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끼 하나 없는 맨얼굴에, 빡빡 민 머리에 쓴 모자만으로도 패션이 되는 무여스님의 고운 얼굴에 반하고, 조리있는 말솜씨에 반해 어머님과 함께 무여스님에 쏘옥 빠져들었다.
열 아홉살의 어린 나이에 출가해 부처님의 제자로 23
년을 지내오신 무여스님은 쉽고 재미 있는 불교를 세상에 알리기 위해 사찰기행 방송을 제작하는 피디 겸 작가 그리고 리포터이다. 영상 편집까지 독학으로 배워서 직접 편집도 하시는 무여스님은 딱히 정해진 절이 없어 머무는 모든 곳이 집이라고 한다. 촬영여행을 마치면 서울의 한 선원에서 공부하랴, 강의하랴, 틈틈이 편집하랴 바쁜 나날을 보내는 모습들이 한 편 한 편 소개되는데 고부가 당장 무여스님의 팬이 되고 말았다.
텃밭에도 한 달쯤 전부터 가까운 암자에서 준비한 연등이 걸리고, 부처님 오신 날을 일주일 앞두고 있으니 아마도 그 시기에 맞춰 무여스님의 인생 이야기를 인간극장에 담아낸 모양이다.
오늘은 순천의 송광사와 법정 스님이 마지막까지 머무셨던 불일암을 촬영하러 간 이야기가 나왔는데, 아침마다 150명분의 밥을 한다는 송광사 부엌에서 한 처사님이 가마솥에 한 밥을 퍼내고 남은 누룽지를 칼로 슥슥 떼어내서 무여스님에게 드리는 장면이 나왔다.
"어머, 누룽지 정말 맛있어요~ 이거 저 주신 거니까 나머지는 싸서 이따 차에서 먹어야겠어요."
하시며 남은 누룽지를 종이에 싸서 챙기는 무여스님을 보시며 어머님께서 한 마디 하신다.
"아따, 맛나겄다! 가마솥에 불 때서 나온 누룽지가 최고재. 얼마나 꼬숩그나~"
"그러게요, 진짜 가마솥 누룽지네요. 저 처사님은 아주 가마솥밥에 도통하셔서 누룽지 떼어내시는 것도 예술이네요. 어릴 때 가마솥에 밥해서 누룽지 뗄라믄 힘들었는데"
"부처님 오신 날이 언제냐? 금방 되가지?"
"네~ 이번 주 일요일이요. 5월엔 쉬는 날이 많아 좋았는데 올해는 부처님 오신 날도 일요일이랑 겹치고, 쉬는 날이 줄었어요."
"시골에서는 부처님 오신 날이 아주 큰 명절이었어야. 그 날 지나면 농사일 하느라 바빠져서 초파일에 마지막으로 놀았재. 우리집은 마당에 큰 함지박을 놔두고 거기에다 물을 가득 채워서 바가지 하나랑 같이 놔뒀니라."
"원래 초파일에는 그렇게 하는 거예요?"
"아녀~ 다른 집은 안 그랬는디 우리집만 그랬재. 무위사 올라가는 집에 외따로 있는 길갓집이라 사람들이 가다가 우리집 들러서 물 한 모금씩 하고들 가는디, 다 큰 처녀들한테 물심부름하게 한께 할머니가 처녀들 얼굴 못 내밀게 할라고 마당에다 물이랑 떠마실 바가지를 놔뒀재. 알아서들 떠먹고 가라고~"
"무위사가 큰 절이라 사람들 많이 다녔을 텐데 매번 물 준비해 놓기도 쉽지 않았겠네요."
"어짜겄냐. 1년에 한 번 하는 큰 행산디. 그라고 옛날 사람들은 길 가다가 목 마르면 아무 집이나 들어가서 물 얻어먹는 건 암껏도 아니었응께."
"하긴 저희집도 길갓집이라 지나가던 사람들이 들러서 물도 마시고, 끼니 때면 밥도 드시고, 여름엔 우리집에서 아예 머리도 감고 가셨다니깐요. 심지어 어떤 분은 이 집은 샴푸 없냐고, 샴푸 내놓으라고 하시기도 했어요. 샴푸가 귀하던 시절인데."
"워매~ 남의 집에서 머리 감으면서 샴푸? 빨랫비누로만 감아도 감지덕지재. 옛날엔 샴푸가 뭐여. 세수비누도 귀해서 시꺼먼 빨래비누로 머리 감고 그랬는디. 그래도 내가 처녀라고 울 엄니가 따로 벌꿀비누를 사서 주셨는디, 세수할 때만 써도 아까워서 벌벌 떨었구만."
"맞아요~ 저도 어릴 때 머리는 빨래비누로 감을 때가 많고 어쩌다 세수비누로 감고 그랬던 거 같아요. 샴푸는 있어도 아빠만 따로 쓰시고."
"비누가 귀할 때라 세수비누로 머리 감으면 아주 최고였재. 그란디 요새 나온 빨래비누는 닭기름으로 만든다더라? 내가 유성장에 가서 사오는 빨래비누가 그걸로 만든다는디 거품도 잘 나고 때도 잘 빠져. 생선기름으로 만든 빨래비누는 비린내가 난다고 하든만."
"재활용비누 말씀하시는 거죠? 그게 친환경이라서 좋다고 하더라구요. 설거지할 때도 퐁퐁이 말고 설거지비누로 하면 환경에 좋다는데, 사둔 주방세제가 남아서 그거부터 다 쓰고 설거지비누로 바꿔야겠어요."
무여스님 이야기에서 비롯된 수다가 부처님 오신 날로 이어지고, 그날 지나가던 길손을 위해 떠다둔 물 이야기가 빨래비누로 이어져서 재활용비누까지 나왔다. 어머님과의 밥상 수다는 이렇게 종횡무진으로 이어진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고부간의 수다 중에 생활폐수를 줄이기 위해 퐁퐁이 대신 설거지비누를 이용하는 일부터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아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