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도리
여기는 베를린 서남쪽 부스(Booth)거리입니다. 베를린은 인구 350만 대도시지만 녹지가 많아 자연을 쉽게 느낄 수 있습니다. 베를린 작업은 작년 가을 파리에서 우연히 창조여행학교 친구들을 만나서 시작되었습니다. 작년 10월 산티아고 순례길을 마무리하고 파리에서 귀국을 기다리던 중 마침 그곳에 와있던 창조학교 친구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고, 에펠탑 앞에서 함께 촛불시위를 한 인연도 있지요.
올해 마침 4.9 통일평화재단의 지원사업 공모를 보고 문득 유럽 버스킹 여행을 준비 중이라는 창조학교 졸업생 친구들이 떠올랐습니다. 십대에서 이십대를 아우르는, 음악을 사랑하는 청년들과 함께 동서 냉전의 상징에서 이제 통일과 화합의 상징이 된 베를린에서 함께 작업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통일은 워낙 무거운 주제인데다 선뜻 이야기하기 어색한 시대가 되어버렸지만 그렇기 때문에 외려 더 필요한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ART-310’이라는 팀으로 활동하고 있는 이 청(소)년들이 통일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또 어떻게 이야기할지 궁금하기도 했습니다.
이왕 베를린에서 작업하는 것, 노래만 만들기보다 베를린 장벽의 풍경을 담는 뮤직 비디오를 만드는 것도 좋겠다 생각했어요. 요즘 친구들은 영상과 친숙한 세대이기도 하니 영상 작업도 재미있겠지 싶었습니다. 오랫동안 예술강사로 청소년들과 영상작업을 해온 김수진 선생님이 마침 세계여행을 하고 있어 베를린에서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보름 전, 베를린에서 ART-310의 여섯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이미 두 달 반 동안 빠리, 브뤼셀, 프라하 등 유럽의 주요도시를 거쳐 버스킹 여행을 해오던 중에 가방을 도둑맞고, 테러에 예민해진 현지 경찰과 숨바꼭질을 하고, 편치 않은 숙소에서 연습과 생활을 해결하느라 많이 지쳐있기도 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첫 번째 워크숍은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걸로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다니면서 통일 노래 생각하면 뭐가 제일 어려웠어?”
“통일이라고 하면 아무것도 안 떠올라요. 안될 것 같고,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도 없는 것 같고.”
“그럼 그걸 쓰면 되겠네”
“정말 그래도 돼요? 그래도 통일 노랜데.”
“안될 게 뭐 있나. ‘통일 안될 거 같아, 난 사실 관심 없어’ 솔직하게 쓰면 되지 뭐.”
그러고 나니 모두 와하하 웃습니다. 그런 뒤에야 자연스레 이런 저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실 외국 친구들이 ‘너희 어디에서 왔니?’라고 물어서 ‘코리아’라고 답하면 꼭 ‘노스? 사우스?’ 묻는 게 너무 짜증났다 등등, 다니면서 느낀 점들이 생생하게 튀어나옵니다. 그렇게 각자의 이야기를 노래로 써보기로 했고, 쉽지 않은 과정이었지만 마침내 나흘 만에 여섯 곡의 노래가 탄생했습니다.
