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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그미 Mar 06. 2022

우정이 이룬 기적

윤동주 유고를 보존한 정병욱 가옥

삼일절에 섬진강변 광양 매화마을에 가서 매화를 실컷 구경한 뒤 그 다음으로 찾은 곳이 정병욱 가옥이랍니다. 삼일절에 광양까지 와서 꽃만 보고 가면 섭하쥬~~^^

윤동주의 육필원고를 마루 아래 쌀독에 숨겨서 보관했다가, 광복 이후에 유고시집을 낼 수 있게 하신 분이 바로 윤동주의 친구 정병욱이라고 해요.

매화마을에서 '정병욱 가옥'으로 내비를 찍고 가다보면, 진월초등학교 정문에서 망덕포구로 접어들어요. 도로가에 수십 개의 다듬돌이 줄지어섰고, 돌마다 윤동주 시를 새긴 ‘윤동주 망덕포구 시비'를 지나 우회전하면 왼쪽으로 섬진강을 끼고 걷는 남파랑길이 보인답니다.

제방 너머로 섬진강이 보이는 왕복 2차선 도로를 타고 조금만 가다보면 오른쪽에 공터가 나오고 번듯한 집 한 채가 보여요.(원래는 양철집이었는데, 작년엔가 새로 복원하면서 너무 새집처럼 바뀌어 버려서 예전부터 봐오신 분들이 많이 아쉬워하신다고 하네요)

보수 이후
보수 전

지붕은 얇고 경사는 완만하며 처마는 짧은데, 미닫이문의 창틀에 유리가 끼워져 있어 안쪽의 진열대와 마루가 보이는 집이에요.

원래 모습

정병욱 가옥은 1925년 망덕포구에 건립된 점포형 주택이에요. 1934년 부친인 정남섭님이 양조허가를 받아 양조장을 운영하면서 주택을 겸용한 보기 드문 구조의 건축물이며, 윤동주의 대표작 19편이 수록된 육필 원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의 보존과 부활의 공간으로 문화사적 의미가 매우 커서 등록문화재 제341호로 지정됐어요.

비교적 잘 알려져있지 않은 곳인데도 망덕포구 한켠에 자리잡은 정병욱 가옥을 찾는 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었어요.  우리가 갔던 날이 삼일절이라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지만 가족단위로 이 곳을 찾아와 문화해설사님의 설명을 듣고 있는 분들이 꽤 있었답니다.


정병욱 선생 일가가 이곳에 터를 잡은 것은 부친 남파 정남섭 선생 때부터라고 해요. 남파 선생은 일찍이 고향 남해군 설천면 문항리에서 20세의 나이로 3·1 독립만세 운동을 주도하였고, 거제와 하동에서 일시 교편을 잡기도 하였으나, 일제 치하에서 교직이 마음 편한 일이 아니었대요. 그래서 몇 해 후 사직하고 광양에서 양조사업을 하게 되지요. 광복 후 미군정 시기에는 진월면장을 역임하시기도 했고, 징병에 끌려간 큰아들 정병욱을 대신하여 부인과 함께 유고를 보존한 숨은 공로자이시죠.

이 건물은 윤동주 시인이 생전에 써서 남긴 원고가 그의 친우인 정병욱에 맡겨져 온전히 보관되었던 곳이에요. 1944년에 마루 밑에 숨긴 윤동주의 육필원고는 1948년에야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는데, 정병욱 부모님의 노력으로 우리가 오늘날 윤동주님의 시를 향유할 수 있게 된 거예요.

가옥 안으로 들어서면 마루 구석에 앉은뱅이책상이 놓여 있어요. 책상이 놓인 마루 널판지를 들어내고, 항아리를 묻고서 그 안에 윤동주 시인의 원고를 보자기에 싸서 넣었다고 해요.

