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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그미 Nov 22. 2021

천연기념물 측백나무숲과 외씨버선길이 어우러진

영양 감천마을 오일도 생가


10월에 이곳을 다녀오신 블로그이웃 제빵왕님의 글을 보고 마음에 두었던 영양 감천마을을 11월 13일에 다녀왔다. 경북 영양은 조지훈 생가가 있는 주실마을숲에 가려고 작년부터 벼르던 곳인데, 오일도 생가가 기폭제가 되어주었다.


집을 나설 때는 구름이 많아 날이 흐릴까 걱정했는데 영양에 가까워질수록 구름이 걷히더니 영양 도착했을 땐 하늘이 구름 한 점 없이 파래져서 기분까지 파랑파랑 즐거운 여행이 되었다.

일제강점기를 살아가며 암울한 시대를 한탄하는 시들을 썼던 서정시인이자 항일시인 오일도의 고향 감천마을은 맛있는 물이 샘솟고 감나무가 많아 '감천'이라 불린다고 안내판에 쓰여있다. 그런데, 감천마을을 소개한 다른 기사에는 ‘큰 내가 마을 앞을 흐른다’고 감들내, 감내, 감천이라 불리고 있다고도 한다.

영양군청 홈피

낙안 오씨들이 400여 년을 살아온 집성촌이며 시인 오일도가 태어나 자란 감천마을 가운데 시인의 생가가 자리하고 있으며, 44칸 기와집으로 경북 문화재자료 제248호로 지정되어 있다. 마을에는 유서 깊은 고택의 정취에 어울리는 영양 문학테마공원과 시인의 작품인 "저녁놀"이 있는 오일도 시공원이 마련되어 있다.


오일도(吳一島) 생가는 일제강점기에 활약한 애국시인 일도 오희병(1901~1946)이 태어나고 자란 집이다. 일도는 아명이었는데, 후에 필명으로 사용했다. 이 가옥은 조부인 오시동이 조선 고종 1년 1864에 건립한 것으로, 정면 5칸 측면 6칸 규모의 ㅁ자형 건물인 정침과 5칸 규모의 솟을대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금도 후손이 살고 계신데, 문을 활짝 열어두어 집안 곳곳을 둘러볼 수 있었다.

대문에서 정면을 보면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채 오른쪽에 사랑채가 있다. 사랑채에는 '국운헌(菊雲軒)' 당호와 '한묵청록(翰墨淸綠)' 편액이 걸려 있다. 임진왜란 때 학봉 김성일과 함께 의병활동을 했던 선조 오수눌의 호 '국헌'에 구름 '운'자를 더해 '국운헌'이라 했다. '한묵청록'은 바른 글을 쓰고자 하는 마음이다. 중문채에 딸린 작은 방은 글방으로, 저 글방에서 오일도가 공부했다고 한다.


생가를 나와 '오일도 시공원' 표지판을 따라가면 안쪽에 '삼천지'란 이름의 연못이 나온다. 삼천지 둘레에는 감탄이 절로 나오는 멋있는 노송들이 가지를 뻗은 채 줄지어 있다.

 연못을 둘러싼 오일도 시공원에는 '내 연인이여! 가까이 오렴!' '누른 포도잎' '그믐밤' '코스모스' '가을하늘' 등 그의 시를 새겨 넣은 바윗돌들이 나지막한 둔덕들 가운데 서있다. 흔히 오일도를 애상의 가을을 노래하는 서정시인, 고독과 비애의 시인이라 하지만 그에게 있어 서정은 시대의 절망과 상실을 표현하는 시선이었다. 나태주 시인은 그의 시에 대해 '억센 항변과 암울한 시대를 한탄하는 시들'이라 평했다.


연못 건너편에 낙안오씨 종택인 감호헌(鑑湖軒)과 사당인 충효사가 있다. 마을을 돌아다니다 보면 문패 아래 시를 써놓은 집도 보이고, 작은 촌가이지만 정갈한 느낌의 집들이 많았다. 메주와 무청을 처마 밑에 걸어둔 모습, 무를 썰어 햇빛에 말리는 모습, 김장을 위해 배추를 쌓아놓은 풍경도 산골 마을의 정취가 느껴져서 좋았다. 무엇보다 마을을 둘러싼 사과밭에 빨간 사과가 주렁주렁 달려있어 눈길을 사로잡았다. 마침 사과를 수확하는 과수원이 있어 주인장을 찾아가 맛있는 사과 한 박스를 착한 가격에 사기도 했다.

