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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그미 Oct 15. 2021

신미양요 최대 격전지 광성보

강화도 한 바퀴 3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1회에서 조선군이 목숨을 걸고 방어했지만 처참히 무너져버리고 미군이 승리의 징표로 조선군에게 빼앗은 수자기 아래 기념촬영을 하며 환하게 웃는 모습이 나오는 곳이 바로 강화도 광성보 안의 손돌목돈대이다. 미군의 전쟁사에 ‘48시간 전쟁’으로 기록되어 있는 신미양요의 가장 격렬한 전장이 광성보였다.

일명 수자기로 불리는 어재연 장군기는 1871년 신미양요 때 강화도를 수비하던 조선군 지휘관이었던 어재연 장군이 사용한 군기이다

1866년 8월 발생했던 제너럴셔먼호 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미국 해병대가 1871년 4월 23일 전함 5척을 이끌고 와 무역 통상을 요구하며 조선을 침범한 사건이 신미양요이다. 이 때, 어재연 장군은 600여 명의 조선 병사들을 거느리고 1,230여 명의 신무기로 무장한 미국 해군에 맞서 사투를 벌였으나, 무기의 열세로 인해 어재연 장군을 비롯한 430여 명이 전사하고 20여 명이 포로로 잡히고 말았다.


강화도 불은면 해안동로 446번길에 위치한 광성보(廣城堡)는 사적 제227호로 강화도 요새지의 총사령부였다. 보(堡)는 일정한 규모를 가진 부대의 단위, 지휘소, 병사의 주둔지, 창고 등을 포함하는 곳이다.


광성보는 병자호란으로 강화도가 처참하게 함락된 후 체계적으로 방어하기 위하여 광해군 때 보수하고 효종 9년(1658년)에 강화해협 주위에 축조된 12개의 진과 보 중의 하나로 화도돈대, 오두돈대, 광성돈대를 관할하는 해안경비부대 주둔지였다. 영조 21년 성을 개축하면서 성문을 건립했는데 이를 안해루(安海樓)라고 불렀다.

'바다를 살피다'는 뜻의 안해루는 이곳에 예전에 나루터가 있었음을 의미하는데, 안해루 앞의 강화해협은 마포와 개성, 중국까지 직항할 수 있는 포구가 있어 한양을 지키는 중요한 군사요충지였다. 그런데 신미양요 때 성문의 누각과 성이 파괴되었던 것을 1976년에 새롭게 복원하면서 광성보 유적지 안에 어재연 장군을 기리는 전적비인 쌍충비와 순국용사를 기리는 신미순의총, 전적지를 수리한 내용을 기록한 비석 등을 함께 만들어 세웠다.


광성보는 안해루를 중심으로 왼쪽에는 광성돈대, 오른쪽으로는 손돌목돈대와 용두돈대가 있다. 돈대는 경사면을 절토하거나 성토하여 얻어진 계단 모양의 평탄지를 옹벽으로 받친 방위시설이다. 신미양요 당시 조선군은 전략상 초지진과 덕진진을 비워두고 광성보에 진을 치고 결전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초지진과 덕진진은 무혈입성했고, 광성보에서 치열한 전투가 있었던 것이다.  


광성돈대는 광성보에 소속된 3개 돈대중 하나로서 숙종 5년 (1679) 함경도•황해도 • 강원도의 승군 8,000명과

어영군 4,300명이 40일만에 완공하였다고 한다. 신미양요 때 파괴되었다가 1977년 포좌(砲座) 4개소와 포 3문을 복원 설치했다. 광성돈대 안에는 세 종류의 포가 전시되어 있다.

홍이포라고도 부르는 대포는 초지진과 덕진진에 설치된 것과 동일한 형태이다. 사정거리 700m로 포알은 화약의 폭발하는 힘으로 날아가지만 폭발하지 않아 위력은 약했다. 병자호란에도 사용하였다고 전한다.

