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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그미 Sep 19. 2022

언니 없이는 못 살아!  

아무튼,언니

구남매 장손의 첫째로 태어난 나는,

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언니'라고 부를만한 사람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 남들이 세상 쉽게 부르는 '언니'라는 표현이 내 입에서는 쉽게 나오지 않았다. 학교를 다닐 때는 한 학년 위의 선배에겐 비교적 자연스레 '언니'라는 호칭을 썼지만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는, 직급이나 00씨 00님으로 부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사회에서 만난 사람을 '언니'라고 부를 일이 거의 없었다.


식당에서, 미용실에서, 가게에서, 터미널이나 기차역에서,  심지어 길 가다 처음 만나는 여자에게도, 자기보다 뻔히 어려보이는 게 확실한데도 '언니' 소리를 쉽게 하는 사람들이 많은 세상에서 나는 '언니' 소리가 결코 쉽지 않았다. 나는 진짜 '언니' 같이 느껴지는 사람에게만 '언니'라고 부른다. 내가 언니라고 부르는 사람은 그야말로 '찐언니'인증이다.


그런데 여기, 중앙경찰학교에서 만난 언니들을 필두로 세상에서 만난 언니들이 아니었으면 나의 세계를 온전히 마주하지 못했을 거라며, 언니를 내 인생의 조력자이자 구원자로 추앙하는 이가 있으니...

바로 <아무튼, 언니>의 저자 '원도'이다.

가끔 쓰고 적당히 말하고 자주 잠드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원도는 본명이 아니라 필명이다. 독립출판물을 입고받아 판매하고 있는 서점 이후북스에서 운영하는 출판사 '이후진프레스'에서 2019년 처음 나와 경찰관들의 삶을 통해 우리 사회의 맨얼굴과 인간에 대한 성찰을 보여주면서 세간에 화제를 불러일으킨 <경찰관속으로>가 원도 작가의 첫 책이다. 이 책을 세상에 내면서 직업의 특성상 본인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만든 필명이 아닌가 한다.


원도 작가의 두번째 책 <아무튼, 언니>는 아픈 오빠로 인해 자신을 드러내지 못한 채 내향적인 학창시절을 보낸 그가 나이차 많은 친언니를 비롯해 학교와 사회에서 만난 수많은 언니들과 그들이 보여준 새로운 세계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책에서는 <경찰관속으로>에서 편지의 수신자이자 독자와의 연결고리였던 '언니'를 이야기의 중심으로 내세웠다. 눈물을 동반하지 않고도 상처를 드러내는 법과 눈물을 보일 땐 부끄러움 없이 펑펑 울며 기대는 법을, 시기나 질투 없이 진심으로 누군가를 축하하는 법을, 과거와 미래에 얽매이지 않고 오롯이 현재를 누리는 법을 가르쳐준 세상의 언니들.

다정언니 웹사이트 by 온아

작가는 아픈 오빠를 둔 동생으로서 짊어질 수밖에 없었던 마음의 무게를 덜어내준 것도, 중앙경찰학교 교육생 시절부터 경찰관으로 살아가는 지금까지 아낌없이 지원하며 든든하게 옆을 지켜준 것도 모두 언니라고 고백한다. 학교에서, 직장에서 따뜻한 목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불러줄 뿐 아니라, 자신을 믿어주고 끌어주고 응원해주는 언니들을 만난 덕분에 전과 다른 삶을 살게 되었다고 이야기하는 작가는 한없이 다정한 언니들을 통해 확장된 세계의 경험이 얼마나 귀하고 의미 있는 일인지, 언니와 나 그리고 우리의 연대가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말한다.

언니는 이처럼 언제든 편히 기댈 수 있는 든든한 존재이면서 한편으로는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한국사회의 억압을 온 몸으로 겪어 가는 사회적 약자이기도 하다. 경찰관인 작가가 사건 현장과 일상에서 경험한 언니들의 모습에는 한국사회에서 운이 좋아 살아남은 여성들의 안타까운 모습이 보인다.


운 좋게 내 부모는 나를 낙태하지 않았고, 운 좋게 임신 때문에 학업이 가로막히지도 않았고, 운 좋게 범죄의 표적이 되지 않았거나, 표적이 되었어도 목숨만은 겨우 부지한 덕분에 살아남은 여성인 나는 내가 잘 나서, 지금껏 성실하게 노력해서 일구어낸 생이 아니라, 단지 운이 좋았을 뿐이기에 살아남은 것이다.

다정언니 웹사이트 by 온아


작가는 경찰관으로 일하면서 많은 여성 피해자를 만났다. 폭력을 당하는 여성, 스토킹을 당하는 여성, 불법 촬영을 당하는 여성, 당하고 당하다 결국 죽임까지 당하는 여성. 바닷가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여성의 시신이 떠오른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여성은 신생아부터 고령의 노인까지 모두 해당된다. 운 없는 '사람'이 아닌 운 없는 '여자'가 아무리 많이 나타난다고 한들 세상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들은 진짜로 그저 운이 없었던 걸까? 최근 일어난 신당역에서 살해된 스토킹피해 여성의 사건도, 사실 한국의 모든 여성에게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남일같지 않은 현실이다.  


진작에 모래성처럼 무너졌을지도 모를 생을 필사적인 용기를 내어준 여성들 덕분에 유지할수 있었던 것이 '내가 가진 유일한 운, 아주 운수대통한 운'이라고 힘주어 토로하는 작가는 대한민국에서 여자로 살아가는 언니들에게 보내는 애정과 존경의 눈짓이자 서로가 서로의 운이 되어 주려는 뜨거운 연대의 몸짓으로 열두 편의 글을 썼다. 그 가운데 가장 뜨거운 울먹임이 느껴졌던 부분을 옮겨본다.



대한민국에서 여자로 살아가는 언니들에게, 그리고 우리의 뒤를 따라올 동생들에게 진심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조심히 가. 그럼에도 우리는 살자. 어떻게라도. 조심히 오고 가자. 잘 가, 언니, 다들.
조심히 가, 멀리 안 나갈게. 조만간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보자. 조심히 가. 도착하면 연락해.


-   '조심히 가' 중에서

다정언니 웹사이트 by 온아


경찰관 원도를 넘어 쓰는 사람 원도로서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는 평을 받고 있는 이 책을 덮고 나서 나는 작가의 전작 '경찰관 속으로 : 언니에게 부치는 편지'를 찾아 읽기 시작했다.



* 글에 올린 언니 그림은 온아님 작품입니다.

  사용을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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