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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그미 Oct 08. 2021

개천절에 찾은 초지진

강화도 한 바퀴 1

10월 3일 개천절에 강화도를 찾았다.

개천절에 특별한 의미를 두어서 여행 계획을 잡은 건 아니고, 남편이 오래전부터 강화도 가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던 차에 마침 개천절 연휴가 있어서 때는 이때다! 하구선 강화도 여행을 감행했다. 사흘 연휴를 선사해준 개천절에 감사하는 뜻에서 개천절의 의미도 되짚어 보았다.


개천절은 우리 민족 최초 국가인 고조선 건국을 기념하기 위해 제정된 국경일이다. 기원전 2333년 단군기원 원년 음력 10월 3일에 단군이 최초의 민족국가인 단군조선을 건국했음을 기리는 뜻으로 제정된 날이다.


개천절은 원래 음력 10월 3일이므로 대한민국 수립 후까지도 음력으로 지켜왔는데, 1949년에 문교부가 위촉한 ‘개천절 음·양력 환용심의회’의 심의 결과 음·양력 환산이 불가능하다는 이유와 ‘10월 3일’이라는 기록이 소중하다는 의견에 따라, 1949년부터 음력 10월 3일을 양력 10월 3일로 바꾸어 거행하게 되었다고 한다.


한편 개천절은 하늘이 열린(개천:開天) 날의 본래 뜻을 엄밀히 따질 때 단군조선의 건국일을 뜻한다기보다, 124년을 소급하여 천신인 환인의 뜻을 받아 환웅이 처음으로 하늘을 열고 태백산(백두산) 신단수 아래에 내려와 신시(神市)를 열어 홍익인간·이화세계의 대업을 시작한 날인 상원 갑자년(上元甲子年:  기원전 2457년) 음력 10월 3일을 뜻한다고 보는 것이 더욱 타당성이 있다고도 한다.


어쨌든 개천절은 민족국가의 건국을 경축하는 국가적 경축일인 동시에, 문화민족으로서의 새로운 탄생을 경축하며 하늘에 감사하는 우리 민족 고유의 전통 명절이고, 그래서 쉴 수 있어 단군님께 감사할 따름이다.


역사책에서 익히 본 고구려의 동맹, 부여의 영고, 예맥의 무천 등이 바로 먼 옛날부터 행해온 제천행사 즉 개천절 행사였다. 마니산의 참성단, 구월산의 삼성사, 평양의 숭령전 등에서도 각각  제천행사가 행해졌는데, 강화도는 바로 마니산 참성단이 있는 곳이다.

마침 개천절에 강화도를 갔으니 마니산 참성단을 찾았으면 참 좋았겠으나, 이번에 찾은 강화도에선 마니산을 가지 않았다. 비록 20여 년 전이긴 하지만 마니산은 오래전에 다녀왔으니, 이번엔 강화도 해변을 쭉 따라 돌면서 항쟁의 역사가 어린 22개의 돈대와  2개의 진과 1개의 보를 찾아볼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강화도에는 32개의 돈대가 있지만 나머지 10개는 군사경계지역 너머의 해안가에 있어서 철조망으로 둘러싸여 있어 가볼 수가 없다. 지도상에 표시되지 않은 경우가 많은데, 강화나들길 지도에는 32개 돈대가 모두 표시되어 있다)

총 25개 목적지 가운데 이번 강화도 여행에서는 15개의 돈대와 2개의 진과 1개의 보를 직접 둘러보았다. 돈대 두 곳은 지도상 지점까지 갔으나 열심히 찾아 헤매었어도 결국 못 찾았고, 4개의 돈대는 표지판이 안 보여서 지나치거나 너무 어두워져서 가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러니까 이번에 총 18곳을 둘러본 셈이다. 그 가운데 오늘은 강화도에서 제일 처음 들어간 초지진을 소개하려 한다.


차로 강화도에 들어가는 방법은 두 가지인데, 초지대교나 강화대교를 건너는 것이다. 우리는 초지대교를 건너서 갔는데, 다리 이름이 바로 초지진에서 비롯되었다. 초지대교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초지리와 김포시 대곶면 약암리를 잇는 다리로, 길이 720m에 왕복 4차선 도로이며, 1996년 인천광역시에서 착공하여 2001년 8월 완공한 다리이다. 그니까 1990년대에 내가 건넜던 다리는 강화대교이고, 초지대교는 이번에 처음 건넌 것이다. 

개천절 새벽 6시 반에 그믐달 보며 집에서 출발해 아침 9시 무렵 초지대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교통정체가 시작되고 있었다. 강화도에 들어가려는 차들이 일요일 이른 시각에 그토록 많을 줄 몰랐다. 휴일에 강화도를 찾으실 분들은 이 점 참고하시길!

초지대교를 건너 우회전해서 100여 m 정도만 가면 초지진이 바로 나온다.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초지리 624(해안동로 58)에 위치한 초지진은 사적 제225호로 입구에는 커다란 소나무 두 그루가 내방객을 반긴다. 두 소나무는 모두 두 수령 400년의 보호수로 서쪽의 소나무 줄기 중간 위쯤에는 포탄을 맞은 자국이 남아있다. 포탄을 맞고도 살아남아 초지진을 지키는 소나무의 늠름한 자태가 1870년대 당시 미군과 일본군의 침략을 받아 처참히 무너지고도 다시 일으켜 세워 오늘날의 한국을 만들어낸 힘이 서린 것 같아 오래오래 눈길이 머문다.

