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다
배타성이 없고 철저한 익명으로 글을 쓰고 싶은데 내 이야기를 담은 글에서는 항상 나로 특정지어질 수밖에 없고 내가 누구인지 인식하는 사람들을 발견할 때마다 소름이 끼친다. 작가들은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글을 게재하거나 책을 출간하는데, 나는 그게 왜 이렇게 싫은지에 대해 고민해보게 된다.
내 글에는 공개글 보다 비공개 글이 더 많다. 타인에게 숨기고 싶은 내 모습이 있기 때문이다. 타인에 대한 감정과 평가, 나의 우울감과 쾌락, 사회적으로 용인되지 못한 지향성, 시시때때로 변하여 시간이 지나 부끄러워할 것만 같은 감정들을 차마 세상에 밝히고 싶지 않아 비공개 글로 나마 묵혀둔다.
누군가는 사랑에 있어 잘못된 집착과 질투를 심심찮게 내보이고, 돈에 대한 과한 집착이나 자유에 대한 갈망 등 자신의 의지를 부끄럼 없이 내보인다. 나는 이런 것을 표현하는 것이 왜 그렇게 어려울까? 인간이라면 누구나 퇴폐적인 욕구를 가지고 있을 수 있는데 그걸 표현하는 사람을 어리석게 보기도 한다.
수많은 고전소설을 읽다 보면 인간들은 본능에 꽤나 충실하다. 근친과 아이를 낳고, 돈과 명예 때문에 결혼을 하기도 하고, 복수도 서슴지 않게 하며 사람도 쉽게 죽인다. 하지만 우리는 고전을 읽으면서 주인공을 욕하기보단 작가의 표현력에 감탄하며 읽는다. 그럼 이제 현대 작품을 봐보자. 불륜 드라마에서 내연녀는 앙칼진 눈을 뜨며 떳떳하게 사랑을 하지만 시청자는 한 가정을 파탄 낸 죽일년이라며 욕한다. 이렇다. 사람들은 현대 사회에서 당장 내 주변이나 현시대에 일어날 법한 이야기는 대놓고 욕한다. 지나간 나치 정권에 대해서 조차 당장 비판을 할지어도 이미 지난 일이기에 왈가왈부해도 타격감이 없다. 오히려 유대인 희생자에 대한 애도의 목소리가 더 클 뿐. 지나간 일에 대해서 험담을 하는 것보다 현재 일어난 일에 대해서 험담하는 것이 더 흥미진진한 것은 당연한 것이니까.
서양인은 여러 가지 색을 가진 색연필 중에 가장 희소하거나 화려한 색을 고르지만, 동양인은 주로 흰색이나 검은색을 고른다. 여기에서 볼 수 있듯이 서양인은 자신의 의지와 의사를 표명하는 것에 전혀 거리낌이 없지만, 동양인들은 눈에 띄지 않게 집단에서 잘 융화되는 것을 선호한다. 우리의 교육현장에서 조차 아이한테 선생님 말씀 잘 듣고 문제 일으키지 않을 것을 당부한다.
지금은 방구석에 혼자 있는 시간이 많지만 나는 흔한 동양인 중 한 사람으로서 집단에서 배척당하기 싫고 부정적인 주목은 받고 싶지 않다. 그래서 잘 쓰인 글이라도 어떤 한 사람한테서라도 조명받을만한 이야기가 담긴 글을 공개하고 싶지 않은 거라 결론짓는다. 내 감정은 사회에 좀 억압되어 있음을 느낀다. 내 내면을 보이지 않음으로써 주변 사람들의 말에 암묵적인 동의를 보이며 마음속의 적이 점점 많아진다.
어떤 사람도 다른 어떤 사람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시간이 흐를수록 내가 달라지는데 내가 남을 어떻게 알고 남이 나를 어떻게 알리. 삶이 근본적으로 외로운 것이 이것 때문이지 않은가. 하지만 이것이 잘못됐다고 생각하면 외로워질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래도 우리는 이해할 수 없음을 받아들이면 완전치는 않아도 나를 깊게 이해해주는 사람이 있는 것만으로 되게 세상이 밝아 보이거든(유시민, 알쓸신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