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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그미 Nov 15. 2022

달리기와 죽음

은행일 보려고 아침부터 뛰었다.

지난 주 금요일에 갔어야 했는데 급한 다른 일들부터 하다 보니 갈 시간이 안 났다. 요즘 은행 예금이율이 높아서 손님들이 바글바글 밀리는 바람에 늦게 가면 아예 번호표도 못 뽑는다기에 최대한 빨리 가려고 달린 것이다.


달릴 때면 1분 1초가 너무나 생생해서 삶을 그대로 통과하는 기분이다. 다시 돌아갈 수도, 앞당겨 살 수도 없는 시간을 성실히 꼬박 살아내는 것만 같다. 이때 수 많은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스친다.  


동시에 내가 딛고 있던 자리는 차례차례 내 뒤로 늘어선다. 내가 마주한 풍경을 뒤로 하지 않는다면 달린다고 말할 수 없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어떤 것도 붙잡아 둘 수 없는 것은 달리기에서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다.

살아간다는 감각도 이와 비슷하게 느껴진다.

산다는 건 과거를 뒤로 하고 시간 속을 달리는 일이다. 그렇다면 영원히 붙들지 못하는 소중한 시간들은 어떤 식으로 두고 가야 하는 걸까?


이웃님의 글에서 물리학자 김상욱 교수님이 죽음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큰 깨달음이 있었다.


우주를 관찰해보면 살아 있는 것은 거의 없기 때문에 "죽음은 우주의 가장 보편적인 상태인 죽어 있는 상태로 가는, 더 자연스러운 상태로 가는 것"이라고 하는 부분이다.


손민지 작가도 교수님이 말씀하시는 이 부분을 너튜브 영상으로 듣고는 충격과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작가는 이번에 노랑이를 떠나보내면서 오랜만에 그 말을 떠올렸다. 그리고 자신에게 일어나는 수많은 이상한 일들을 물리학의 관점에서, 조금 멀리 떨어져서 보고 싶어 <떨림과 울림>이라는 책을 읽게 됐다. 김상욱 물리학자가 이야기 하는 죽음은 이랬다.

"죽으면 육체는 먼지가 되어 사라진다. 어린 시절 죽음이 가장 두려운 상상이었던 이유다. 하지만 원자론의 입장에서 죽음은 단지 원자들이 흩어지는 일이다. 원자는 불멸하니까 인간의 탄생과 죽음은 단지 원자들이 모였다가 흩어지는 것과 다르지 않다."


문득 노랑이가 사라진 그날이 후회로 사무칠 때마다, 노 랑이가 그리워질 때마다 작가 또한 아주 작은 원자들의 모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됐다. 언젠가는 나도 죽어서 사라질 것이고, 우리 둘 다 똑같이 원자 단위로 흩어져 또다시 먼 여행을 할 것이다. 그런 상상을 하면 조금 덤덤해진단다. 노랑이가 덜 가여워져서.



* 노랑이 : 불법 고양이 사육장에서 유기된 고양이로 작가가 길냥이 집사가 되어 이름을 붙여주고 1년간 돌본 동네 고양이다. 상태가 나빠져 해외직구한 영양제도 먹이고 신경썼으나, 구내염이 심해지던 어느날 사라짐. 단지 작가에게 인사하기 위해 힘든 몸을 이끌고 나오던 애착 강한 고양이. 고양이들은 몸이 약해지거나 마지막 순간이 오면 아주 깊숙한 곳에 몸을 숨기는 습성이 있다고 한다.


- 고양이별까지 달려갈 수 있다면 / 손민지 작가의 [달리는 여자, 사람입니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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