소포는 포구에서 화약과 포탄을 장선한 다음 뒤쪽 구멍에 점화하여 사격하는 포구장전식화포로 사정거리는 300m이며 우리나라 재래식화포중 가장 발달된 형태를 갖추고 있다. 포알은 대포와 같지만, 대포는

조준이 안되나 소포는 조준이 된다는 점이 다르다.

가장 작은 것은 '불랑기'인데 프랑스군이 쓰던 것이라 하여 불랑기(佛狼機)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불랑기는 임진왜란을 계기로 널리 사용된 화승포로서 포1문에 다섯 개에서 아홉개의 자포(子砲)를 결합하여 연속 사격할 수 있는 발달된 화기라고 한다.

광성돈대를 한 바퀴 돈 뒤 나와서 안해루 남쪽으로 난 오르막길을 따라 걷게 되면 쌍충비각(雙忠碑閣), 신미순의총(辛未殉義塚), 손돌목돈대(孫乭項墩臺)를 거쳐 광성포대(廣城臺), 용두돈대(龍頭墩臺)를 만나게 된다

키큰 나무들이 열병식을 하듯 늘어선 이 길에선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 출입통제안내문에 따르면, 이 구간에 식재되어 있는 수목은 지형상 뿌리가 지면에 노출된 상태로 수년간 성장한 수목인데, 돌출된 뿌리에 복토시 성장의 장애 및 고사가 우려되어 부득이 원형대로 보존관리하고 있는 실정이므로 수목의 보존을 위하여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그러니 이 길을 걸을 땐 출입을 막기 위해 쳐둔 금줄 안으로 함부로 들어가지 않도록 주의하시길.


쌍충비는 신미양요 때 광성보 전투에서 순절한 어재연 장군 외 59명의 순절비이다. 쌍충비각 안에는 조선 후기의 무신 어재연(魚在淵)을 기리는 전적비가 있다. 1기는 광성파수순절비(廣城把守殉節碑)이고, 다른 1기는 어재연과 어재순 순절비인데 1873년에 건립했다. 고종 때부터 제사를 지내 왔으며, 1970년부터는 어재연의 후손들이 제사를 올려 충절의 유업을 추모하고 있다.

쌍충비각 맞은편 길 아래에는 광성보 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한 용사들의 무덤인 신미순의총(辛未殉義塚)이 자리하고 있다. 전사자들 중에서 어재연, 어재순 형제는 충북 음성군 대소면 성본리에 안장하고, 남은 군졸 51인은 신원을 알수 없어 7기의 분묘에 합장하여 이곳에 안장하였다. 비록 무기성능의 열세로 대패했지만 미군들과 끝까지 싸우며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던 조선군의 투지를 마음 깊이 느껴볼 수 있다.


밤송이가 떨어진 계단을 올라 다시 원래 길로 합류해서 20m쯤 가면 손돌목돈대로 오르는 길이 보인다. 손돌목돈대는 조선 숙종5년 (1679)에 축조된 돈대로 보급창고 역할을 했다. 원래 돈대 중앙에 3칸의 무기고가 있었고, 포좌 3개가 있었으며 돈대 넓이는 778m²에 성곽 길이가 108m이다. 신미양요 때 미국 해군과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졌던 현장이다.


광성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손돌목돈대에 오르면 신미양요 당시의 격전지를 한번에 내려다볼 수 있다. 새로 지어진 돈대에 전투의 흔적은 없지만, 저 아래  손돌바람과 손돌추위의 유래가 서린 손돌목을 보며 그날의 격전을 떠올려보게 된다. 그러다 문득 국민학생 시절 교과서에 나왔던 손돌목에 얽힌 이야기도 떠올랐다.

