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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그미 Oct 09. 2021

호국돈대길 따라 덕진진으로

강화도 한 바퀴 2

강화도 곳곳을 다닐 때마다 눈에 띄는 길쭉한 직방체의 표지판이 있으니 '강화나들길' 표시다.

강화나들길의 유래는 1906년 화남 고재형 선생이 강화도의 유구한 역사와 수려한 자연을 노래하며 걸었던 길을 살려낸 것에서 시작되었다. 2009년 3월 처음 4개 코스를 열었고, 그 후 하나 둘 새로운 길이 이어져 지금은 20개 코스, 310.5km에 달한다.(강화 본섬 13개 코스 14개 구간 226.4km / 석모도 2개 코스 26km / 교동도 2개 코스 33.2km / 주문도 11.3km / 볼음도 13.6km으로 구성)


강화나들길은 고인돌 탐방길, 머르메 가는길, 고려왕릉 가는 길, 다을새길, 낙조 보러 가는 길, 철새 보러 가는 길, 서해 황금들녘길, 강화도령 첫사랑 길 등 주제에 따라 20코스로 나눠져 있으며, 코스가 순서대로 쭉 연결된 게 아니라 뚝뚝 떨어져 있기도 해서 원하는 대로 길을 선택해 즐기면 된다.

초지진에서 시작해 오늘 소개할 덕진진을 지나 광성보-오두돈대-화도돈대-용당돈대-용진진(좌강돈대)-갑곶돈대까지 이르는 제 2코스는 호국돈대길이다. 총 거리 17km, 소요시간 5시간 50분으로 완주도장 받는 곳은 초지진(길상면 해안동로 58)과 갑곶돈대(강화읍 갑곳리 1006)이다.


호국돈대길은 강화나들길 제 2코스의 출발을 갑곶돈대로 도착지를 초지진으로 해서 조성이 되었지만 거꾸로 가도 상관없지 않을까 싶다. 버스를 타고 강화버스터미널에 내려서부터 1코스인 심도역사문화길이 시작되어 갑곶돈대에서 끝나고, 2코스가 강화대교 바로 아래 갑곶돈대에서 시작된다. 버스가 아니라 자차로 강화대교 통해서 강화도에 입성한 분들은 아마도 갑곶돈대부터 시작할 것이고, 우리처럼 초지대교를 통해 강화도에 들어간 사람은 초지진에서부터 시작하면 된다.

강화나들길은 강화의 역사와 문화의 면면을 둘러볼 수 있는 길이라 충분한 시간이 있다면 천천히 걸으며  한반도의 오래된 역사부터 근현대사를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에겐 하루, 그나마도 오전 9시 반부터 오후 일몰 때까지 최대 9시간밖에 없어서 호국돈대길을 천천히 걸어서 둘러보진 못했다.


호국돈대길의 여행 포인트는 외국과의 충돌에 대비하기 위해 만든 돈대와 조선말 병인양요, 신미양요를 겪으며 다져진 민족의 자긍심과 국난극복의 의지가 서린 강화도의 전적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강화도를 대표하는 함민복시인의 감성글판이 곳곳에 세워져있어 포토존으로 인기가 높다고 한다. 우리는 차로 움직여 다음 목적지로 가다보니 내가 좋아하는 함민복 시인의 감성글판을 놓친 게 아쉬웠는데 사진정리하다보니 얼결에 하나 정도는 건진 것 같다.^^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에 위치한 사적 제226호 덕진진은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강화해협을 지키던 외성의 요충지이며 강화도 제 1의 포대이다. 병자호란 뒤 강화도를 보호하기 위한 방법으로 내성·외성·돈대 ·진보 등의 12진보를 만들었는데 그 중의 하나라고 한다. 현재 문루인 공조루와 남장포대, 덕진돈대, 덕진진 경고비가 남아있다. 포대(적의 대포 공격으로부터 무기를 보호하고 아군의 대포 공격을 편리하도록 만든 시설)와 돈대(경사면을 절토하거나 성토하여 얻어진 계단 모양의 평탄지를 옹벽으로 받친 방위 시설)는 숙종 때인 1679년에 설치한 것이다.


현종 7년(1666) 국방력 강화를 위해 해군주둔지 수영(水營 : 조선 시대에 수군절도사가 있던 군영)에 속해 있던 덕진진을 덕포로 옮겼으며, 숙종 5년(1679)에 용두돈대와 덕진돈대를 거느리고 덕진포대와 남장포대를 관할함으로써 강화해협에서 가장 강력한 포대로 알려져 있었고, 강화 12진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곳을 지키고 있었다.


덕진진은 19세기 후반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등 외세에 맞서 싸운 장소이기도 하다.1866년 병인양요 때는 양헌수가 이끄는 군대가 덕진진을 거쳐 정족산성으로 들어가 프랑스 군대를 격파하였으며, 1871년 신미양요 때는 이틀간의 치열한 포격전 끝에 미국함대를 격퇴시켰으나, 초지진에 상륙한 미국 해병대에 의하여 점령을 당한 슬픈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때 덕진진은 파괴되어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만 남아 있다가, 1977년 돈대와 성곽을 보수하고 덕진진의 성문인 공조루를 복원했다.


매표소와 안내소를 지나면 왼쪽으로 복원된 공조루가 보인다. 공조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문루로 '끌어다닐 공 밀물 조'를 써서 밀물을 끌어당긴다, 즉 조수를 제어하는 나루터가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덕진진'이라는 이름에 나루 진津이 들어간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강화도에 이런 나루터가 6~7개까지 있었다고 한다. 배 댈 곳으로 나루터가 있었으나 점진적으로 이루어진 간척으로 인해 지금은 사라지고 말았다.


