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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그미 Oct 04. 2021

장학금 주는 서원

장성 필암서원

부모님이 계시는 고향, 해남 가는 길에 꼭 들러서 가는 곳이 장성이다. 호남고속도로 장성 나들목을 나와서 그곳부터 국도를 타고 해남까지 가기 때문이다. 작년부터는 입암 나들목이나 백양사 나들목으로 나와 장성호와 임권택문학관이 있는 공원을 한 바퀴 둘러보고 가는 게 새로운 루틴이 되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해남까지 가장 빠른 길이기도 하고, 고속도로 통행료도 아끼고, 그 풍경이 그 풍경인 밋밋한 고속도로 풍경에 비해 다양한 풍경을 감상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거기에 더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필암서원까지 둘러보게 되었다.

그리 높지 않은 산이 뒤를 감싼 가운데 평지에 자리잡은 필암서원은 호남에서 유일하게 문묘에 배향된 우리나라 18선정(先正) 가운데 한 분인 문정공 하서 김인후(文正公 河西 金麟厚) 선생을 주벽(主壁)으로 모시고, 제자 양자징 선생을 종향한 호남의 대표적인 서원이다. 고종때 서원 철폐령에서도 전라도에서 훼철되지 않은 3곳(필암서원, 무성서원, 광주 포충사)중 한 곳으로 1975년 4월 23일 국가 사적 제242호로 지정되었으며, 2019년 7월 10일 필암서원을 포함한 9개 “한국의 서원"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9개 서원 가운데 유일하게 장학금을 주는 서원이기도 하다.


추석이 지난 9월 마지막 주 일요일에 서원의 중요행사가 있어서 우리가 찾은 9월 25일에는 필암서원의 첫 관문인 확연루 앞에는 청사초롱이 걸려있었다.


하서 김인후(1510~1560)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1540년 문과에 합격하고 1543년 홍문관 박사 겸 세자시강원 설서를 역임하여 당시 세자였던 인종을 가르쳤다. 1545년(인종1) 인종이 즉위 8개월만에 사망하고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고향인 장성에 돌아와 성리학 연구와 후학 양성에 정진하였다.


김인후가 죽은 후 30년이 지난 선조 23년(1590), 호남의 유림들이 그의 도학을 기리기 위해 그가 살고 공부하며 제자를 가르쳤던 장성읍 기산리에 사우(祠宇)를 짓고 그의 위패를 모셨다. 이것이 1597년 정유재란 때 소실되자 인조 2년(1624)에 김인후 선생이 태어난 황룡면 증산동에 다시 사우를 지었다. 현종 3년(1662)에는 유생들의 요청에 따라 ‘필암’이라는 액호를 하사받고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당시 서원의 입지 조건이 수해를 입을 우려가 있었으므로 현종 13년(1672)에 다시 지금의 위치인 전남 장성군 황룡면 필암리 378, 379로 옮겨 지었다.

장성읍내에서 사온 음식으로 서원 앞에 마련된 정자인 삼연정에서 점심을 먹으며 필암서원 주변을 감상했다. 삼연정 앞에는 '부용지'라는 연못이 마련되어 있지만 물이 말라있어 아쉬웠다. 논산 명재고택의 입구에서 우릴 맞이하던 너른 연못만큼은 아니어도, 병산서원의 광영지처럼 작은 연못이 물까지 말라있으니 옥의 티랄까.

보통 서원에 마련된 연못은 "천원지방" 형태로 조성된다. '천원지방'은 우리나라 전통 연못의 조성 원리로 조상들의 우주관을 상징적으로 표현하였다. 땅을 의미하는 네모진 연못 가운데 하늘을 상징하는 둥근섬을 두는 형식이다. 삼연정 앞의 연못도 그 방식을 충실히 따랐으나 물이 말라 있어 의미가 퇴색된 느낌이었다.


서원 입구에 선 홍살문과 200년 수령의 은행나무는 이곳이 신성한 공간임을 알리는 역할을 하는데, 홍살문 옆에는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타고있던 말에서 내려 걷게 한 하마석이 남아있다.

