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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그미 Aug 05. 2023

이슬아에게 배운다

날씨와 얼굴 1

내가 사는 도시의 남쪽 끝에 있는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 '날씨와 얼굴'은 내가 좋아하는 작가 이슬아의 칼럼집이다.


도시의 북쪽 끝에 사는 내가 남쪽 끝까지 차로 40분을 달려서 간 이유는 새로 나온 책들 가운데 읽고 싶은 도서를 그 도서관에 희망도서로 신청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이슬아의 '날씨와 얼굴'은 내가 희망도서로 신청한 책이 아니다. 희망도서를 빌린 후, 여기까지 온 김에 또 빌려갈 만한 다른 책이 있나~ 하고 도서관의 신간코너를 살피다가 이슬아의 이름에 끌려서 덥석 뽑아낸 책이다.  




이슬아 작가를 애정한다. 올해 들어서만 《끝내주는 인생》 《가녀장의 시대》 《아무튼, 노래》를 읽었고, 작년까지 《부지런한 사랑》 《깨끗한 존경》 《월간 이슬아 수필집》 《나는 울때마다 엄마 얼굴이 된다》를 읽었다. 조만간 인터뷰집 《창작과 농담》 《새 마음으로》도 읽을 계획이다.


믿고 보는 작가 이슬아이기에 《날씨와 얼굴》이란 언뜻 이해하기 힘든 제목에, 표지도 그닥 눈에 띄는 책이 아님에도 선뜻 책장에서 뽑아내어 빌려왔다.



책 제목이 왜 이런고 하니,

얼굴을 가진 우리는 가속화될 기후위기 앞에서 모두 운명공동체이고, 날씨의 지배를 받는 지구 생명체 중 특히 유심히 바라본 얼굴들을 이 책에 초대하고 싶어서라고 한다. 여기서 얼굴은 인간뿐 아니라 비인간 동물의 얼굴도 포함하며, 총 3부로 구성된 책에서 동물의 얼굴은 1부에 나온다. '동물에 대해 잊어버린 것'이란 이름으로. 오늘은 1부에 나온 이야기들 가운데 인상깊었던 내용을  소개해본다.



전 세계 평균기온을 상승시키는 데 분명히 영향을 끼친 공장식 축산은 폭력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인류가 동물에게 겪게 해온 이 거대한 폭력을 모르지 않는다 해도 삶에는 신경 쓸 일이 아주 많다. 그래서 온갖 문제에 고단해진 우리는 축산업의 폭력성에 관심을 갖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자신의 해방과 동물의 해방이 어쩌면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슬아는 그들의 어깨 너머로 비거니즘을 배운다고 한다. 비거니즘은 동물을 착취해서 얻는 식품과 제품을 최대한 소비하지 않으려는 운동이다. 완벽하지 않더라도 그 방향 쪽으로 움직이며 생활하는 이들을 '비건 지향인'이라고 부른다. 그녀에게 비거니즘은 어떤 착취에 더 이상 일조하지 않겠다는 다짐이자, 동물과 인간이 관계 맺어온 방식을 개선하고 싶다는 의지다. 이것은 기후위기에 대한 입장이기도 하다. 육식을 줄이는 것만으로는 다가올 기후재난을 해결하기에 충분치 않지만, 현재의 식습관을 티끌만치도 바꾸지 않는 채로 찾는 대안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녀의 입장이다.


작가 강남규는 저서 『지금은 없는 시민』(한겨레출판, 2021)에서 '시스템주의자'와 '의인'에 관해 이야기한다. 시스템주의자는 "어떤 위기 상황을 극복할 책임은 시스템에 있으니, 자신에겐 뭘 요구하지 말라”고 요구하는 사람이다. 그 반대편에 있는 의인은 “누구도 요구하지 않았지만 위기 상황에서 누구보다 앞서 행동하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의인의 이야기를 전해 듣길 좋아하는 동시에 시스템주의자처럼 말하길 좋아한다고 강남규는 통찰한다.


그가 주목하는 건 시스템주의자와 의인 사이의 시민들이다. '시스템이 바뀌어야 한다'는 말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공백의 영역에 시민들이 자리한다. 의인처럼 해낼 여유가 없는 시민들도 문제적인 시스템을 바꾸는 일에 동참할 수는 있다. 선의를 모으고 책임을 나누고 서로의 부담을 덜어줄 수도 있다.