고려 때 뱃사공 손돌이 몽골군에 쫓겨 강화도로 피신하는 고려 왕을 모시게 되었다. 손돌은 바가지 하나를 물에 띄우고, 그 바가지를 따라갈 것을 간언하나, 자신을 함정에 빠뜨리는 것으로 오해한 왕에게 참수를 당한다.( 손돌이 아직 바람이 자지 않았으니 쉬었다 건너자고 하여 왕이 그를 모반자로 생각하여 처형을 하니 광풍이 불이 바다를 건널 수 없게 되었다고도 한다) 그러나 손돌이 죽고 나서야 손돌의 말이 맞다는 사실을 알게 된 왕이 크게 뉘우쳐 손돌의 혼을 위로하기 위해 손돌의 묘를 만들고 제사를 드렸다고 한다.(손돌의 묘는 김포쪽에 있다고 한다) 그때가 음력 10월 20일쯤이어서 이때 오는 추위를 죽은 손돌의 원혼이 바람과 추위를 몰고 온다고 하여, ‘손돌바람’과 ‘손돌추위’라고 하고, 이곳은 손돌이 억울하게 죽은 곳이라 손돌목이라 부르게 됐다. 손돌의 억울한 죽음에, 조선군의  안타까운 죽음을 함께 생각해보게 하는 곳이 손돌목돈대이다.


손돌목돈대를 내려오면 오른쪽으로 광성포대가 보인다.

광성포대는 조선후기 강화도 해안수비를 위해 설치된 방어시설 가운데 하나이다. 국방 강화책으로 숙종 1675-1725 강화도내에 내성, 외성, 12 진보, 54돈대 등을 축조하여 요새화를 이루었으나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거치면서 화력을 증가시키는 일이 시급한 과제로 등장함에 따라 고종 11년 1874 용진진, 광성진, 덕진진, 초지진에 포대를 설치하였다. 광성포대는 손돌목돈대 주변 3곳에 설치되었으며 각각 9좌, 4좌, 3 좌의 포좌를 갖추고 있었으며 이중 가장 규모가 큰 중앙포대는 길이 80m, 포좌의 크기 약 6m 정도로 추정된다. 1875년 운요호사건을 계기로 외세에 문호를 개항함에 따라 파괴되었던 것을 2004년 발굴조사를 실시 유적이 확인되어 복원정비를 하였다.

by 강화만사성

이곳을 지나 바다쪽으로 나아가는 길을 따라가면 드디어 용두돈대가 나온다. 용두돈대는 강화해협을 지키던 천연 요새로서 손돌목돈대에 속해 있는 외곽 초소겸 포대이다. 고종8년(1871) 포대가 설치되면서 정비된 곳으로 1977년 강화 전적지 정화보수사업을 하면서 용의 모양을 닮았다 해서 용두돈대라고 부르게 되었다. 병인, 신미양요 때 치열한 포격전이 벌어졌던 현장이며, 1977년 성벽을 복원하면서 강화 전적지 정화기념비를 세웠다.

강화바다와 가장 가까운 용두돈대에 들어서면 바로 아래 손돌목의 급물살이 보이고, 돈대 안에 마련된 대포와 돈대를 둘러싼 강화해협의 곳곳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 신미양요 당시엔 돈대가 아닌 외곽초소 겸 포대였지만 가장 미군과 가까이에서 접전을 벌였던 곳이 아닐까 싶었다. 손돌목돈대보다 뭔가 더 비장함이 느껴지는 곳이 용두돈대였다.


최후의 한명까지도 비겁하게 물러서지 않았던 광성보 전투는 외세의 침략에 대항하여 나라를 지키려했던 우리 민족의 호국 정신을 잘 보여주는 곳이다. 강화군에서는 광성보 전투에서 나라를 지키기 위해 장렬히 전사한 용기와 불굴의 정신을 기리는 광성제를 매년 음력 4월 24일 드리면서 신미양요의 서글픈 역사를 잊지 않고 있다고 한다.

 

어재연 장군과 600여 명의 조선군 병사들에게 짧은 묵념을 마치고 광성보를 나섰다. 다음은 줄줄이 이어진 오두돈대, 화도돈대, 용당돈대, 용진진의 좌강돈대이다.


광성보 입구 회전로타이에 세워진 어재연 장군 동상
안해루
광성돈대
쌍충비각
광성보 입구 어재연 장군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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