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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회중년생 홍대리 Jul 03. 2021

회초리보다 말 한마디 험담이 더 큰 상처가 될 수 있다

둘째 성준이가 초등학교 4학년에 올라가고 얼마 되지 않을 때였다. 담임선생님에게서 전화가 왔는데 성준이가 갑자기 울고불고 토하고 난리가 났다는 거였다.

게다가 양호 선생님이 심장이 너무 급히 뛴다며 병원에 데려가 정밀 검진을 받아보라고 말했다니, 부모로서 얼마나 놀랐겠는가? 정말 내 심장이 밖으로 빠져나올 것만 같았다. 그런데 성준이는 첫째 성호처럼 성격은 내성적이어도 무척 건강한 아이였다. 그런 아이가 심장이 약하다고? 분명 무슨 일이 있다는 예감에 자세히 물어보자 담임선생님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실은 성준이가 수학 문제를 하나도 못 풀고 가르쳐줘도 친구들에 비해 이해가 너무 늦고 답답해서 ‘니는 마 책가방 싸서 3학년 가삐라.’ 하고 야단을 좀 쳤습니다. 그랬더니 그때부터 갑자기 울고불고 토하는데…….”


수화기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눈앞이 아득해졌다. 선생님의 매몰찬 질책에 놀라 울다가 양호실 침대 위에 기진맥진 누워 있을 아이를 생각하니 억장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성준이는 수학에 관심이 없었다. 당연히 성적도 신통치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굳이 학원에 보내 뒤떨어진 공부를 시키지 않고 있었다. 대신 신나게 뛰어놀고, 집에서 마음껏 책을 읽히고 있었다. 나는 학습의 기본은 ‘독서’라고 굳게 믿었고, 학습 발달이 늦을 때는 오히려 더더욱 독서가 제일 좋은 처방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잘하면 칭찬, 못하면 격려’로 아이를 대했기에, 문제를 못 푼다고 책가방 싸서 3학년 교실로 내려가라는 이야기를 들었으니 아이의 스트레스가 얼마나 컸겠는가.


다른 학부모님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직접적인 체벌은 아니지만, 내 아이가 선생님의 질책에 울고불고 토했다면? 당장 학교로 뛰어가 한바탕 분을 풀 부모님들이 많지 않을까?

솔직히 나도 그러고 싶었다. 내 아이가 정신적 상처를 받았는데 어떻게 가만있을 수 있겠는가.




우리가 평생을 가슴속 깊이 감추고 살아가는 트라우마(Trauma,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보면 육체적 고통만큼 정신적 상처도 큰 몫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렸을 적 누군가에게서 들었던 가슴 아픈 한마디 말이 낸 깊은 상처가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고 또렷이 남아 있지 않던가. 따라서 “저는 아이를 절대 때리지 않아요.”라고 자신하는 부모라도 모두 좋은 부모가 아닐 수도 있다. 직접 매를 들지는 않아도 대신 말로 아이를 매일같이 때릴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참았다. 학교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참고 또 참으며 끓어오르는 분기를 억눌렀다. 혹시라도 성준이가 이후로 다른 피해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안 들었다면 거짓말 이리라. 많은 엄마들이 학교의 불합리한 처사에도 벙어리 냉가슴 앓듯 끙끙 앓는 까닭이 ‘내 아이한테 해가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지 않은가. 담임선생님에게 화를 내봤자 돌아올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요동치는 가슴을 가라앉히고 말했다.


“성준이가 충격을 받은 거 같네요. 3학년 동생들 교실에 가라고 했으니…… 성준이가 매사 느리니 선생님께서 오죽 답답하면 그랬겠습니까? 그러면 선생님, 준이를 위해 엄마인 제가 뭘 어쩌면 되겠습니까? 선생님께서 말씀을 해주시면 노력해볼게요.”

“예? 아, 예…….”

내 차분한 반응 때문이었을까. 담임선생님 목소리에는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날 오후 학교에서 힘없이 돌아온 아이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큰일을 겪었음에도 일부러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창피함 때문이었을까. 자존심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내가 걱정할까 봐 그랬을까. 이럴 때 보면 의외로 아이들이 부모보다 속이 깊을 때가 있다. 문제가 있어도 혼자 끙끙 앓는 경우가 많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물었다.


“준아, 오늘 학교에서 재미있었던 일 없었어?”

“……응, 그냥 그랬어.”


아무 일 없었다고 짐짓 둘러대는 아이를 보며 가슴이 찢어졌다. 저 상처를 어떻게 치유할 수 있을까! 자칫 잘못하면 평생 학습 부진아란 콤플렉스를 가질 텐데…… 걱정이 태산이었다.

그런데 다음 날 학교에서 돌아온 준이가 편지 한 통을 내밀었다.


“선생님이 엄마 갖다 주래.”

“…….”


