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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그미 Nov 18. 2021

예학을 건축에 반영한 서원

논산 돈암서원

서울 사람 남산 안 가보고, 등잔 밑이 어둡다고

우리나라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9개의 서원 가운데 가장 좋아하고, 등재된 2019년 이전부터 자주 간 논산 돈암서원에 대한 글을 여지껏 올리지 않았다.

11월 중순 늦가을에 어머님과 함께 탑정호 출렁다리를 건넌 뒤 점심 먹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들른 돈암서원. 평소에는 찾는 사람이 적은 곳이었는데 이날은 웬일인지 많은 이들이 찾고 있었다.(출렁다리 여파인가? 아님 서원에 대한 관심이 많아진 것인가?) 문화해설사를 따라다니며 설명을 듣는 두 그룹 외에도 부부끼리 가족끼리 찾은 분들이 세 그룹 정도 더 있었다.

충남 논산시 연산면 임3길 26-14에 위치한 돈암서원은 1634년에 지역 유생들이 기호학파를 대표하는 사계(沙溪) 김장생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성리학 교육시설이다. 1660년(현종 1)에 왕이 '돈암서원'이라는 현판을 내려 사액서원이 된 후 지역의 공론과 학문을 주도했다. 돈암은 임리 숲말 근처에 있는 바위 이름이다.

1868년(고종 5)에 시작된 서원 정리 작업으로 1871년에 흥선대원군이 전국 650여 개의 서원 문을 닫으라는 훼철령을 내려 47개만 남았을 때에도 명맥을 유지하였다. 원래는 현재 위치 인근의 임리 숲말에 있었는데 19세기 후반 홍수 피해를 입어 현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현재 서원 자리에서 서북쪽으로 약 1.5km 떨어진 곳)


서원은 고정산 줄기가 이어진 중간쯤의 완만한 구릉지에 동향으로 자리하고 있다. 앞에는 연산천이 흐르고, 뒤로는 고정산 줄기가 있는 배산임수 형태이며, 전면 좌측에는 계룡산, 우측에는 대둔산이 바라보인다.


주차장에서 75m쯤 떨어진 돈암서원까지 들어가는 길에는 바닥에 떨어진 갈색 느티나무잎이 가득하고, 노란 은행나무 잎이 우수수 떨어져 늦가을의 풍취를 돋아주고 있었다.

서원 입구에 하마비와 홍살문(경건한 마음으로 출입하라는 의미에서 붉은 칠을 한 문)이 있고, 정면에는 2006년에 건축된 산앙루가 있다.

바깥 대문인 외삼문으로 들어서면 강학공간 왼편에 유생들이 공부하는 응도당이 있고, 오른편에 서원을 보존 관리하기 위해 관리자가 상주하는 경회당(현재 관리사무소)이 있다.

앞쪽에 강당인 양성당, 유생들의 기숙사인 동재(東齋) 거경재와 서재(西齋) 정의재가 있고, 뒤쪽 제향공간에는 내삼문을 지나 사당인 숭례사를 두어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 형식을 따랐다. 숭례사 동쪽 아래에는 제사에 필요한 도구를 보관하는 전사청이 있다.

양성당 앞마당에는 서원의 창건 과정과 김장생 부자의 업적을 새긴 원정비가 있다. 양성당 옆에는 김장생의 부친 김계희 당시의 사실을 기록한 황강실기, 김장생 문집인 사계전서, 김장생의 아들 김집의 문집인 신독재전서 등과 경서변의, 가례집람,  상례비요 등의 목판을 보관하는 장판각과 김계휘가 후학을 가르치던 정회당이 자리한다. 정회당과 장판각 사이에는 수령 300년의 보호수로 오래된 향나무가 멋드러진 줄기를 쭉쭉 뻗어올리고 있다.

사적 제383호인 돈암서원의 주요문화재로는 응도당(보물 제1569호), 숭례사(충남 유형문화재 제155호), 원정비(충남문화재자료 제366호)가 있다.


돈암서원에서 주의깊게 볼 건물은 강학 활동의 핵심 건축물인 응도당이다. 보물 제1569호인 응도당은 한국 서원의 강당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며, 배치가 특이하다.

유생들이 장수강학(유생들이 몸과 마음을 수양하는 것을 장수라 하고 스승과 문답을 주고받으며 공부하는 것을 강학이라 함)하던 강당 건물은 보통 사당 아래 일렬로 배치되기 마련인데 응도당은 사당과 직각으로 배치되어 있다. 앞뒤로 다른 건물이 없어 뚫려있는 공간이라 여름에 응도당 마루에 앉아있으면 정말 시원하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공간이기도 해서, 돈암서원을 찾을 때마다 응도당 마루에 앉아 여유롭게 산들바람을 느끼곤 한다.

응도당의 위치가 이리 된 것에는 사연이 있다. 1880년(고종 17)에 돈암서원을 숲말에서 이곳으로 옮길 때 응도당은 옛터에 그대로 두었다가 1971년에 옮겨왔는데, 처음 서원을 옮길 당시 지은 양성당이 숭례사 아래에서 강당의 기능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본래 위치와 다르게 사당의 서쪽 아래에 직각으로 배치한 것이다.

