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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그미 Sep 18. 2022

말 한 마디가 중한겨~

9월 텃밭일기 3

사실 텃밭에서 가을농사가 시작되는 시기는 8월이다. 이때 이미 무랑 배추랑 당근이랑 심고, 참깨 털고, 고추 막바지 작업을 하고, 가을 상추도 심어서 가꾸는 게 보통이다.


고구마순을 장마가 시작되는 7월 초에나 심을 만큼 느림보인 나는 가을농사 또한 늦다. 9월 14일에야 딸이 베란다 화분에 씨앗 뿌려 키운 상추 모종 네 주를 옮겨심었고, 풀도 맸겠다 깔끔해진 빈땅을 그냥 두기 아까워서 9월 15일에 딸에게 남은 상추 씨앗을 얻어다 적상추, 청상추를 심었다.

흠~ 그래도 빈땅이 있네? 우짜지?  

하다가 올 봄에 뿌리고 남은, 엄마가 주신 시금치씨앗과 상추씨앗이 생각나 그것도 가져다가 9월 17일 아침에 부지런히 심었다. 이거 잘 자라면 요새 금값인 시금치랑 상추를 무한공급받겠구나~~ 하고 꿈에 부풀어서.

꿈은 야무지게 꾸고 있지만, 과연 기대만큼 잘 자랄지는 두고봐야겠다. 같은 씨앗이라도 봄이냐, 가을이냐 심는 시기에 따라 발육이나 수확량이 달라지기 마련이다. 시금치는 봄에 잘 자라줘서 이웃에 나눔을 하고도 남아돌다 결국 동이 나서 뽑아냈고, 상추는 제대로 발아가 안 됐더랬다. 가을엔 어떻게 또 희비가 갈릴런지 기대가 된다.

어제는 텃밭 가는 길에 신기한 구경을 했다.

대박횟집이라고 텃밭으로 가는 오솔길 입구에 있는 식당이 한동안 영업을 안 하더니, 얼마 전부터 싹 철거하고 뚝딱뚝딱 건물을 짓고 있다. 뭘 만드시나 궁금해서 일하시는 분에게 여쭈니, 3층 정도 되는 상가주택을 짓는다고 하셨다. 터닦기에서부터 시작해 기둥 세우고 철근 올리고 하며 한층 한층 올라가는 모습을 보며 텃밭을 오가는데, 어젠 포크레인 하나가 일하기 위해 트럭에서 막 내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 포크레인 내려오는 모습이 진짜 신기했다.

9월 첫날 철원 DMZ생태평화공원 트래킹에 앞서 직원이 안내하는 셔틀차량을 타고 군사분계선까지 갔을 때, 철책 앞에서 무지 커다란 포크레인이 공사를 끝내고 트럭에 올라타는 모습을 봤을 때도, "우와~~ 신기하다!"를 연발했더랬다. 참 촌스런 아줌마다. 그런데 이번엔 거꾸로 내리는 모습이었다.


어차피 텃밭으로 가는 길을 막아서 가지도 못하던 차에, 신기한 구경을 하다가 사진으로 찍어봐야겠다 하구선 폰을 들이밀고 찍고 있자니 공사장쪽에 있던 분이 내 옆으로 헐레벌떡 뛰어오셨다.


"저 혹시 이쪽 땅이랑 관련된 분이신가요?"


내가 사진 찍어서 민원이라도 제기하려고 그런 줄 알고 달려오신 모양이었다.


"아니요~ 포크레인이 트럭에서 내리는 모습이 신기해서 구경하는 건데요."


손사래를 치며 서둘러 답을 하니까, 껄껄 웃으시며 이제 막 트럭에서 땅으로 안착한 포크레인 기사님에게 말씀하신다.


"아유~ 형님이 포크레인 운전을 하도 잘 하셔서 구경하고 계셨대유. 아침부터 미인한테 칭찬도 듣고 기분 좋게 일하시겄어유~ 형님!"


