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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그미 Jul 23. 2022

우리나라 최초로 물레방아가 세워진 함양

연암 물레방아공원

경상남도 함양군의 주민들이 풍년이 오기를 바라는 소망을 담아 함양군 내의 경치를 예찬하는 함양 아리랑에는 특이하게도 '물레방아'가 등장한다.(아래에 함양아리랑 전체노래 있어요~)


이뿐만이 아니다.

함양에는 물레방아를 주제로 한 물레방아공원과 물레방아떡마을이 있고, 1962년부터 매년 10월이면 함양군에서는 물레방아골축제가 열린다. 함양과 물레방아는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는 걸까?

바로  우리나라 최초로 물레방아가 설치된 곳 함양이기 때문이다. 연암 박지원이 안의현감 시절, 처음으로 이곳에서 물레방아를 제작하여 시험 가동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함양 물레방아 공원은 이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공원이다.


주소 : 경남 함양군안의면 용추계곡로 361

입장료, 주차료 무료

함양군은 지난 2004년 우리나라 최초로 실용화된 물레방아의 시발지를 기념하기 위해 총사업비 6억8천만 원을 투입해 연암 물레방아공원을 준공했다. 안의면 용추계곡 입구 주차장 앞에 조성된 연암물레방아공원의 2천 평의 부지에는 물레 1식, 방앗간 1동, 디딜방아, 8각 정자 1동, 목재산책로 88m, 관리사 1동, 주차장 500평, 연못 1식을 주변경관과 잘 어울리게 조성해 관람객들이 보고 쉴 수 있는 여유 공간도 마련했다. 특히 목재로 만들어진 물레는 지름 10m, 폭 2m로 우리나라 목재물레로서는 최고의 규모이다.

용추계곡이 흐르는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 안심마을은 연암 박지원이 처음으로 물레방아를 설치하여 시험 가동하였던 곳이다. 기백산과 황석산 사이에서 흘러내리는 용추계곡의 물길을 이용하여 물레방아를 돌렸다. 물레방아는 물의 낙차를 이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물을 이용하여 바퀴를 돌리려면 산골짜기와 같은 지형이어야 한다. 계곡이나 계곡 아래쪽의 경사진 구릉지역이 물레방아 돌리기에 가장 좋은 입지이다. 박지원이 함양군의 용추계곡을 골라 물레방아를 설치하고 시험한 것은 조건에 가장 알맞은 장소였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에 새롭게 등장한 실학 사상의 한 조류인 북학파의 영수이자 소설가였던 박지원(1737~1805)은 학문에 정진하며 재야에 묻혀 있다가 정조의 특명으로  나이 마흔에 관직에 나아가게 됐다. 선공감 감역을 시작으로 평시서 주부, 사복시 주부, 한성부 판관을 역임하다 1792년 12월부터 3년 남짓 안의현감을 지냈다.

그가 3년 넘게 머문 안의현은 본래 안음현으로 1767년(영조 43)에 안의현으로 개칭되었고, 지금의 경남 함양군 안의면이 그곳이다. 박지원은 중국을 여행하면서 목격하였던 여러 과학기술을 안의현감 시절에 시험해보고자 하였다. 안의현에 물레방아를 설치하였던 것도 그 일환이었다.


‘방아의 제도는 하나가 아니며 대부분 축력을 이용하는데, 우리나라는 시골에서 당나귀를 기르는 사람이 없어 소가 쉴 틈이 없다. 물레바퀴가 있으면 가장 편리한데, 그 제도를 아는 사람이 없어 늘 한탄하였다. 이전에 북경에 갈 때 삼하현을 지나다가 강가에서 연장을 만들고 누에를 치고 보리를 찧을 때, 모두 거센 물살로 물레바퀴를 돌리는 것을 보았다. 지금 이를 모방하여 시행한다면, 농가에서 곡식을 찧고 탈곡하는 데 이로울 뿐만 아니라 수리에도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박지원은 이제까지 우리나라에서 소를 이용한 연자방아만 이용하고 있음을 지적한 후, 거센 물살로 물레바퀴를 돌리는 중국의 방식을 도입하자고 제안하였다. 물레방아라고 직접 언급한 것은 아니지만 방아에 물레바퀴를 결합하고자 한 것은 곧 물레방아의 사용을 뜻한다. 이와 비슷한 수차의 사용은 고려 공민왕 때부터 있었지만 물레와 방아를 연결하는 방식은 아니었다. 그래서 박지원은 안의현 현장에서 물레바퀴와 방아를 결합한 물레방아를 만들고 시험 가동하였던 것이다.