1940년 봄, 섬진강 하구에서 올라온 정병욱과 간도 용정에서 내려온 윤동주가 운명적으로 만나요. 신문을 손에 쥐고 기숙사로 찾아와 “글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나와 같이 산보라도 나가실까요”하고 3학년인 윤동주가 조선일보 학생란에 실린 정병욱의 글을 보고 축하인사를 하러 온 것이죠. 벗이자 후배였던 정병욱과 윤동주는 그 뒤로 늘 함께 했다고 해요.

연희전문학교 시절 윤동주와 정병욱

인왕산을 산책하고 충무로에 나가 책방을 순례했으며, 문학과 예술을 논하고 세상을 걱정했어요. 윤동주는 자신의 습작시를 정병욱에게 먼저 보여주곤 했는데요, 1941년 19편의 시를 자필로 정리하고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이름을 붙인 윤동주는 3부를 만들어 그 가운데 하나를 정병욱에게 건넸다고 해요. (영화 '동주'에는 송몽규가 절친으로 나왔고 함께 유학하다 감옥까지 같이 간 사이로 나오며 정병욱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없지만, 현실에선 일본 유학 전까지 정병욱과도 꽤 친했던 것으로 짐작되는 부분)

그런데 1943년 일본에서 윤동주는 독립운동 혐의로 검거돼 후쿠오카 형무소에 투옥되고, 이듬해 정병욱도 학도병으로 끌려가고 말아요. 정병욱은 급히 원고를 어머니께 맡기며 “저나 윤동주 시인이 살아서 돌아올 때까지 소중하게 간직해 주십시오! 둘 다 살아 돌아오지 못하더라도 조국이 독립되면 이 원고를 연희전문학교로 보내어 세상에 알리도록 해주세요."라는 말을 유언처럼 남기고 떠났다고 해요.


윤동주가 옥사하고, 1945년 8월 해방이 되자 돌아온 정병욱은 마루 아래 숨겨뒀던 윤동주의 시를 모아 윤동주의 전문학교 동기 강처중, 동생 윤일주 그의 당숙인 윤영춘과 함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시집을 발간했어요. 표지에 제목, 저자, 반가(頒價) 100원, 1948년 1월 30일 발행, 정음사 간행. 이라고 쓰여있어요. 정지용의 서문과 강처중의 발문 및 유령(柳玲)의 추모시와 더불어 「서시(序詩)」를 포함한 31편의 시가 3부로 나뉘어 수록되어 있어요. 그리고 1968년 연세대학교 교정에 그의 시비가 세워졌지요.

정병욱은 민족의식을 말살하려 했던 일제말의 탄압 속에서 윤동주의 시를 보존하고 윤동주라는 시인을 세상에 알린 장본인이에요. 자신보다 세 살이나 많았음에도 윤동주와 나이를 뛰어넘는 우정을 나누었고, 윤동주가 보여준 우정과 배려는 정병욱에게 보답해야할 과제로 남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결과물로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이지요. 어쩌면 오늘날 전국민이, 아니 나아가 일본인들도 좋아한다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우정이 만들어낸 기적이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 흰 그림자 >

                          윤동주


황혼이 짊어지는 모금에서

 하루 종일 시들은 귀를 가만히 귀울이면

땅거미 옮겨지는 발자취소리


발자취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나는 총명했던가요.


이제 어리석게도 모든 것을 깨달은 다음

오래 마음 깊은 곳에

괴로워하던 수많은 나를

하나, 둘 제 고장으로 돌려보내면

거리모퉁이 어둠 속으로

소리없이 사라지는 흰 그림자


흰 그림자들

연연히 사랑하던 흰 그림자들


내 모든 것을 돌려보낸 뒤

허전히 뒷골목을 돌아

황혼처럼 물드는 내 방으로 돌아오면


신념이 깊은 의젓한 양처럼

하루 종일 시름없이 풀포기나 뜯자.