그러시는 거다. 눈꼽만 떼고 어시부시한 채로 텃밭을 가던 나는 졸지에 '미인'으로 등극한 채 몸둘 바를 몰라하는데, 인상 좋으신 포크레인 기사님이 하얗게 웃으시며 한 마디 얹으신다.


"흐미~ 이거 할 때마다 심장이 쫄깃쫄깃혀유~ 오금도 팍팍 저리고."


그렇게 공사장에 계신 분들과 한바탕 웃고 인사한 뒤 헤어졌다. 왜 사진 찍냐고 승질내며 불미스러운 상황이 연출됐을 뻔도 했건만 넉살 좋고 말솜씨 좋은 아저씨덕분에 기분좋게 마무리가 되었다. 말 한 마디가 이렇게도 상황을 다르게 만들 수 있구나 싶으면서 문득 생각나는 일이 있었다.

2010년 7월 대청호자연생태관에 아이들과 함께 구경갔다가, 딸이 우연히 영상관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흘러나오는 현장을 발견하고는 내게 알려주었다. 사무실에 가서 불이 나는 것 같다고 말하고, 사무실에 있던 여직원과 함께 영상관 안으로 들어가보니, 한쪽 구석탱이에서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놀란 남편이 가까운 화장실로 가서 밀걸레자루가 들어있는 통을 비우고 거기에 물을 받아다 들이부으며 몇 번을 왔다 갔다 하면서 겨우 불을 껐다.(여직원은 어쩔 줄 모르고 우왕좌왕) 그런데 불이 꺼진 뒤에야 온 남자직원이 우리가 불 꺼준 것에 대해서 고맙다는 말 한마디도 없이 오히려 우리에게 버럭 화를 내는 것이다. 아니 이게 대체 머선 129?

연기가 이렇게 자욱한데도 화재경보기는 끝내 울리지 않았다


그때 한창 아이들 크는 모습을 디카에 담던 때라, 불이 났던 현장을 기록삼아 디카로 찍었는데, 그 남자직원은 무슨 이유때문인지 불 다 꺼진 현장에 뒤늦게 와서는 우리 보고 왜 사진 찍냐고 소리를 질렀던 것이다. 우리는 좋은 일 하고 졸지에 화재현장이나 찍는 몰지각한 사람이 되어버렸다.ㅜㅜ

열심히 불 끄고 이거 찍었다가 남직원에게 욕먹음


집에 돌아오는 차안에서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속상해서 대청호자연생태관 홈페이지나 대전 동구청 민원게시판에 황당한 이 사건의 전말에 대한 글을 올릴까 하다가(남직원의 불친절한 응대에도 화가 났지만 무엇보다 그렇게 불이 나서 연기가 피어나는데도 건물 안에서는 화재경보가 울리지 않았다. 이게 말이 되는 상황인가? 다중이용시설에다, 어린이들이 특히 많이 찾는 곳인데), 괜히 그 남자직원한테 못할 짓 하게 될까봐 그만 두었다.


"그 직원이 뭐라 했든간에 우리 가족은 오늘 진짜 좋은 일 했으니 그걸로 됐다. 말 한 마디로 천냥 빚도 갚는다는데, 그 직원은 말 한 마디로 직장 날아갈 뻔한 걸 우리가 참아준다!" 하면서 속상한 마음을 훌훌 털어냈다. 그러나 10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 일을 떠올리니 몹시 불쾌하고 화가 난다. 지금같았으면 그 직원을 그냥 두진 않았을 것 같다. 그땐 남편이나 나나 너무 착했던 모양이다. 말 한 마디가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닫게 된 사건이었다.



텃밭 가는 길에 마주친 공사장 관계자분의 기분 좋은 말 한 마디에 하루종일 즐거운 기분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하며, 누구에게나 어떤 말도 함부로 툭툭 내뱉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다시금 해보는 아침이다.

이 글을 새벽에 써두고, 오늘 아침 텃밭에 가다보니 포크레인으로 바닥다지기 공사를 다 끝낸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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