서원의 출입구 역할을 하는 확연루는 정면 3칸 측면 3칸에 팔작지붕을 얹은 2층 문루 건물이다. 누마루의 난간 받침은 위쪽이 살짝 뒤집힌 연잎 모양으로 조촐하게 멋을 냈다고 하는데 올라가볼 수 없어 자세히 보지는 못했다. 널문을 닫아 놓으면 안팎이 차단되지만 열어제치면 그대로 시원스레 안팎이 연결되는 구조이다. 정면의 확연루 현판 글씨는 우암 송시열이 쓴 것이라고 한다.

확연루와 마당을 지나면 곧바로 청절당이 나온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강당 건물이다. 가운데 3칸은 대청마루인데 들어 여는 문이 달려 있고, 양옆 한 칸씩은 온돌방으로 되어 있다. 이곳은 원생들이 모여 학문을 토론하던 곳으로, 선비들의 모임과 제사 때에는 유림들의 회의장소로 사용되었다. 서원 안에서 가장 규모가 크며, 진원현(珍原縣)의 객사 건물이었던 것을 1672년에 옮겨왔다고 한다.

숙종 때 나서 영조 때 죽은 학자 윤봉구가 쓴 필암서원이라는 현판이 앞쪽에 걸려 있으며, 마루 위에는 선조 때부터 현종 때까지 살았던 동춘당 송준길이 쓴 청절당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송시열과 송준길은 대전을 대표하는 유림이자 은진 송씨 집안의 형제지간인데 확연루 현판은 송시열이, 청절당 편액은 송준길이 썼다니 필암서원과의 인연이 깊었나 보다.


청절당을 지나 더 들어서면 정면에 사당인 우동사로 향하는 내삼문이 있고 오른쪽과 왼쪽에 각각 재실이 있다. 오른쪽에 있는 것이 동재로 진덕재이고, 왼쪽에 있는 것이 서재로 숭의재라 하는데, 원생 가운데 선배들이 동재에, 후배 되는 사람들이 서재에 기거했다고 한다. 재실의 현판 글씨도 동춘당 송준길이 썼다. 서재는 지금 보수중이라서 안을 들여다볼 수 없었다.

전체적으로 보아 필암서원은 여느 서원과 마찬가지로 교육 공간이 앞에, 제향 공간이 뒤에 놓이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를 보인다. 하지만 필암서원과 청절당의 편액이 확연루를 바라보는 남쪽에 있지 않고 북쪽을 향하고 있는 점과, 원생들이 기거하는 재실이 청절당 안마당에 자리한 모습이 다른 서원과 달라 궁금증을 자아냈는데 친절하신 문화해설사 선생님 덕분에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재실은 서원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의 기숙사로 강당과 더불어 서원 교육 기능의 핵심을 이룬다. 보통은 재실이 먼저 있고 더 들어가서 강당이 있는데, 이곳 필암서원은 재실이 강당 안쪽에 배치되어 있다. 이는 필암서원이 자리한 곳이 평지다보니, 보통 서원건물 배치도에서 가장 높은 위쪽에 모시는 사당도 다른 건물과 같은 평지에 자리하게 됐다. 그래서 이념적으로나마 사당이 위치한 자리를 높이기 위해, 청절당과 재실이 사당을 우러러 보는 느낌이 들도록 현판의 위치도 재실의 위치도 다른 곳과 다르게 배치한 것이다.


숭의재 옆으로는 인조가 하사한 묵죽판각(墨竹板刻)이 소장되어 있는 자그마한 경장각이 있다. 현판 글씨는 정조가 손수 썼다고 알려져 있다. 임금이 쓴 글씨는 존엄하고 신성하게 여겼기 때문에 현판을 얇은 망사천으로 가린 점이 특이하다. 경장각 안의 묵죽판각은 복사본이고, 진품은 광주국립박물관에 있다고 한다.

가장 안쪽에 자리잡은 우동사는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단층 맞배지붕 집으로 정면인 북쪽 벽에는 김인후의 위패를 모시고 동쪽 벽에는 양자징의 위패를 모셨다. 1년에 두 번, 중춘(음력 2월)과 중추(음력 8월)의 중정일(中丁日)에 유림과 지방 기관장들이 참석한 가운데 제사를 지낸다.