서로에게 좋은 변화의 계기가 되는 시민의 존재와 그들 사이의 연쇄작용을 희망한다는 이슬아는 성실하고 따뜻한 강남규 작가의 사유를 동물권과 기후위기를 마주하는 우리의 태도에도 적용해 본다.


축산업이 저절로 바뀔 때까지 기다리는 시스템주의적 세계에서는 이전과 같은 갈등과 고통이 영원히 되풀이될 것이다. 그렇다고 최전선에서 환경운동과 동물권운동을 전투적으로 해나갈 용기와 여력이 모두에게 있는 것은 아니다. 양극단처럼 보이는 둘 사이에 무수한 시민들이 있다. 나 역시 그런 시민이고 이 책을 펼친 당신도 아마 그런 시민일 것이다. 시민이 구매할 것으로 예상되므로 고기는 생산되고, 시민은 고기를 먹고, 같은 이유로 또 고기가 생산된다.


공장식 축산은 시민들의 메뉴 선택과 상호작용한다. 이 사슬을 끊는 결정적인 행동이 불매다. 동물의 살과 뼈와 젖에 최대한 돈을 쓰지 않는 것. 이 시도는 결코 미미하지 않다. 우리는 어디에나 있으니까. 나의 꿈은 비인간 동물을 착취하지 않고도 무탈히 흘러가는 인간동물의 생애이다.


우리 모두가 얼마나 굉장한 개인이냐면, 개인이 소비하지 않기로 한 선택들이 모여 기업과 정치와 과학을 들썩들썩 움직인다. 자신의 선택이 모두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믿음이 자아도취적으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보다 나쁜 건 자신의 선택이 아무한테도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믿는 자기기만이다. 전 지구인의 총동원이 필요한 이 시대에, 당신은 어떤 것을 그만두고 싶은지 궁금하다.


나에게 없는 지혜가 당신에게 있을 것이다. 우리는 분명 서로에게 배울 수 있을 것이라고 낙관하는 이슬아 작가의 긍정성에 마음이 기운다.​


책임감이란 무엇인가?


나로 인해 무언가가 변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내가 세계에 미치는 영향력을 과소평가하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비건 지향 생활을 지속하면서 이슬아는 '어쩔 수 없다'는 말을 아끼게 되었다. 세계가 빠른 속도로 나빠지고 있는 와중에도 어떻게든 해볼 수 있는 일들이 아직 많기 때문이다. '책임감'의 영어 단어 'responsibility'는 'response'와 'ability'의 합성어다. '응답하는 능력'이라는 의미다.


가축 동물들의 죽음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응답하면 좋을까. 인간에게는 전염되지 않는 것에 안심하거나, 고기 가격 상승을 염려하는 일 말고 또 어떻게 다르게 응답할 수 있을까. 우리의 응답은 현재의 동물뿐 아니라 미래의 동물에게도 꾸준히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축산업과 낙농업에 갇힌 동물을 구체적으로 알아감으로써 시작되는 일이다. 마찬가지로 동물인 우리 자신에 대한 공부이기도 하다.


동물의 수를 셀 때 마리 대신 '목숨 명'으로 치환해 명으로 세는 것.(사람의 수를 셀 때 쓰는 명은 '이름 명'이다) 목숨 '명'은 모든 살아 있는 존재를 아우르는 단위로 확장할 수 있다.


또한 살아있는 동물을 고기로 부르는 종차별을 지양하기 위해  물고기를 '물살이'라 부르자고 한다. 물에 사는 무수한 생명체를 식용 대상으로 한정짓지 않는 말이다. 우유 대신 소젖, 달걀 대신 닭알로 표기함으로써 착취한 대상의 실체가 보이게끔 의도하는 용어들을 쓰는 것은 공장식 축산을 은폐하지 않게 해준다.


"소 열 마리가 뜨거운 축사 속에서 고통받고 있다."와


"소 열 명이 뜨거운 축사 속에서 고통받고 있다"는


단 한 음절이 달라졌음에도 우리에게 주는 느낌이 사뭇 다르다. 동물을 볼 때, 그 동물을 세는 단위 언어가 달라짐으로 해서 생겨나는 의식의 전환을 느끼며 나는 다시금 이슬아에게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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