하시길)


자산어보에 총 아홉 번 등장한다는

흑산도의 소년어부 창대.

정약전이 창대를 흑산도에서 처음 만났을 때 창대의 나이는 십대 중후반이었다고 한다. 영화 '자산어보'는 책의 서문에 등장한 창대에 관한 몇 줄 글에서 영감을 얻은 이준익 감독이 정약전이 남긴 책 [자산어보]에 상상력을 가미해 만든 영화이다.


"섬 안에 장덕순(張德順, 일명 창대 昌大)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두문사객(杜門謝客:두문불출하고 손님을 거절)하고 고서를 탐독하나 집안이 가난하여 서적이 많지 않은 탓으로 식견이 넓지 못하였다. 그러나 성품이 차분하고 정밀하여 초목과 조어(鳥魚)를 이목에 접하는 대로 모두 세찰(細察)하고 침사(沈思)하여 그 성리(性理)를 터득하고 있었으므로 그의 말은 믿을 만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드디어 그를 맞아들여 연구하고 서차(序次)를 강구하여 책을 완성하였는데, 이름지어 『자산어보』라고 하였다."(자산어보 서문 중에서)


자산어보는 1814년(순조 14)에 정약전이 귀양가 있던 흑산도 연해의 수족(水族)을 저술한 어보로 조선의 대표적인 어류도감이며 3권 1책이다.(오늘날로 따지면 3부로 나뉘어진 한 권 짜리 책이란 뜻) 제1권 인류(鱗類), 제2권 무인류(無鱗類) 및 개류(介類), 제3권 잡류(雜類)로 구성되어 있다.


현재 원본은 남아있지 않고 필사본만 전하고 있다. 강진에서 유배가 풀린 아우 정약용이 죽은 형의 유배지였던 우이도로 찾아갔을 때(흑산도에 있다가 우이도로 옮김), 자산어보는 한 장 한 장씩 뜯겨서 어느 집 벽지로 쓰이고 있었다고 한다. 정약용은 천신만고끝에 형의 유고를 겨우 수습해서 가져와 강진 출신의 제자 이청에게 필사를 시켰다고 한다. 이청은 필사를 하면서 [본초강목]과 같은 중국의 문헌을 참고해 각 항목 아래 방대한 주를 달았다. [자산어보]에서 '청안'이라는 말 뒤에 따라오는 인용들이 그것이다. 이 필사본이 여러 필사본을 낳으면서 지금까지 전해진 것이다.

자산어보

책명을 '흑산어보'가 아니라 ‘자산어보’라고 명명한 것은 정약전이 자서의 서두에서 말하기를, ‘자(玆)’는 흑이라는 뜻도 지니고 있으므로 자산은 곧 흑산과 같은 말이나, 흑산이라는 이름은 음침하고 어두워 두려운 데다가 가족에게 편지를 보낼 때마다 흑산 대신에 자산이라고 일컬었기 때문에 자산이라는 말을 제명에 사용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영화에서는 창대가 흑산이란 이름이 불길하다 하여 자산이란 이름을 쓰자고 했다 함. 선생이 어둠에 갇혀 못 돌아갈까 두렵다면서)


영화 '자산어보'에 등장하는 창대의 개인사는 감독의 상상력이 많이 가미된 듯하다. 책에는 창대에 대해선 물고기 지식을 많이 아는 어부 정도로만 묘사되었고, 개인사는 전혀 안 나왔는데 영화에서는 나주의 거상 양반이 아버지고 어머니는 흑산도에 살던 상민 청상과부였는데 어쩌다 그 양반의 첩이 되었으며, 10년 전부터는 아버지란 사람이 통 오질 않아서 창대가 어부일을 하며 주경야독을 하면서 생계를 이어가는 모습으로 나온다.  


순조 1년, 신유박해로 흑산도로 유배된 ‘정약전’. 호기심 많은 '정약전'은 세상의 끝인 그 곳에서 물고기 지식에 빠삭한 창대를 보며 바다 생물에 관한 책을 쓰기로 한다. 약전이 평생 공부에 열심이었던 것은 학문을 통해 사람이 갈 길을 알고자 했던 것인데, 창대가 물고기에 대해 알아낸 것만큼도 알아내지 못했음을 한탄하며 애매하고 끝모를 사람 공부 대신 자명하고 명징한 사물공부에 눈을 돌리기로 한 것이다. 이에 바다를 훤히 알고 있는 어부 ‘창대’에게 도움을 구하지만 ‘창대’는 서학죄인을 도울 수 없다며 단칼에 거절한다.  대역죄인을 돕는 것은 불충이란 점을 내세웠지만, 유교의 성리학을 세상을 바로 세우는 학문으로 철석같이 믿고 있는 창대는 성리학에 반대하는 천주학을 받드는 서학쟁이에게 물들까봐 겁이 났던 것이다.


