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 광주에서 그 사건이 있었을 때 고모와 삼촌이 광주에 살고 계셨어요.
당시 대학생이던 삼촌은 너무 무서워 밖에 나갈 엄두를 못 내신 채 건물 옥상에 숨어 있으셔야 했지만, 세 아이를 낳아 키우시던 고모는 시민군을 위해 밥과 반찬을 해서 나르셨다지요.
"오메~ 말도 마라. 시상이 난리도 아니었재. 그래도 그 와중에 도둑 든 집 하나 없었시야."하시던 고모의 당당한 표정이 기억납니다.
아빠는 동생 찾으러 간다고 해남에서부터 오토바이 타고 가시다 영암 풀치재 너머에서 미끄러지며 사고가 나 오토바이가 망가지자, 오토바이를 냅두고 지나가는 차 얻어타기도 하고 중간중간 걸으며 광주까지 겨우 가셨답니다. 그런데 광주 초입에서 군인들이 총 들고 못 가게 막아서는 바람에 삼촌은 만나지도 못하신 채 집으로 되돌아오셔야 했지요.
국민학교 2학년이었던 저에게도 뚜렷한 기억이 하나 있습니다. 1980년 5월 전국에 비상계엄령이 내려진지도 모른 채 집에서 학교까지의 십리길을 터덜터덜 걸어가고 있었어요. 학교에 거의 다갈 무렵 파출소가 있는데, 그 앞에서 붉은 글씨 가득한 현수막을 두른 버스 하나에 동네 청년들이 총대를 멘 채 우루루 타고 광주사람들 구하러 간다고 소리치던 모습을 보고 와락 겁이 나고 놀랐답니다. 이상하게 주변에 사람이라곤 하나도 안 보이고, 그 거리에 저밖에 없었어요. 저는 그때 학교를 일찍 가서 여덟 살의 나이였어요. 어린 새가슴이 벌렁벌렁하는 무섬증을 누르고 학교에 도착하니, 교문이 굳게 닫힌 채 교문 철창 너머에서 수위 아저씨가 당분간 학교 오지 말라고, 집으로 얼렁 돌아가라고 조용히 엄포를 놓으시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때 광주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한참 뒤, 8년의 세월이 흐르고 고등학생이 된 1988년에서야 알게 됐어요. 직접 그 일을 겪었던 사람들도 혹시나 사실을 말했다가 잡혀갈까봐 쉬쉬하며 함부로 진실을 말하지 못하던 세상이었습니다.
아무리 얘기해도
눈 닫고 귀 닫은 사람들에게
진실을 알려주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아무리 얘기해도』는 5·18민주화운동을 다루는 만화지만, 작품의 배경은 1980년 5월이 아닌 2020년 서울의 모 고등학교에서 시작합니다. 평범한 고등학생 주인공은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위에 참여했던 사람이 북한 특수부대 출신이라는 거짓주장을 담은 "광수사진"을 접하고 이를 친구들과 돌려 보다가 담임선생에게 꾸지람을 듣습니다.
문제의식을 느낀 담임선생은 수업시간에 5·18민주화운동이 일어나게 된 배경과 당시 투입되었던 계엄군이 저지른 잔혹한 만행, 지금까지도 학살을 둘러싼 진실이 명확하게 규명되지 않는 문제점 등을 조목조목 설명하지만 하품을 하며 듣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니, 그닥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일베"로 오해하는 친구가 문제라고 생각하죠.
작품 해설에서 박강배 광주문화재단 정책기획실장은 <지금 광주에 대해 말해야 할 것들>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무리 얘기해도』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역사 연구자나 5·18민주화운동 관계자가 아니라 이 사건에 대해 잘 모르는 젊은 세대를 독자로 상징한 작품이라는 점을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이 만화가 1980년과 현재를 교차시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책은 1980년 5월 광주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현재 어떤 세력에 의해 5·18민주화운동이 왜곡되고 있으며, 이러한 행태가 왜 반복되는지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터무니없는 가짜뉴스가 판을 치고, 많은 이가 이를 모르는 척 외면하는 현재의 세태는 40년 전 계엄군이 저지른 잔혹한 행위에 다수가 눈감았던 일과 다르지 않음을 고발하는 것이다. -
주인공 학생의 비뚤어진 생각은 광주의 진실이 제대로 역사화되지 않으면 어떻게 왜곡되어 확산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는 '일베' 또는 그 동조자라는 극단적인 예로 제시되지만 우리들 역시 진실을 가리려는 세력의 모략에 감염될 위험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이런 불편한 진실은 작품 속 인물들이 지니는 여러 차원의 모습과 겹쳐지며 더욱 증폭되지요.
작가는 모든 사람에게 다차원의 본성이 있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5·18민주화운동에 북한군이 개입했다는 가짜뉴스를 퍼뜨리는 노인은 거리에 버려진 쓰레기를 줍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5·18민주화운동의 의의를 설파하던 담임선생은 지하철 임산부석에 앉아가는 실수를 저지르기도 합니다. 주인공은 그런 모습을 보며 자신이 세상을 보는 방식이 맞다는 믿음을 더욱 강화하는 근거로 삼습니다.
하지만 세상에 도덕적으로 완전한 사람은 없을뿐더러 하나하나의 행동과 정치적 태도가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이런 복합적인 상황에서 우리가 최종적인 판단의 근거로 삼아야 할 것은 과연 무엇인가 하는 점이에요. 작가는 그러한 질문과 자신의 답변을 작품 전반을 통해 제시하고 있답니다.
1995년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어 전두환, 노태 우 등 92명이 내란 및 내란목적살인죄 등으로 처벌받았고, 1997년 국립 5·18민주묘지가 설치되었으며, 2002년 광주민주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이 제정되는 등 역사를 바로 세우려는 노력은 이어졌고 그에 따르는 성과 역시 있었습니다. 그러나 40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죽은 전두환을 비롯한 쿠데타세력과 이에 동조하는 극우파 때문에 유가족들과 항쟁의 참여자들은 계속해서 고통받고 있는 현실입니다.
이는 가해자들과 5-18 민주화운동을 의도적으로 왜곡하려는 세력에게 일차적 책임이 있고, 이러한 사태를 방치하고 관심을 두지 않는 보통의 사람들에게도 일말의 책임이 있음을 '아무리 얘기해도'는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작가가 '아무리 얘기해도'를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마지막 장면에 잘 담겨 있다고 해요. 희생자의 무덤 앞에 주저앉아 흰 국화꽃을 들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할머니의 모습은 지금까지도 진상규명이 이루어지기는커녕 왜곡과 조롱이 판치는 세태와, 이를 방치한 우리를 돌아보게 합니다.
ㅡ 말그미의 책레시피
우리 역사에서 여전히 가슴아픈 과거로 남아있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실을 제대로 알고 싶으신 분이라면, 영화나 일반 책은 다가가기 어려운 분이라면 그림책으로 된 광주이야기를 접해보시는 건 어떨까요?
역사를 흐리는 가짜뉴스의 해악과 비뚤어진 역사인식에 대한 생각을 짚어보게 해주는 그림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