우동사의 서쪽담 밖에는 제사 지낼 때 쓸 제기와 재물을 보관하는 전사청이 있고, 동쪽담 밖에는 『하서집』의 목판이 소장된 장판각과 서원에서 일하는 노비 가운데 최고책임자가 생활했던 한장사가 있다. 장판각은 정면3칸 측면 1칸의 건물로 도유형문화재 제215호인 하서선생 문집목판 650매와 도유형문화재 제216호인 초서천자문, 해자무이구곡, 백련초해, 유묵, 묵죽도판등 목판 56판이 보관되어 있다.

우동사 앞에는 계생비 겸 묘정비가 있다. 계생비는 필암서원에서 제사를 지낼 때 제물로 사용할 가축을 매어 놓는 비석이며, 제관들은 매어 놓은 가축을 검사한 후 제물로 사용할지 여부를 결정하였다. 비석 앞면에는 “필암서원계생비" 라 새겨져 있는데 송일중 선생이 썼다.

묘정비는 서원의 건립 취지와 연혁, 서원에 모셔진 인물에 대하여 기록하는 비석이며, 서원비(書院碑)라고도 불린다. 비석 뒷면 묘정비문은 송병선 선생이 글을 짓고, 윤용구 선생이 글씨를 썼다.

서원 입구의 확연루 서쪽 담 너머에도 작은 마당 둘레로 고직사와 창고 건물 등이 들어서 있다. 고직사는 서원을 관리하는 사람이 지내는 곳이다. 한때는 이곳에서 김인후의 후손이 살기도 했으나, 10년 전쯤 광주로 나가서 사신다고 한다. 내가 간 날 마침 그곳에 사시던 할머니께서 손자를 대동하고 서원나들이에 나오셔서, 예전 사시던 이야기를 어깨너머로 얼핏 들을 수 있었다.

우동사 옆의 장서각에 보관하던 인종이 하사한 묵죽(먹으로 그린 대나무)과 『하서집』 등 1,300여 권의 책, 보물 제587호로 지정된 필암서원 소속의 노비를 기록한 『노비보』(奴婢譜) 등 69점의 문서 등은 필암서원의 서쪽 아래 마련된 유물전시관으로 옮겨졌다.

필암서원 유물전시관에는 (재)양영재단과 하서 학술재단에서 기증한 유물 29종 3,798 점 중에서 붓, 상아홀, 벼루, 책장, 압판, 책판, 현판 등의 유물과 노비보, 초서천자문. 백련초해, 집강안, 봉심록 등 하서선생과 필암서원에 대한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이 문서들은 서원의 내력과 지방교육제도 및 당시의 사회경제사를 연구하는 데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전시실의 전시물도 풍부하고, 자료정리도 잘 되어있고, 서원을 보는 것만으로는 얻지 못할 깊이있는 정보들을 문화해설사의 친절한 설명과 함께 얻을 수 있으니 유물전시관 관람도 꼭 하시길 추천한다. 관람료가 있긴 하지만 소액이고, 이렇게 낸 입장료가 장학금으로 쓰인다고 생각하니 필암서원의 장학사업에 일조를 한 것 같아 뿌듯한 기분도 느낄 수 있다.

유물전시관을 나와 삼연정 앞으로 해서 주차장에 다다르니, 주차장 입구에도 필암서원을 알리는 큰 기념석이 서있고, 그 아래 설명판있었다. 아까는 이걸 왜 못 봤지? 눈에 들보가 씌었나~ 장성을 매번 지나치면서도 다니는 길목에 있던 필암서원을 그냥 지나쳤던 것처럼 관심이 없으면 보여도 보이지 않고, 있어도 모른 채 지나친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을 새삼 느끼며 필암서원을 떠나왔다.


황룡강에 코스모스와 천일홍, 노란코스모스가 활짝 펴 색색으로 물결치는 가운데 유난히 파란 하늘에 하얀 구름이 빛나는  푸르른 가을날이었다.


* 필암서원 주변에는 '옐로우 장성'이 노랑을 주조로 꾸민 아름다운 황룡강생태공원, 편백나무 치유의

숲으로 유명한 축령산, 방장산자연휴양림, 홍길동테마파크, 장성호관광지와 문화예술공원, 임권택 시네마테크 등이 있으니 함께 둘러보시기 좋다.


삼연정
경장각
유물전시관
인조와 김인후
황룡강생태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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