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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그미 Nov 02. 2021

이영애 데려다 왜 그랬어~

드라마 [사임당 빛의 일기]

춘천의 김유정역에 가면 지금은 다니지 않는 철로 옆으로 드라마 [사임당]의 포토갤러리가 마련되어 있다. 여기서 드라마를 찍었나 보다~ 생각만 하다가 주말 동안 아들 코로나접종 뒤 예후를 살피느라 집에 있으면서 심심함을 달래기 위해 넷플릭스를 뒤지다 보게 되었다.

2017년에 방영된 드라마 [사임당](원제 사임당 빛의 일기)는 배우 이영애가 결혼하고 육아에 전념하다 처음으로 복귀한 작품으로 뜨거운 관심을 모았다. 그러나 그 관심은 초반 몇 회를 지나면서 사그라들고 말았다. 기대에 못 미친 스토리 전개로 시청률이 곤두박질친 까닭이다.


여주 이영애, 남주 송승헌으로 둘 다 인기와 연기력에서 출중한 배우들을 데려다가 아주 흑역사를 썼구나 썼어~ 하는 생각이 드라마를 보는 내내 들었다.

조선시대 그림으로 미대 박사학위를 받은 서지윤이 새롭게 등장한 안견의 '금강산도'가 위작임을 밝히고, 사임당의 수필집인 '수진방 일기'와 진본 '금강산도'를 입수해 막강한 자본의 기업과 갤러리, 그들의 힘으로 총장까지 노리는 지도교수의 부정에 맞서는 현대의 이야기가 한 축이고, 다른 한 축이 조선시대 신사임당의 이야기다. 이영애는 현대의 서지윤과 조선의 신사임당을 1인 2역으로 소화해냈다.


조선 중종 때 강릉에서 천재화가 소녀로 이름을 떨치던 사임당이 안견의 '금강산도'를 보기 위해 헌원장을 월담했다가 만난 의성군과 연인으로까지 발전하면서 그들의 사랑이 아름답게 펼쳐지다가, 야심가 민치홍의 계략과 중종의 의심이 몰아온 파국, 의성군을 연모했지만 사임당에 밀린 걸 알고는 질투의 화신이 되어 사사건건 사임당의 앞길을 방해하는 휘음당의 암투가 고려지 경합과 어진화사로 중종의 어진을 그리는 큰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깔끔하게 16부작 정도로 했으면 궁금한 내용들을 속도감 있게 풀어가면서 제법 흥미진진하게 전개됐을 드라마인데, 28부작이나 되다 보니 그 사이에 신사임당의 남편 이원수의 바람난 이야기도 들어가고, 생전 노동이라곤 해보지도 못한 양반집 아낙이 딱 한 번 종이를 제작한 경험 하나만으로 닷새만에 색지 오천장을 뚝딱 만들어낸다거나, 보름 만에 조선에서 최고의 질을 자랑하는 운평사 고려지를 재현해내는 말도 안 되는 억지들이 막 나온다.


거기다 이영애 예쁜 줄 다들 아는 사실인데 굳이 배우들 대사에 "예뻐~ 참 예뻐~" 소리를 무슨 양념이라도 치듯이 그렇게 자주 흘릴 필요가 있었나 싶다. 누군가 이 부분에 대해 '사임당'을 '황진이'로 만들어놔서 드라마 버려놨다고 하던데 정말 딱 맞는 비유란 생각이 든다.      


의성군이 어쩌다 이태리로 가게 되었는지,

위작 금강산도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지가 궁금해서 궁시렁대면서 쓰잘 데 없는 부분은 스킵해가며 보았다. 그러니 28회분을 주말 동안 후딱 다 봤지, 그걸 한 편 한 편 다 보라고 했다면 절대 못 봤을 거다.