 청송을 지나쳐오느라 그곳에서도 사과를 한보따리 샀는데, 그간 청송사과가 제일 맛있는 줄 알고 있다가 이번에 영양사과가 더 맛있다는 걸 알았다. 영양 사과 진짜 맛있음~ 인정!

영양문학테마공원은 오일도 시공원 아래로 쭉 더 내려가야 나온다. 다음 목적지인 주실마을을 가야해서 시간상 이곳은 먼발치에서만 보고 나왔다.


감천마을의 또다른 자랑인 천연기념물 측백나무숲은  마을 앞의 들을 가로질러 반변천 또는 대천, 신한천으로 불리는 작은 강을 끼고 있다. '천연기념물 제114호 영양측백나무숲'이라 쓰여진 안내판 아래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는데 이곳은 측백나무숲 건너편이다.


천변을 따라 소나무와 느티나무가 길게 펼쳐진 숲은 감천마을에 살았던 침벽 오현병이 1959년경 무와 문예, 풍류의 수련도장으로 조성했다고 한다. 이후 후손들이 그의 뒤를 이어 정성으로 가꾸어, 지금은 침벽공원 또는 감천 유원지라 불리며 캠핑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이 숲 맞은편 높고 긴 수직의 절벽에 측백나무가 자생하는 천연기념물 제114호로 지정된 측백나무숲이 있다. 감천의 측백나무 숲은 모감주나무, 털댕강나무, 삼나무, 단풍나무, 산벗나무 등도 함께 어우러져 있어 계절마다 다채로우면서도 늘 푸르다. 우리나라에는 측백나무 자생지가 극히 드물다. 특히 이와 같은 집단적 자생은 다른 지역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어 식물학상 희귀한 경우라고 한다. 깊은 물과 높은 절벽이 사람들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아 사람의 손이 닿기 어려웠고, 그로 인해  보존되었다. 때문에 측백나무숲은 강 건너에서 바라만 볼 뿐 직접 건너가서 보긴 어렵다.


또한 감천마을은 외씨버선길의 다섯 번째 길인 ‘오일도 시인의 길'을 걸을 수 있는 곳이다. 외씨버선의 갸름한 모양새를 닮았다는 ’외씨버선길‘은 청송에서 시작해 영양과 봉화를 거쳐 강원도 영월에서 끝난다. ‘육지 속의 섬’들을 잇는 이 트레일의 길이는 총 240㎞로 13개 코스와 2개의 연결구간으로 이루어졌다.

이곳은 4개로 나누어진 영양 권역의 두 번째 구간이기도 한데, 이 구간에 위치한 ‘감천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란 항일 시인인 오일도가 구간의 이름이 되었다. 시간이 여유롭다면 외씨버선길을 따라 쭉 걸으며 파란 가을하늘과 곱게 물들어가는 가을산을 눈에 담을 수 있는 아름다운 여정이다.

* 오일도가 누구예여?

나도 잘 모르던 시인이었는데 이번 기회에 열심히 조사해서 알게 된 사실을 정리해본다.

시인 오일도는 1901년에 경북 영양에서 태어났다. 영양의 천석 거부 오익휴의 차남으로 본명은 희병(熙)이었다. 한학에 대한 조예가 깊은 집안이라 8세부터 14세까지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했다. 이때 공부한 한학의 영향으로 한시를 창작했으며 한시 78수를 남겼다. 아들의 증언에 따르면 굉장히 과묵한 성격이었다고 한다.


오일도는 17세에 영양보통학교를 다니면서 근대 교육 체계 속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학습에 뛰어난 성취를 보여 1922년 18세 때에 경성제일고보에 진학했고, 이 후 일본의 릿교대학교 철학부를 졸업하였다. 유학중이던 1925년에 문예월간지인 조선문단에 '한가람 백사장'을 발표하면서 시작활동을 시작하였고, 본격적으로 창작 활동을 전개한 것은 1935년 2월에 시전문지 『시원』을 창간하면서부터였다. 그는 여기에 「노변(爐邊)의 애가(哀歌)」·「눈이여! 어서 내려다오」·「창을 남쪽으로」·「누른 포도잎」·「벽서(壁書)」·「내 연인이여!」 등을 발표하였다.