물레방아는 물방아에 물레바퀴가 결합된 형태이다. 디딜방아와 같은 원리지만 밟는 힘을 물의 힘으로 대신 이용한다. 흐르는 물의 낙차를 이용하여 물레바퀴를 돌리면 바퀴의 굴대에 고정된 누름대[발]가 방아채의 다리를 누른다. 이때 방앗공이가 올라가고 누름대가 더 돌아 다리에서 떨어지면 공이가 아래로 처박히면서 방아를 찧는다. 디딜방아는 사람이 방아다리를 밟아 방앗공이를 놀려야 하므로 노동 부하가 큰 반면, 그 수는 적지만 물의 낙차를 이용해 가동되는 물레방아는 인력이 투입되지 않으면서 생산량을 획기적으로 늘릴 수 있다.


박지원이 안의현에서 물레방아를 제작하였다는 사실은 자신이 남긴 기록에서는 직접 찾을 수 없지만, 그의 둘째 아들 박종채가 아버지의 전기(傳記)로 쓴 『과정록』에서 확인된다.

 

‘아버지는 북경에 가셨을 때 농기구와 베틀 등 백성의 실생활을 편리하게 하는 기구들을 자세히 살펴보셨다. 귀국 후에 본떠 만들어서 국내에 통용시키고자 해서였다. 그러나 막상 생활이 어려워 시도해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안의현감으로 부임하게 되자, 눈썰미와 손재주가 있는 장인들을 가려 뽑아 양선[풍구], 직기[베틀], 용골·용미차, 수전윤연 등 여러 기구를 제조케 하여 시험해보셨다. 힘을 적게 들이고도 일을 빨리할 수 있어 혼자서 수십 명이 하는 일을 해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뒤 이 기구들을 본떠 만드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결국 국내에 통용되지 못하였으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기록으로 미루어 함양에 물레방아가 최초로 설치되긴 했으나, 민간에 바로 보급되진 않은 모양이다. 그 뒤 이 기구를 본떠 만드는 사람이 없어 국내에 통용되지 못하였다고 하니...


그런데 오늘날은 민속마을, 한옥마을을 표방하는 곳치고 물레방아가 설치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이고, 물레방아를 소재로 한 문학작품들(나도향의 물레방아,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이 옛날의 향수를 자극할 정도로 우리나라의 전통기구로 자리잡고 있다.


문익점 덕분에 목화솜이 들어와 백성들이 겨울을 따숩게 보내게 된 것처럼 박지원 덕분에 물레방아가 보급되어 사람과 소의 힘을 덜고, 일을 빨리 할 수 있게 되었으며 추억을 떠올리는 기구로 남았다. 이만하면 박지원의 노력이 헛되진 않은 것이다. 함양 상림에는 신라시대 최치원의 백성사랑이, 물레방아에는 조선시대 박지원의 실학에 근거한 애민사상이 깃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 함양아리랑 >

* 빙글빙글 돌아가는 물레방아 소리에 풍년이 오네

 함양 산천 물레방아는 물을 안고 돌고

 우리집 서방님은 나를 안고 돈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물레방아 소리에 풍년이 오네

 지리산 천왕봉은 백두대간 시작일세

 오도재에 올라보니 지리반야 좋기도 하네

 빙글빙글 돌아가는 물레방아 소리에 풍년이 오네

 위천 남계 맑은 물에 피리 망태 헤엄치니

우리 할매 나를 업고 상림 숲을 돌고 돈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물레방아 소리에 풍년이 오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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