초지진 소개책자에 나온 포탄 맞은 흔적

초지진은 해상으로부터 침입하는 적을 막기 위하여 조선 효종 7년(1656)에 구축한 요새이다. 안산의 초지량에 수군의 만호영이 있었던 것 에서 처음 비롯되었는데 1666년에 초지량영을 이곳으로 옮긴 뒤 '진'으로 승격되었다.


진에는 배 3척을 비롯하여 첨사 이하의 군관 11명, 사병 98명, 돈군 18명 등이 배속되고, 초지돈•장자평돈• 섬암돈의 세군데 돈대를 거느리고 있었으며, 병인·신미양요, 운요호 사건 등 근대까지 줄기차게 싸운 격전지이다. 1871년 4월 23일 미국 로저스가 지휘하는 아세아 함대가 1,230명의 병력으로 침공하여 450명의 육전대(陸戰隊)가 초지진에 상륙전을 감행하였다. 초지진 수비대가 이들을 맞아 싸웠으나 화력의 열세로 패배, 결국 미군에 점령당했다. 이때 진내에 있던 군기고·화약고·진사 등 군사 시설물은 미군에 의해 모조리 파괴되었다. 포대에 남아 있던 40여 문의 대포 역시 그들에 의해 파괴되거나 강화해협으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그 뒤 1875년 8월 21일, 운요호가 강화도 동남방인 난지도 부근에 정박하고, 단정(短艇)을 내려 담수(淡水)를 찾는다는 구실로 초지진 포대에 접근하여 왔다. 이에 초지진 수비군이 일본 함정을 향해 포격을 개시하자, 운요호는 110㎜와 40㎜ 함포로 포격을 해 초지진 포대는 일시에 파괴되고 말았다. 이때 초지진에는 사정거리 700m의 2인치 정도의 대완구만 있었다.


그 뒤 초지진은 폐쇄되어, 시설은 모두 허물어지고 돈대의 터와 성의 기초만 남아 있었다. 그러다가 1973년 초지진의 초지돈만 복원되었는데, 높이가 4m 정도이고 장축이 100여 m 되는 타원형으로 이 돈에는 3개소의 포좌와 총좌 100여 개가 있다. 민족시련의 역사적 현장이었던 이곳은 호국정신의 교육장이 되도록 성곽을 보수하고 조선군이 사용하던 대포가 포각(砲閣) 안에 전시되어 있다.


지금도 성벽과 돈 옆의 소나무에는 전투 때 포탄에 맞은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어, 당시 미국 및 일본 제국주의 침략자들과 맞서 격렬하게 싸웠던 전투상을 그대로 전해 주고 있다. 소나무의 포탄 흔적은 보았지만 성채의 포탄 흔적은 미처 발견하지 못했는데, 남편이 다행히 찍어둔 사진이 있었다. (더 자세히 찍힌 사진을 찾다 보니 '이야기가 있는 역사문화연구소장' 김희태 님의 사진이 있어서 모셔왔다.

by 남편
by 김희태

초지진에 들어가려면 원래 어른 700원, 어린이 청소년 군인은 500원의 입장료를 내야 하는데, 2021년 7월 1일부터 전적지 무료화 운영 실시로 입장료 내지 않고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모르고 왔는데, 기분 좋은 무료 소식에 우리 부부는 싱글벙글~ 관람시간은 오전 9시~오후 8시까지(연중무휴)니 개방시간만 유념하시면 되겠다.


은행나무와 국화꽃이 쭉 늘어선 입구를 지나 초지진의 돈대에 들어가서 항쟁의 역사가 서린 성곽과 대포가 전시된 포각을 둘러보았다. 그닥 넓지 않아서 한눈에 다 들어올 정도로 아담한 규모이다. 기억이 확실하진 않지만 20여 년 전인 1990년대 중반쯤 강화도에 1박 2일 모꼬지를 왔을 때, 마니산 전등사 들러서 이곳 초지진 대포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던 것 같다. 그땐 참 넓어 보였는데, 이제 다시 와서 보니 상당히 작은 곳이었네. 이 작은 곳에서 그토록 처절하게 싸우다 완패를 당했다니 심히 안타까웠는데, 포각안에 전시된 대포 (大砲)의 설명을 보니, 조선 후기 우리 군의 무기가 이렇게나 형편이 없었으니 당연한 결과였음을 알 수 있었다.

구경 : 100m/m  길이 : 215cm

중량 : 1,800kg

포구에서 화약과 포탄을 장전한 다음 뒤쪽 구멍에 점화하여 사격하는 포구장전식화포(砲口裝塡式火砲)로 사정거리는 700m이며 조선 영조 때부터 주조하여 사용하였다. 화약의 폭발하는 힘으로 포탄은 날아가나 포탄 자체는 폭발하지 않아 위력은 약하였다고 한다.


신미양요는 1871년 6월 10일 미군이 인천 강화도 초지진을 공격하며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었는데,

미군은 이날 2시간여 동안 함포 사격을 하고 초지진에 전투 없이 무혈입성했다. 사실 초지진에 조선군 방어는 없었다. 조선군이 초지진을 비워두고, 광성보에 진을 치고 결전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다음의 덕진진 이야기까지 하고 나서 이어가도록 하겠다)


그러나 1875년(고종 12) 운요호 사건 때에는 상륙을 시도하는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곳이 바로 초지진이다. 운요호 사건을 계기로 1876년(고종 13)에 조일 수호조규(강화도조약)가 체결되었으며, 이후 우리나라는 주권 상실의 시련을 겪게 되었음을 생각할 때 초지진은 우리 조상들이 일본의 강압에 맞서 최초로 치열하게 싸웠던 역사적 의미가 담긴 곳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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