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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그미 Aug 31. 2022

까마득한 벽 앞에서 버티며 성장한 시간들

청년도배사 이야기

아메리카노와 조각케이크를 좋아하는 청년 도배사 배윤슬은 2년간 수많은 벽들에 자신만의 정성스런 손길로 벽지를 바르는 도배사로 일해왔다. "청년 도배사 이야기"는 아파트 건설현장의 ‘도배’라는, 다소 생소한 분야에서 여성도배사로 일하면서 배우고 깨닫고 바라는 일들을 꾸준히 기록한 책이다.


배윤슬은 연세대학교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한 후 전공을 살려 사회복지사로 노인복지관에 취업을 하였다. 그러나 그녀의 이상과 다른 사회복지업무, 조직생활의 불합리 등을 이유로 2년만에 그만 두고 앞으로 무엇을 하며 먹고 살지 다양한 직업을 찾아보았다.


조직생활에 취약한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으면서, 매순간 마음 졸이지 않아도 되는 일. 그런 기준을 가지고 긴 시간을 고민하고 알아본 끝에 결정한 일이 바로 도배였다. 오래전부터 한 번 도전해보고 싶던 일이기도 했고, 나이가 들어도 정년 없이 계속 할 수 있는 기술직이란 사실에 매력을 느껴 도배사가 되기로 한 것이다. 이런 결정에는 '그런 일'을 하는 게 걱정되지 않냐는 주변의 우려섞인 질문에 의연하게 대처하는 부모님의 믿음과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에서 내로라하는 일류대학에, 취업률도 좋은 학과를 나와서 뜬금없이 공사장에서 도배일을 한다면 대부분의 부모가 말리고 나서지 않을까? 나라도 아마 그냥 믿거니~ 하고 내버려두진 못했을 것 같다. 그런데 배윤슬의 부모님은 오히려 다른 지인들에게 딸이 하는 일을 아무렇지 않게 말할 정도로 딸의 선택을 믿고 지지해줬다. 청년실업률이 높고, 취업이 힘들다고 아우성치는 요즘 세상에서 진정한 부모의 역할에 대해서도 한 번 더 생각해보게 하는 부분이었다.



그렇게 건설 현장에서 시작된 새로운 도전, 도배 일을 통해 만난 "또 다른 나의 이야기"는 술술 잘 읽힌다. 하지만 배윤슬이 도배사로 보낸 시간은 예상했듯이 그리 순탄치는 않았다.


"까마득한 벽 앞에서 버티며 성장한 시간들"이라는 부제처럼 낯설고 거친 환경에서 하나하나 배우고 익히고 깨우치는 과정들을 읽으며, 글을 통한 상상만으로도 힘들게 느껴졌다.



과연 버텨낼 수 있을까 스스로도 의심하던 그녀는 처음 도배를 시작할 때부터 이상만 좇지 않았고 현실과 타협해 단기적으로 목표를 잡아가며 2년을 버텼다. 그녀는 처음 도배에 발을 들이면서 '기술자가 되겠다', '돈을 많이 벌겠다'는 목표를 세우지 않았다. 딱 일주일만 해보자, 딱 한 달까지만 채워보자 그렇게 3개월, 6개월씩 늘려가며 버텼다. 장기적인 목표도 당연히 가지고 있었지만 조급해하거나 욕심내지 않았다. 그렇게 2년을 보내다 보니, 지금은 조금씩 현실과 이상의 차이가 줄어드는 것을 보며 즐겁게 일하고 있다고 한다.


아직은 수많은 도배사들 가운데 여전히 새내기 도배사인 그녀가 도배를 시작하고자 하는 누군가에게는 진흙길 위를 보다 쉽게 걸어갈 수 있게 해주는 조그만 돌, 박스 종이 정도의 작은 도움 정도는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또한 다양한 이유로 건설 현장 노동자들은 성평등이 실현되기 어려운 환경에서 일하고 있다 보니, 자신도 성차별을 많이 당하며 일하고, 불합리한 경험을 하고도 쉽사리 이야기하지 못하고 억울하게 넘어가는 경우가 허다한데, 내가 일하는 일터이기에 아주 조금의 변화를 위해서라도 노력하는 중이라고 한다. 건설 현장에서 성평등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아직은 희미해 보이지만 그래도 아주 조금씩 그 노력을 이어 가보려 한다고 당차게 소신을 밝힌다. 지속 가능하고 안전하게 일하고 싶다는 생각과 자신이 하는 일이 사회에서 부정적으로 인식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작지만 꾸준히 노력을 기울이다보면, 적어도 그녀가 만나는 사람들의 인식은 바꾸어 나갈 수 있다고 믿으면서.



이런 의미 있고 소박한 바람을 가지는 한편 자신의 일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흥미로 다가서는 사람들에게는 단호한 면도 있다.


주변 사람들로부터 '나도 도배나 해볼까?'라는 말을 듣곤 하는데, 기술자가 되어 성실하게 일한다면 많은 급여를 받을 수 있고 직장 상사 없이 자유롭게 일을 할 수도 있지만, 그 이상적인 삶에 다다르기까지 포기해야 할 것들이 아주 많고 그것을 힘들게 이겨내야만 한다는 이야기를 굳이 하지 않기도 한다. 왜인고 하니, 누군가의 직업을 쉽게 이야기하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그 이상과 현실의 차이를 공들여 설명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밝히는 부분에서 왠지 모를 통쾌함이 느껴졌다.


그녀가 도배를 시작한 것과 마찬가지로 언젠가는 또 다른 일에 도전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그저 새로운 현장을 만나는 것이 즐겁고 도배하는 게 좋아 자신의 경험을 여러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 쓴 '청년도배사 이야기'는 책을 다 읽은 뒤에도 다시 들춰보며 반추하게 된다. 그녀의 성장이야기를 읽으며 나역시도 성장을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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