무슨 일인가 싶어 봉투를 뜯어보니 손수 쓴 편지지 두 장이 곱게 접혀 있었다. 내용인 즉 말썽꾸러기 35명 아이들을 일일이 돌보고 가르치느라 많이 힘들고 지쳐가고 있었는데, 학습 진도가 떨어지는 성준이를 보고 그만 참지 못하고 야단을 친 게 그리됐다며, 친구들과 잘 어울리고 성격도 순한 성준이가 큰 상처를 받은 것 같아 정말 죄송하다는 내용이었다. 더해 아이를 학원에 보내 학습 진도를 따라올 수 있게 해 주시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직접 자필로 써서 보낸 편지에는 자신의 실수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고치려는 담임선생님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선생님의 따뜻한 마음이 전달되는 것 같아 그제야 한시름 놓은 나는 이번 일을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야겠다 싶어 곧바로 담임선생님에게 전화해 감사의 말을 하고 간곡히 부탁드렸다. 아이가 또래보다 많이 부족하고 느려 힘드시겠지만 저도 노력할 테니 질책 대신 가끔 칭찬을 해주시면 감사하겠다고.


그런데 문제는 성준이 본인이었다. 며칠이 지나도 성준이는 그 일에 대해서 절대 얘기하지 않았다. 아무리 유도 질문을 해도 묵묵부답이었다. 그대로 놔두면 평생 상처가 될 수 있을 거란 걱정에, 나는 이런저런 얘기 끝에 먼저 말을 꺼냈다.


“준아, 엄마 같으면 학교 가기 싫겠다. 4학년한테 3학년 교실에 가라고 하면.”

그 순간이었다. 성준이의 눈에서 투두둑 굵은 눈물방울이 봇물 터지듯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엄마도 알고 있었어?”

“응, 엄마는 성준이가 이야기해줄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는데, 성준이가 많이 힘들어하는 것 같아서…….”

“나 있지 엄마…… 매일 학교 뒷문에 붙어 있다가 땡, 하고 1교시 종 치고 애들이 다 교실로 들어가고 아무도 없을 때 교실 뒷문으로 살짝 들어갔어. 우리 교실 가려면 3학년 교실 지나야 해서 창피했걸랑. 3학년들이랑 우리 반 애들이 놀리는 거 같아서…….”


지레 겁을 먹고 매 순간 두려움에 떨었을 아이 생각에 눈앞이 깜깜했다. 그 작은 가슴에 얼마나 한이 맺혔을까. 서럽게 우는 아이를 꼭 끌어안고 나도 펑펑 함께 울었다.


“괜찮아, 괜찮아, 성준아. 너는 단지 아주 조금 늦을 뿐이야. 늦어도 괜찮아…… 빵점 맞아도 엄마는 아무렇지도 않아. 괜찮아, 괜찮아…….”


나는 발명왕 에디슨 이야기로 성준이를 응원하고 또 응원했다.


“에디슨도 공부 못해서 만날 꾸지람 들었지만 어떻게 됐어? 세상에서 제일 훌륭한 발명가가 되었잖아. 엄마는 너를 믿어. 너는 에디슨이야. 단지 지금은 사람들이 못 알아볼 뿐이야. 준이는 이다음에 커서 큰사람이 될 거야.”


한동안 의기소침한 모습을 보이던 성준이는 나와 남편의 꾸준한 응원과 노력으로 조금씩 원래의 밝은 성격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특히 담임선생님이 질책보다는 칭찬과 격려로 성준이를 대해주기 시작하니, 얼마 뒤부터는 아이의 성격이 더 밝고 자신감 있게 변해갈 수 있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지 않는가!




성준이는 이후로도 수학 점수가 언제나 평균 이하를 밑돌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수학에 관심이 없어 대학도 수학 성적과는 관계없는 학교를 택했을 정도다. 그러나 나는 단 한 번도 성준이에게 수학을 강요하지 않았다. 고액의 수학과외를 시켜 어느 정도 수학 점수를 끌어올릴 수는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싫어하는 수학을 마지못해 붙들고 있는 그 고통의 시간, 아이가 희생해야 할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아까웠다.


성준이에게는 수학 말고도 스스로 즐거워하고 잘할 수 있는 무수한 일들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 성준이는 운동을 정말 좋아한다. 특히 농구를 좋아하는데 길거리 농구에서는 울산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다. 성준이는 친구들과 농구를 하면서 팀워크를 배울 수 있었고, 탄탄한 체력으로 공부에 집중해 고 3 때 무려 성적을 200퍼센트 올려 자신이 원하는 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다.


많은 엄마와 선생님들이 또래보다 늦게 성장하는 아이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게 현실이다. 그러나 가장 힘든 사람은 바로 아이 자신이다. 아이라고 눈치를 못 채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가장 민감하다. 그럴 때일수록 부모는 더 믿어줘야 한다. 아이들이 무수히 많은 상처에 좌절할 때 엄마란 존재는 치유와 재충전의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아이가 좌절할수록 더 큰 가능성을 열어주자.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나 자신을 믿는 힘부터 필요하다. 내가 나를 믿을 수 있어야, 내 아이를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잘할 수 있다.’고 아이를 격려하는 데는 학벌도 경제력도 그 어느 것도 필요치 않다. 한마디 말이 아이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고, 힘을 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아이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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