벗 윤동주의 시를 보존하고 민족시인으로 추앙받게 하는데 헌신했던 정병욱 선생은 자신의 아호를 '백영'이라 부르며 윤동주가 우리 민족의 모습으로 그리던 <흰 그림자> 를 평생 기억하고자 하였다.


.* 정병욱 선생의 생애

국문학자 백영 정병욱 선생(1922-1982)은 1922년 경상남도 남해군 설천면 문항리에서 태어나 유년기를 보내고, 하동군 금남면 덕천리에서 소년기를 보낸 뒤 초등학교 졸업 이후 경남 하동과 전남 광양에 거처를 두고 동래고보와 연희전문 문과, 서울대학교 국문학과를 나왔어요.


그는 윤동주를 세상에 알린 외에도 한국 고전문학 연구분야에 학문적 초석을 놓은 국문학자로, 주 전공인 고전 시가를 비롯해 국문학의 여러 분야에 탁월한 업적을 남겼으며, 판소리의 연구와 보존, 대중화 운동에도 선구적 업적을 남겨 판소리를 민족예술의 정화로 부활 계승토록 하는 데 크게 기여하신 분이랍니다.


그는 부산대, 연세대학교 교수를 거쳐 27년간 서울대학교 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하였으며(1957~1982) 서울대 박물관 관장을 역임하셨고, 여러 권의 저서와 함께 수십 편의 수필도 남겼어요. 그는 전통예술 전반과 함께 판소리 연구와 진흥에 힘써, 판소리학회(1974)를 창립하는 등 판소리가 우리 민족예술의 정화로 자리매김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어요. 또한 하버드대와 파리대학 초빙교수로서, 한국 고전 시가 논문 발표 및 강의 활동과 브리태니카 백과 사전에 한국 문학 항목을 집필하였답니다. 그 외에도 권위있는 국제 학술대회에도 참가하며 한국문학을 국제적으로 알리는 데도 크게 기여하신 분이랍니다. 이러한 학술적 업적으로 1967년 한국출판문화상 저작상, 한글과 국문학에 대한 공로로 1979년 외솔상, 1980년 삼일문화상을 받았으며, 1991년 은관문화훈장을 추서받으셨어요.

정병욱의 부모님

* 망덕포구는 어떤 곳?

백두대간 출발점이며 종착지라고 하는 망덕산 아래 펼쳐진 망덕포구는 다압, 구례, 곡성으로 가는 길목이랍니다. 전라남도 하동과 광양의 경계지역에 있는 섬진강 망덕포구는 전어축제가 열리는 계절이 되면, 광양의 랜드마크로 급부상하는 인기 절정의 관광지이기도 한다네요.(제가 초봄에 가서 여기가 이렇게 인기있는 곳인 줄 몰랐으요) 황병학의병 전투지라는 역사적 장소이기도 하구요.

망덕포구의 유래는 광양만을 한눈에 파수(경계하여 지키다)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어서 '망뎅이'라 이름하였고, 이를 한자 음을 빌려 '망덕'이라 했대요. 옛사람들이 섬진강을 거슬러 다압, 구례, 곡성으로 가는 유일한 길목 역할을 했던 망덕포구는 섬진강 물길이 풍성한 어장을 형성해 깨끗한 생육 환경에 사는 대표적인 어종, 가을 별미인 전어 산지인데요, 차지고 고소한 맛이 일품인 전어를 전국에서 가장 먼저 활어로 개발한 곳이라 직접 전어를 잡아 운영하는 횟집이 즐비하답니다. 어쩐지 정병욱 가옥 가는 길에 커다란 먹거리타운 표지판과 특이한 조형물이 보여서 이렇게 한적한 곳에 저런 게 왜 있지? 하고 신기해하던 기억이 나네요.

여기는 남파랑길의 한 구간인 '섬진강 꽃길'이기도 해서, 섬진강을 따라 걷기좋아요. 정병욱 가옥을 보신 뒤 봄이 오는 섬진강변을 천천히 걸어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망덕포구 먹거리타운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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