응도당은 앞면 5칸·옆면 3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ㅅ자 모양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내부는 모두 마루를 깔았고 옆면에는 비바람을 막아주는 풍판을 달았으며, 풍판 아래에는 눈썹지붕을 두어 벽으로 비가 들이치지 않게 하였다. 처마의 암막새(암키와의 끝을 마무리하는 장식) 기와에 '숭정육년계유이월일서원'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1633년 11월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 서원의 규모나 구조적 측면으로 보아 한국 서원을 대표하는 면모라고 할 수 있다.

예학 이론을 건축으로 구현한 응도당은 예를 실천하는 건축 제도의 모델로 제시된 건축 양식에 따라 지어졌으며 돈암서원의 건물 배치와 규모는 김장생이  「의례」와 「주자대전」을 고증하여 강경 황산서원(현 죽림서원)의 법도를 따라 지었다고 한다.  김장생은 예학서 <가례집람〉에 성리학을 바탕으로 한 건축물 형태를 도면과 함께 상세하게 설명해 놓았다.


사당인 숭례사에는 김장생을 중심으로 그의 아들이자 제자인 김집과 송준길, 송시열의 위패를 모셨다. 김장생은 17세기 전반에 예학을 집대성해 사회에 보급한 인물이다. (돈암서원 근처에 그의 묘지와 광산 김씨 집안을 일으킨 양천 허씨 정려각, 광산 김씨 종택,  재실들이 즐비하게 모여있다) 김장생의 제자들은 돈암서원을 중심으로 예학에 관한 연구와 논의를 활발하게 펼쳤기에 돈암서원은 예학 실천의 거점이었다.

숭례사는 현재 들어가볼 수 없어 겉에서만 볼 수 있는데, 내삼문 옆으로 난 '숭례사 꽃담'이 유명하다. 내삼문은 숭례사에 제항을 지내기 위해 출입하는 문으로, 사당 앞의 어칸과 양 협칸을 별도로 하나씩 세우고 문과 문 사이에는 담장이 쳐져 있다. 담장에는 지부해함, 박문약례, 서일화풍 등 김장생과 그의 후손들의 예학정신을 가장 잘 보여주는 12개의 글자를 전서체로 새겨 놓았다. 이 글자를 색깔을 입혀 알록달록 새겨놓았기에 꽃담장이라 부르는데, 꽃담장은 본래 궁궐 같은 공간에 연출된 독특한 전통담장으로 경복궁 자경전의 꽃담이 유명하다. 그런데 숭례사에도 이를 둘러싼 꽃담장을 세운 것은 이곳이 특별한 공간임을 알려준다. (꽃담에 새겨진 12자의 글씨가 지닌 의미는 맨 아래 사진과 함께 설명해놓는다.)

일요일 오후, 한 문화해설사분이 이 꽃담과 양성당 사이 마당에 서서 숭례사와 꽃담의 설명을 열심히 하시고, 양성당 뒤편의 마루에 앉은 연세 지긋한 분들이 즐겁게 웃으며 들으시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독서의 계절이기도 한 이 가을에 만추의 낙엽을 밟으며 선현들의 강학소리 가득했던 돈암서원의 경내를 걸어보심은 어떨런지~



* 돈암서원을 포함한 '한국의 서원'은 조선후기 교육 및 사회적 활동에서 널리 보편화된 성리학의 증거라는 점에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아 지난 201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한국의 서원에는 논산의 돈암서원을 비롯하여 영주 소수서원, 함양 남계서원, 경주 옥산서원, 장성 필암서원, 달성 도동서원, 안동 도산서원, 안동 병산서원, 정읍 무성서원 등 한국을 대표하는 9개 서원이 포함되었다.


* 돈암서원 숭례사 꽃담에 새겨진 글자 해석

地負海涵(지부해함) : 대지가 만물을 짊어지고 바다는 만천을 포용한다. [풀이] 땅이 만물을 짊어지고 바다가 모든 물줄기를 수용하듯이 배움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열린 마음자세를 가져야 한다. 또한 참된 배움을 익힌 사람은 아집과 편견의 한계에서 벗어나 땅과 바다처럼 다른 사람의 의견을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


博文約禮(박문약례) : 지식은 넓히고 행동은 예의에 맞게 하라. [풀이] 배움을 통해 지식을 확장하면서도 자만하지 않고 예에 맞게 말과 행동을 절제할 수 있다면 참다운 도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배움의 참뜻을 구현한다는 것은 단순한 지식의 축적과 활용뿐만 아니라 예법에 맞는 예의 실천을 위한 자기 수양이 함께 갖추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瑞日和風(서일화풍) : 상서로운 햇살과 온화한 바람

[풀이] 상서로운 해와 구름, 온화한 바람과 단비가 만물을 육성하듯이 상대방을 배려하고 응대하면서 '지부해함'과 '박문약례'를 실천한다면 화평하고 조화로운 세상이 만들어질 것이라는 사계 김장생 선생의 예학정신이 담겨 있다.

주차장 오른쫔은 돈암서원 한옥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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