어쨌든 드라마는 망했지만

사임당의 삶을 재조명하면서 아이들 교육에 대해 확고한 자기만의 신념을 가진 모습을 보여준 장면이라든지(좋아하고 잘하는 일을 하도록 응원해주고, 자만하지 않도록 겸손을 가르치고, 친구들을 포용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남편의 부정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에겐 선량하고 자상한 아버지였음을 부각하며 아이들이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존경을 버리지 않도록 말하는 등) 왕에게 백성이 꿈꿀 수 있는 나라를 만들어주십사고 호소하는 부분, 사사건건 훼방 놓고 고려지 비법을 뺏기 위해 죽이려고까지 하려 했던 휘음당 덕순을 위기의 순간에 목숨을 구해주어 결국은 자신의 편으로 만든 부분은 꽤 인상적이었다.(사실 이 부분도 좀 억지스럽긴 했다. 절벽에 매달린 두 여인네를 끌어올린 의성군은 슈퍼맨?)


휘음당이 민치홍에게 납치당해 죽을 뻔한 사임당의 목숨을 마지막에 구해준 것은 사임당을 살리고자 하는 순수한 의도보다는 역모죄로 죽게 된 남편으로 인해 집안이 몰락하고, 관비로 끌려갈 아들들을 사임당에게 부탁하기 위해서였지만 자기의 자식을 부탁할 정도로 사임당을 신뢰했기에 나올 수 있는 행동이었다.  


루벤스의 '한복을 입은 남자'의 주인공이 탐라 유배길에 사임당의 도움으로 탈출해서 선교사를 따라 이태리로 가서 화가로 정착한 의성군이라는 설정은 소설 [베니스의 개성상인]에서 이 그림의 주인공을 임진왜란 때 이탈리아에 건너가 세계무역을 주름잡은 조선인 거상 안토니오 꼬레아의 일대기와 비교되기도 했다.


그러나 루벤스의 이 조선인 남자 그림에 대한 상상력은 소설가 오세영이 설정한 내용이 극작가 박은령보다 훨씬 더 치밀하고 그럴듯하다고 여긴다. 의성군이 조선에 두고 온 사임당을 그리워하다 사임당의 초상화를 그렸고, 그 미인도 뒤에 안견의 금강산도를 이중배접해서 두었다가 수백 년이 지난 뒤 무엇에 끌린 듯 의성군이 마지막까지 머물렀던 곳을 찾은 서지윤이 그 그림을 발견하면서 이야기의 실마리를 풀어나간 것은 이해가 되지만, 루벤스라는 이탈리아의 대화가가 조선에서 온 무명의 화가를 자신의 그림 주인공으로 그렸다는 건(만약 이탈리아에서 성공한 화가였다면 의성군 이겸의 이름이나 작품이 미술사에 남아있는 설정이어야 함) 이해하기 어려운 설정이다. 굳이 이런 설정까지 하지 않아도 됐는데, 쓸데없이 이것저것 다 끌어다 놓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신사임당의 그림처럼 담박하면서 여백의 미를 두었으면 좋았을 텐데, 이것저것 다 끌어다 넣어서 너무 정신없이 화려하기만 한 그림을 그려버린 것이다.


이영애가 12년 만에 복귀했다는 점에서 많은 관심을 모으며 성공을 예상했지만, 진부한 타임루프 소재와 더불어 배우들과 맞지 않는 동떨어진 캐릭터 등으로 예상보다 못한 관심을 받았으며, 경쟁작인 비즈니스 코미디 드라마 《김과장》이 탄탄한 줄거리와 배우들의 열연으로 예상치 못한 히트를 치기 시작하면서 1세대 한류스타인 배우들의 이름이 무색하게 참패하고 말았다는 위키백과의 평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이영애는 나이가 들어도, 아이를 낳아도 여전히 아름답고 연기도 녹슬지 않았으나, 이 좋은 배우를 데려다 왜 이런 드라마를 만들었는지 SBS에 묻고 싶다. 왜 그랬어~ 정말!


[사임당 빛의 일기]는 배우들의 이름값만으로는 드라마를 성공시킬 수 없다는 교훈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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