친구들에게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김수진 선생님의 몸작업(바디워크)이었습니다. 알렉산더 테크닉과 두개천골요법을 응용한 핸즈온으로 친구들의 긴장된 몸을 풀어주자 마음이 덩달아 편해졌습니다. 처음에는 ‘무슨 약을 파나’하며 심드렁했던 친구들의 얼굴색이 환하게 밝아지고 키와 몸이 한 뼘은 커진 듯했습니다. 공연할 때의 무리한 자세, 힘든 여행에서 몸을 굳게 만들던 습관들을 인식하자 다음 버스킹에서 더 좋은 소리와 퍼포먼스가 나와서 다들 놀랐지요. 이후에 진행된 뮤직비디오 워크샵 역시 몸과 마음이 열리면서 훨씬 효과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우리는 무너진 베를린 장벽의 흔적이 남아있는 마우어 파크와 장벽 박물관, 1.3km에 걸친 벽화 장벽이자 뮤직비디오의 주요 촬영장소인 이스트사이드 갤러리, 동서 베를린을 가르던 검문소가 남아 있는 체크포인트 찰리 같은 공간들도 살펴보았습니다. 여섯 곡의 노래 중 한 곡을 골라 다 함께 편곡 작업을 했고, 컴퓨터가 다운되는 바람에 녹음한 파일이 몽땅 날아가는 우여곡절 끝에 겨우 녹음을 마쳤습니다. 연일 비가 내리다 운 좋게 하늘이 파랗게 개인 날, 이스트사이드 갤러리의 벽화 앞에서 맘껏 뛰놀며 스마트폰을 활용한 뮤직비디오 촬영도 마쳤습니다.
그 와중에 ART-310 친구들은 예정했던 버스킹 여행을 이어갈 것인지 계속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오랜 여행으로 지치기도 했고, 멤버들 간의 갈등도 쌓여갔거든요. 결국 한 사람이 남은 여정을 포기하고 돌아가기로 했을 때 멤버 전체가 이 문제를 놓고 각자 자기 마음을 깊이 들여다보기로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결국 모두 자신에게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확인하게 되었고, 충분한 대화와 공감 끝에 모두에게 가장 이로운 방향으로 합의가 이루어졌습니다. 예정했던 유럽 일정을 축소하고 한국으로 돌아가 버스킹 여정을 이어가겠다 결심하는 친구들은 빛이 날 정도로 가볍고 유쾌한 얼굴이었습니다. 이러한 결정 과정을 보는 동안 통일은 결국 이렇게 지난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 올지 모르겠다 싶었습니다.
여정을 마무리하는 마지막 버스킹. 늦은 시각 베를린 중심가인 알렉산더 플랏츠엔 지나는 사람들이 많지는 않았지만 ART-310 여섯 명의 노래는 어느 때보다 멋지고 아름다웠습니다. 김수진 선생님은 그 마지막 버스킹 공연과 베를린을 떠나 귀국길에 오르던 여섯 친구들의 모습을 영상으로 담았습니다.
그렇게 보름 남짓 휴일도 없이 매일 함께 워크숍에 촬영에 녹음에 버스킹 공연 스텝으로 시간을 보낸 우리는 이제야 휴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스쳐만 보던 베를린의 다양한 모습을 조금 더 살필까 합니다. 다음 행선지는 도시에서 자급자립 공동체를 만들어낸 우파 파브릭이 될 듯합니다. 버려진 영화사 부지를 활용해 자립의 원칙을 지켜나가면서 튼튼히 생활문화의 공동체를 꾸려냈다고 합니다. 문화예술교육활동도 활발하다하니 힘닿는 데 까지 보고 듣고 담아 돌아갈 생각입니다. 저는 이번 주말 현지 교민들과 모인 자리에서 <소곤소곤 콘서트>를 열고, 14일은 위안부 할머님들 - 일본군 성노예 문제 해결을 위한 집회에서 공연한 뒤에 귀국할 예정입니다. 살던 집과 물건을 다 정리하고 발길 닿는 대로 세계여행을 하고 있는 김수진 선생님은 다양한 사람들과 문화, 공동체 등을 통한 배움을 찾아서 다시 여정을 이어갈 계획입니다.
마을온예술의 다양한 활동 소식은 카톡으로 간간히 눈팅만 겨우 하고 있습니다만 좋은 소식들이 연일 이어지는 것 같아 기분이 좋습니다. 서울은 더운 날이 계속된다 들었습니다. 베를린의 여름도 슬슬 달아오르고 있네요. 다시 만날 날까지 모두 건강하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