그는 이밖에도 다수의 한시 및 한역시를 많이 남겼으며, 시원을 창간하여 잡지 발행인으로 뛰어난 능력을 보여 주었으나 안타깝게도 ≪시원≫은 5호를 마지막으로 종간되었다. 채 1년이 못 되는 기간 동안 총 5호 정도만 발간했지만 ≪시원≫은 1930년대 한국 문단에 커다란 영향을 남겨, 한국현대시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오일도는 작품 활동보다는 『시원』을 창간하여 한국 현대시의 발전에 기여하였다는 점에서 더 중요한 시사적 의미를 지니는 시인이라 할 수 있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노변의 애가", "눈이여! 어서 내려다오" 등이 있다. 그의 작품은 낭만주의의 기조 위에 애상과 영탄이 서로 얽혀 있는 경향을 보인다. 따라서, 그의 시는 지성으로 감정을 절제하기보다는 오히려 감정의 자유로운 표출에 역점을 두었다. 그리고 거기에 깃든 애상과 영탄은 그로 하여금 어둡고, 그늘지고, 암울한 정서를 주로 노래하게 만들었다.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러 일제의 통제가 강화되자 1942년 낙향하여 「과정기」 등 수필을 쓰면서 칩거하였다. 광복을 맞아 곧 상경하여 문학 활동을 재개하면서 『시원』의 복간을 위하여 노력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우울한 심정으로 폭음을 계속하다 1946년 46세의 나이에 간경화증으로 죽었다.


생전에 단 한 권의 시집도 남기지 못했으나, 1973년 ≪현대시학≫을 통해 유고 시들이 처음 세상에 알려졌다. 3년 뒤인 1976년 유고 시집 ≪저녁놀≫이 근역서재에서 발간되었다. 이들 유고 시는 오일도 시인이 생전에 조지훈 선생에게 맡겨 두었던 것인데, 조지훈 선생 사후 조지훈 선생의 고모인 시조 시인 조애영 선생이 묶었다.

1977년 문화공론사에서 유고 시집 ≪지하실의 달≫을 출간했으며, 1988년에는 영양 출신 시연 이병각, 조지훈, 조동진, 오일도 네 사람의 시를 묶어 낸 <영양 시선집≫이 나오기도 했다. ≪지하실의 달≫은 2013.08.05.에 이프리북스에서 처음 ebook으로 출간 이후 토지(2018)와 서울프랜드(2019)에서도 재출간되었다. 종이로 된 책은 2020.08.05.에 하북스에서 펴낸 오일도 유고시집 ≪저녁놀≫이 있다.

그의 시 가운데 세 편을 소개한다.

늦가을에 썼을 법한 딱 이맘때의 시 '누른 포도잎'과 그의 대표작인 '저녁놀', '눈이여! 어서 내려다오'이다.


< 누른 포도잎 >


검젖은 뜰 위에

하나 둘... 말없이 내리는 누른 포도잎.


오늘도 나는 비 들고

누른 잎을 울며 쓰나니


언제나 이 비극 끝이 나려나!


검젖은 뜰 위에

하나 둘...

말없이 내리는 누른 포도잎.


< 저녁놀 >


작은 방 안에

장미를 피우려다 장미는 못 피우고

저녁놀 타고 나는 간다


모가지 앞은 잊어버려라

하늘 저편으로

둥둥 떠가는

저녁놀!


이 우주에

저보담 더 아름다운 것이 또 무엇이랴!

저녁놀 타고 나는 간다.

붉은 꽃밭 속으로

붉은 꿈나라로.


< 눈이여! 어서 내려다오 >


눈이여! 어서 내려다오.

저 황막한 벌판을 희게 덮게 하오.


차디찬 서리의 독배(毒杯)에 입술 터지고

무자비한 바람 때 없이 지내는 잔 칸질에 피투성이 낙엽이

가득 쌓인

대지의 젖가슴 포-트립 빛의 상처를.


눈이여! 어서 내려 다오

저어 앙상한 앞 산을 고이 덮어 다오.


사해(死骸)의 한지(寒枝) 위에

까마귀 운다

금수(錦繡)의 옷과 청춘의 육체를 다 빼앗기고 한위(寒威)에 쭈그리는 검은 얼굴들.


눈이여! 퍽퍽 내려 다오

태양이 또 그위에 빛나리라.


가슴 아픈 옛 기억을 묻고 보내고

싸늘한 현실을 잊고

성역(聖域)의 새 아침 흰 정토(淨土)위에 내 영혼 쉬이려는 희원(希願) 이오니.


* 1935년 4월, 『시원』 2호에 발표된 「눈이여! 어서 내려다오」에서 보이는 ‘서리의 독배에 터진 입술’이나 ‘피투성이 낙엽’, ‘대지의 상처’와 같은 심상을 통해서 낭만과 애상, 그리고 영탄이 얽힌 암울한 정서를 엿볼 수 있다.


* 감천마을과 측백나무숲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아래기사 참고 https://m.yeongnam.com/view.php?key=20201130010003979


여름의 측백나무숲 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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