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어머님께서 어버이날 아침에 함께 식사를 마치신 뒤 방으로 돌아가시다가 갑작스레 뇌경색이 오면서 쓰러지신 뒤 응급실로 실려가셨어요. 중환자실로, 일반병실로 옮겨다니시느라 간병에 정신이 없어 텃밭관리를 잘 못하고 있던 때였지요.어머님 상황이 조금 나아져서 그동안 방치해둔 텃밭의 잡초를 뽑으러 간 날이었어요.
두 개의 아파트 단지 사이로 난 오롯한 길을 따라 그 옛날 호랑이가 꼬리로 비질을 하며 거닐던 숲길을 내려가 텃밭을 위에서 내려다볼 수 있는 지점에 이르러보니, 뭔가 굉장히 깔끔한 느낌이 든다 싶더라구요. 찬찬히 살피니 농장관리인께서 텃밭 주변 예초작업을 하셨더군요. 하루 전 몹시도 햇빛이 뜨겁던 날에 하신 모양이었어요.
텃밭 쉼터에 도착해보니, 늘 두고 쓰던 호미들이 한 개도 안 보여서 삽으로라도 풀들을 파서 없애야겠다는 생각으로 농기계 보관함에서 튼튼한 삽 하나를 들고 밭으로 들어섰어요.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이죠?
세상에나~~~!!! 며칠 전까지 심란하게 밭을 점령했던 수북한 풀들이 다 사라지고 없는 거예요. 텃밭 관리인이 밭둑길 주변을 예초하시면서 제 밭의 풀까지도 모두 제거해주신 거였어요.
삽으로 풀밭을 뒤집어 엎어서 풀을 제거하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라 단단히 마음 먹고 갔는데, 손 댈 것 없이 깔끔해진 풍경을 보니 마치 기적같았답니다. 누군가의 배려로 인해 생긴 일상 속의 작은 기적이 우리의 하루를 행복하게 만들어주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바로 이런 기적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을 오늘 소개하려고 합니다.
박완서 작가님은 잡문 하나를 쓰더라도 정직하게,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진실을 말하겠다는 다짐으로 쓰고 고치고 쓰길 반복하셨다고 해요. 생전의 박완서 작가님이 지니신 글에 대한 신념이 오롯이 담긴 글들 가운데 1970년부터 2010년까지 집필한 660여 편의 에세이 중 고르고 골라 대표할 만한 35편의 글을 한 권에 담은 책 <모래알만 한 진실>이 바로 그 책입니다. 2020년에 박완서 작가님 돌아가신 지 10주기 기념 에세이집으로 묶여 나왔어요.
이 책의 '유쾌한 오해'라는 글에서 작은 기적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답니다. 작가님이 지하철 3호선에서 옆자리에 앉은 뚱뚱한 중년 남성에 대해 품었던 생각이 비호감에서 호감으로 극적으로 반전되는 내용을 담고 있어요.
자리 앞에 서있던 청년을 밀치고 잽싸게 자리를 차지하려고 엉덩이를 들이민 것부터 시작해, 작가님의 치맛자락을 깔고 앉았으면서도 무신경하게 있다가 나중에 알고서도 미안하단 말 한 마디가 없고, 끈끈한 팔로 양쪽 사람을 밀치는 듯한 자세도 불쾌하고, 큰 소리로 하품까지...
전혀 남 생각 하지 않고 안하무인격인 남자에게 속으로 막 궁시렁댔는데, 나중에 보니 어린 딸과 함께 지하철에 탄 젊은 임산부에게 흔쾌히 자리를 내주더랍니다. 작가 자신은 그 젊은 여자의 맑은 피부와 화려한 모자에만 신경 쓰느라 만삭인 배도, 옆에서 손잡고 있는 세 살쯤 되보이는 딸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는데, 그 중년 남자는 한눈에 알아보고 자리를 양보한 것이죠.
그 순간 작가님은 자신의 자리를 내줌으로써 세 식구를 앉힌 그 중년남자를 다시 보게 됩니다. 여지껏 뻔뻔하고 무신경한 사람이라며 미워하고 오해했던 마음을 풀고 보니, 듬직하고 근사해 보이는 사람이었어요. 게다가 남자는 자신이 자리를 양보한 것에 매우 만족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더랍니다.
박완서 작가님은 '유쾌한 오해' 말미에 이렇게 썼어요.
- 이 세상 사람들이 다 나보다는 착해 보이는 날이 있다. 그날도 그런 날이었고, 그런 날은 살맛이 난다. -
이 책을 읽기 전 제가 받았던 '작은 기적'이 떠오르면서 제 마음을 그대로 대변한 문장이란 생각이 들었답니다.
세상이 아직은 살만 한 곳이라는 확신이 필요할 때, 세상살이에 용기가 필요할 때 읽어보세요. 우리 곁의 작은 기적을 발견하게 해 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