그러나 물고기에 대한 지식에 목이 말랐던 정약전이 창대가 어렵사리 구한 책으로 혼자 글 공부하느라 진도를 나가지 못한 채 제자리만 뱅뱅 도는 것을 보고는 “내가 아는 지식과 너의 물고기 지식을 바꾸자"고 제안한다. 서로의 지식을 거래하자는 말에 창대는 못 이기는 척 받아들이고, 둘은 티격태격하면서도 점차 서로의 스승이자 벗이 되어 간다.


창대의 학문은 나날이 깊어져 나중엔 정약전의 집(정확히는 가거댁의 집)에 복성재(흑산 사촌서당)를 마련해 스승을 도와 섬의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도 하게 된다. 종종 정약전을 찾아오는 정약용의 양반제자의 기를 꺾을 정도로 한시도 척척 지어낼 경지까지 이르자 그 소문이 나주까지 퍼지게 되고, 서출 아들을 외면했던 나주 양반 아버지가 창대를 찾아온다. 과거를 보라는 아버지의 명에 창대는 흔들리고, 창대가 출세하기 위해 공부에 매진했다고 생각한 정약전은 크게 실망한다. 창대 역시 임금도 필요없는 세상을 꿈꾸는 정약전과는 길이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 정약전의 곁을 떠나 양반 아버지가 이끄는 손을 잡고 뭍으로 나가 과거를 보게 된다.


하지만 소과를 한 번에 붙고 진사가 된 창대는 세상일을 배우게 한다며 아버지가 끈을 댄 목사 밑에서 있는 동안 자기잇속 늘리기에만 바쁜 관리들이 상민을 쥐어짜는 가렴주구 현실을 보고는 결국 "배운 대로 못 살 것이면, 생긴 대로 살아야지라."하고는 다시 흑산도로 돌아올 결심을 한다.


영화에서 인상적이었던 부분이 정약전이 죽음을 앞두고 성게에서 나온 새가 파랑새가 되어 날아가는 내용을 책에 쓰는 장면이다. 책 [자산어보]에 나온 '조개가 새가 되는 변신이야기'가 영화에도 그대로 그려진 부분이다. 창대의 말을 인용해 고슴도치처럼 생긴 밤송이조개(성게)의 입에서 나온 새가 파랑새가 되었다는 내용으로 신화적 상상력이 느껴힌다. 이는 어쩌면 고립된 섬 유배지에서의 고통을 책을 쓰면서 승화하고자 했던, 나아가 파랑새처럼 비상의 염원을 담고자 했던 정약전의 바람은 아니었을까.


창대가 흑산도 가는 길에 우이도에 계신 스승을 찾았을 때는 애타게 제자를 기다리던 정약전이 병이 들어서도 자산어보를 마무리하려고 밤낮으로 글을 쓰다 죽고난 뒤였다. 창대는 눈물을 흘리며 스승의 영전에 절을 하고, 흑산도로 가족과 함께 돌아가는 장면에서 영화는 끝이 난다.


계속 흑백으로만 보여지던 화면이 마지막에 창대 가족이 탄 배에서 바라본 흑산도가 서서히 천연색으로 바뀌는 걸 보며 그들의 삶에 이제 희망이 피어나고 있음을 암시하면서.

비록 스승과 제자의 마지막은 어긋났지만

흑산도의 품으로 돌아가는 창대 가족의 모습은 남들이 좋다고 하니 억지로 꿰맞춰 입고 있던 옷을 벗고, 즐겨 입던 옷으로 갈아입은 사람의 편안함이 엿보였다.

그리고 200여 년이 흐른 오늘날, 학문으로는 출세하지 못했던 창대의 이름은 책 [자산어보]에 남아 우리나라 해양생물사에 길이길이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영화에서 정약전은 "벗을 깊이 알면 내가 더 깊어진다"고 말한다. 창대와의 우정을 깊이 간직하고자 표현한 대사가 아닐까 한다. 두 사람의 우정은 이렇게 멋진 어류도감을 탄생시켜, 조선의 바다생물들과 어부들의 삶을 기록으로 남겨 오늘날까지 전해주고 있다.


그리고 역사책에나 보았을까, 책 이름만 겨우 알던 사람들이 이준익 감독의 영화를 보고 책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영화 '자산어보'가 책 [자산어보]를 되살린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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