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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맑은돌 Jun 14. 2023

내 첫 구독자를 소개합니다

잘 지내고 계시죠? 와따시와 겡끼데스~

"어? 박 병장님, 이 사람 제 친군데 말입니다. 신문에 엄청 크게 나왔습니다. 와! 완전 신기합니다." 난 놀라서 복사를 하고 있는 대대장 당번병에게 소리치듯 말을 걸었다.


"아~ 씨. 왜 뭔데 또 호들갑이야? 뭐 핑클이 네 친구라도 되는 거야?" 얼굴이 뽀얗게 잘생긴 대대장 당번병은 복사기를 조작하다 말고 내가 읽고 있는 신문을 보러 두 걸음 가량 내 앞으로 걸어왔다.


"아, 뭐야? 연예인 아니잖아! 이 새끼가 이거, 누가 운동선수 사진 보여달래? 그리고 인마, 여기가 너 신문 보러 마실 나오는데야? 이게 이제 이등병 아니라 이거지? 이거 이거 완전히 빠졌네. 너네 행정관한테 확 찔러버린다. 알파 행정병 군기 좀 잡으라고! 신문 이리 내!" 당번병이 짜증 섞인 말투로 신문을 휙 낚아챘다.


"죄송합니다! 박 병장님이 바쁘신 것 같아서 책상에 있던 신문을 그냥 조금 보고 있었습니다." 정말로 복사하러 대대 본부 당번실에 올라왔다가 박 병장이 기다리라고 해서 잠시 책상에 있던 신문을 보고 있던 것뿐이었다.


"뭐? 얘가 누군데? 뭐...... 박세리? 처음 들어보는 앤 데? 첨 보는 애가 왜 이렇게 사진이 크게 나왔어?" 박 병장이 신문을 쭉 훑어보다가 둘둘 말아서 내 머리를 몇 번 친다.


"국민학교 때 2년 동안 같은 반이었던 친구가 신문에 나와서, 신기해서 얘기했던 겁니다. 죄송합니다." 나는 신문 뭉치가 아프다는 식으로 엄살을 부리며 박 병장에게 대답했다.


"야! 이 새끼야. 너 복사할 거 별로 없지? 빨리 복사하고 내려가! 여기서 농땡이 칠라고 하지 말고." 박 병장은 웃으며 계속 내 몸통을 신문으로 치고 있다. 


난 박 병장이 좀 공감 능력이 부족한 사람인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괜찮았다. 내일 아침, 나는 휴가를 나가는 날이다. 오늘은 날이 덥다. 빨리 복사를 마치고 우리 알파 포대로 다시 내려가야 한다. 햇볕은 따갑고 전투복은 두껍다. 복사를 몇 장 마친 뒤, 땀을 닦으며 포대로 복귀하는 20분 정도의 시간 동안 신문에서 본 국민학교 친구를 생각했다. '박세리.' 처음으로 내가 아는 사람이 유명인이 되어 매스컴에 나왔다는 것이 신기했다. 


나는 행정병이었다. 선임들이 신경 써줘서 휴가 가기 전날, 제일 처음 보초를 서고 나서는 행정반 책상에 앉아 부대일지를 작성하고 일기도 썼다. 아까 본 국민학교 친구 얘기도 적어 두었다. '이제 일찍 자야 되겠다. 내일은 휴가다.' 1998년 초여름이었다.




훈련소를 마치고 자대 배치를 받은 후에 거의 매일 일기를 썼다. 새벽에 보초가 끝나면 봉지라면 한 개를 끓여 먹고, 화장실 변기에 앉아 그날 있었던 일들을 기록했다. 선임들과 나눈 얘기, 보급 담배가 떨어져서 길바닥에서 주으러 다녔던 사소한 얘기부터 편지를 받은 얘기, 면회 때 느꼈던 기분들을 적었다. 처음으로 후임병을 못살게 굴었던 날도 다 시로 써서 적어두었다. 


드디어 휴가 당일. 연천에서 기차를 타고 의정부, 서울로 나왔다. 같이 휴가 나온 사람들은 여기서 대부분 헤어지고 나는 집이 있는 대전까지 가야 한다. 영등포 역에서 표를 끊고 대합실에 앉아 오랜만에 보는 민간인들을 바라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와! 미쳤다.' 갑자기 한 생각이 머릿속에 휙 하고 떠올랐다. 


'내가 일기장을 행정반 책상에 올려둔 것 같다.' 미치는 것 같았다. 내가 어제 부대일지를 쓰고 일지는 책꽂이에 잘 꽂아두었는데, 일기장은 건드리지 않은 것 같다. '아니야. 관물대 안으로 잘 집어넣었을 거야.'라고 희망적인 생각을 해보기도 했지만, 아닌 건 아니었다. 그건 분명히 내 책상 위에 있다. '미쳤네. 미쳤다.' 부리나케 영등포역 대합실의 화장실 옆으로 달려가 공중전화에 전화카드를 집어넣고 부대 행정반에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내 바로 위 선임이 받는다. "김 상병님. 혹시 제 책상 위에 검은색 노트 하나 있지 않습니까?" 


"아니. 없는데?" 김 상병이 대답하는 소리를 듣고, 난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분명히 내 책상에 있다.


"김 상병님. 제발 부탁인데 그거 읽지 마시고, 서랍에 잘 넣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제가 좋은 것 좀 사가지고 들어가겠습니다."


"뭐. 아무것도 없는데 뭘 어떻게 집어넣으라는 거야? 휴가 잘 다녀오고 복귀하면 보자고." 김 상병이 시치미를 뚝 뗀다. 나이 차이도 없는데, 여우 같고 얄밉다.


'우와 미치겠다. 그래도 휴가는 휴가니까, 다 잊고 부대 들어가서 생각하자.'라고 생각했다. 영등포역 개찰구로 터덜터덜 걸어 들어갔다.


김 상병, 김 병장, 포대장, 소대장, 행정 보급관, 성 중사, 박 하사. 그들은 이렇게 내가 쓴 글의 첫 구독자가 되었다.




난 글을 쓰며 스트레스를 푸는 것 같다. 2년 2개월간의 군 생활 스트레스를 일기로 풀어냈고, 여기 브런치에는 코로나 시기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럭저럭 일상의 스트레스 정도야 친구들과 얘기하고 술 한잔 하면서 풀기도 하지만, 그보다 큰 일들이 생기면 술을 마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신에 혼자 이렇게 글을 쓰며 시간을 보내게 되는 것 같다. 


난 요즘 글을 많이 쓴다. 지금도 발행하지 않고 혼자 일기처럼 쌓아놓은 글이 수십 편 있다. 슬프다. 그래도 스트레스는 조금 풀리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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