공조루를 지나면 야트막한 언덕이 나오는데, 이 언덕 위에 서면 공조루 뒤로 펼쳐진 들판에서 노랗게 익어가는 들판과 바다가 동시에 보인다. 예전에는 저 들판에 배가 드나들던 나루터가 있었을 텐데 간척으로 인해 땅이 됐고, 그곳에선 강화의 자랑인 '강화섬쌀'이 나오고 있다. 간척지쌀은 맛있기로 유명하다.

시선을 더 먼 곳에 두면 잔잔한 바다 건너로 김포땅이 보인다. 언덕 위엔 지금은 문을 열지 않고 있지만 커다란 느티나무 아래 운치 만점의 매점이 있고, 이곳을 지나 언덕을 내려가면 남장포대가 나온다.

이곳은 덕진진에 소속된 강화 8포대의 하나로 건립 당시에는 15문의 대포가 설치되어 있었으며, 적의 눈에 띄지 않도록 반달 모양의 요새로 축조하였다고 한다. 강화 해안의 진지 중에서 가장 막강한 화력을 자랑하는 곳으로, 고종 8년(1871) 신미양요가 일어났을 때 미국의 함대와 치열한 포격전이 벌어진 곳이 바로 여기다.


포대 뒤로 은행나무가 둘러선 연못이 있는데, 안쪽으로는 사유지라 들어가지 못하게 빗장을 채워둔 얕은 나무문이 보인다.

지뢰처럼 깔린 은행나무 열매를 사뿐히 즈려밟아서 똥냄새가 배지 않도록 조심조심 걸어 연못을 지나면 계단이 나오는데 50m쯤 되는 계단을 오르면 드디어 덕진돈대가 나온다.

이곳에 올라서야 드디어 시야가 뻥 뚫리는 기분이 든다. 남쪽으로 멀리 초지대교가 보이고, 초지진까지 쭉 이어진 강화갯벌이 한눈에 들어온다. 갯벌에는 많은 사람들이 낚싯대를 드리운 채 물고기를 기다리는 모습들이 보였다.

덕진돈대(德津墩臺)는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846에 위치하며 덕진진에 소속된 2개 돈대중 하나이다. 북쪽의 광성보와 남쪽의 초지진 중간에 위치하여 강화수로의 가장 중요한 요새이기도 하다. 신미양요 (1871) 당시 미국함대와 48시간 동안 치열한 포격전을 전개하였는데 이 때 파괴되었던 것을 1977년에 복원하였다. 성곽의 남은 부분과 새로 복원한 부분이 돌 색깔로 얼추 구분이 되는 듯했다.


돈대 안으로 들어가보니, 타원형의 초지진과 달리 이곳은 장방형이었다. 포대가 따로 있어서 돈대 안에는 따로 포가 설치되어 있지 않아, 성곽 위로 포문이 나있지도 않았다.

돈대의 남쪽 끝에서 아래로 조금만 내려가면 강화도 향토유적 제9호인 덕진진 경고비가 보인다. 고종 4년(1867) 흥성대원군의 명으로 강화 덕진첨사가 건립하였고, 규모는 높이 147㎝, 폭 54.5㎝, 두께 28㎝이다. 비에는 해문방수타국선신물과 海門防守他國船愼勿過라고 음각되어 있는데, 이는 '바다의 관문을 지키고 있으므로, 외국 선박은 통과할 수 없다'는 뜻으로 쇄국의 의지를 나타내고 있다. 경고비 우측에는 탄흔의 흔적이 남아있다.

배낭 메고 강화나들길을 걷던 한 부부가 인적 뜸한 이곳에서 잠시 쉬며 간식을 드시다가, 내가 경고비를 살피며 사진을 찍고 있으니 막걸리 한 잔 하고 가시라고 말을 건네셨다. 요즘에도 이런 인사를 주는 분이 계시는구나 싶어서 반가운 생각이 들었으나, 남편이 돈대 위에서 기다리고 있어 마음만 감사히 받고 돌아나왔다.


경고비는 흥선대원군이 조선 곳곳에 세웠던 척화비의 또다른 이름일 터인데, 외세를 무조건 배척하기보다 지혜롭게 받아들여서 잘 활용했다면 조선의 국운이 달라지진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했다. 준비도 안 된채 물밀듯 밀어닥치는 외세 앞에서 속절없이 쓰러져버린 조선 후기의 역사를 떠올릴 때면 두고두고 아쉬운 부분이다.


돌아볼 곳이 많으니 어서 다음 곳으로 가자는 남편의 재촉에 덕진돈대를 내려오며 생각에 잠겨 걷다가, 남장포대를 거쳐 공조루로 올라가는 길 가운데 왼쪽길로 가다보니 어디서 달콤한 냄새가 났다.


'킁킁~ 이거 내가 좋아하는 냄새인데?'

고개를 들고 둘러보니 역시나 등나무벤치 근처에 계수나무 한 그루가 서서 노랗게 물들고 있었다. 커다란 은행나무와 느티나무가 주류인 이곳에서 가녀린 체구로 외로이 그러나 꼿꼿이 서서 제 향기를 뿜어내는 계수나무를 보니 빙그레 웃음이 나왔다.

지독한 은행 구린내가 진동하는 길목에서 한줄기 달콤한 향기로 주위를 환기시켜준 계수나무를 보며, 밀려드는 외세에 끝까지 굴복하지 않고 조선을 지키려 했던 투지와 노력이 어쩌면 저런 계수나무 같은 것이 아닐까 싶었다.  

여러 가지 열세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를 지키기 위해 죽음을 마다하지 않았던 조상들의 흔적이 계수나무 향기로 남은 덕진진을 떠나 가장 치열한 신미양요의 격전지 광성보로 향했다.


* 강화나들길 홈페이지 www.nadeulgil.org

덕진진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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