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봄날의 떡집

2. 새벽이슬 맺힐 무렵(2)

by 신성화

떡집의 뒷문을 나서 마당을 지나면 나오는 2층 건물이 봄나래가 사는 집이었다. 떡집과 건물을 잇는 마당에 우두커니 선 동백나무 위로 조금 전 동박새가 날아왔지만 봄나래는 그 존재를 알길 없이 서재에서 편지를 읽고 있었다. 벌써 열여섯 통째. 봄나래는 지금 막 손에 든 편지를 오늘 읽을 마지막 선물로 정한 참이었다.

[미유 작가님. 작품 '꿈의 연인'이 담긴 턴테이블로 음악을 들으며 편지를 쓰고 있어요. 작가님이 좋아하시는 H의 Moon이 잔잔히 귓가에 흐르고 있답니다. '꿈의 연인'을 그릴 때 계속 이 음악을 들으셨다는 이야기를 책에서 읽었어요. 음악과 작가님의 꿈 속 풍경 그리고 사랑하는 마음이 작품 안에 담겼나봐요. 앞으로도 좋은 그림 그려주시길 기다릴게요. - 유리, 혁.]

편지에 적힌 글씨체가 꽤 어른스러웠기에 봄나래는 처음에 연세가 지긋한 분이 보내온 편지가 아닐까 생각했다. 편지에 적힌 내용을 끝까지 읽고 나니 생각이 바뀌었지만.


나란히 적힌 이름 뒤에 붙어있는 귀여운 꽃 모양 스티커와 옅은 노란빛 편지지. 봄나래는 이들이 아마 풋풋한 사랑을 하고 있는 나이일거라 짐작했다.


봄나래는 손에 쥔 여러 장의 편지들을 잘 정리해 보관함에 담았다.


"새로 하나 사야겠네."


보관함에 가득한 편지들이 뚜껑을 밀어냈다. 봄나래는 어쩔 수 없이 뚜껑을 걸치듯 올려두었다.


다채로운 편지봉투의 색만큼이나 안에 담긴 내용들도 다양했다. 얼굴 없는 사람에게 보내는 얼굴 없는 사람들의 편지에는 많은 일들이 담겨 있었다. 그림을 멈춘 지 3년. 그래도 편지는 늘 도착했다.


서재를 나선 봄나래는 굳게 닫힌 오른쪽 끝 방문에 잠깐 시선을 주고 몸을 왼쪽으로 돌렸다.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지나 왼쪽 끝 침실로 들어간 봄나래가 침대 위에 털썩 누웠다.


이미 하루를 마무리 했어야 할 늦은 밤. 마을에서도 외진 곳에 위치한 집은 적막했다. 모든 것이 한풀 가라앉고 고요해지는 순간의 느낌은 봄나래에게 많은 생각을 몰고 왔다. 눈꺼풀은 무겁고, 생각은 복잡한데, 잠은 오지 않았다.


봄나래는 억지로 눈을 감았다. 잠이 오기를, 편한 잠에 들기를 간절히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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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해. 왜 발바닥이 간지럽지?"


분명 침대 위에 누워 있었는데 봄나래는 맨발바닥에 간지러움을 느꼈다. 새로 돋아난 잔디를 밟고 있는 것 같은, 뾰족하고 까칠하면서 부드러운 느낌이었다. 발바닥을 확인하려는데 심지어 다리가 움직이고 있었다.


봄나래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주위가 모두 깜깜했고, 유일하게 보이는 건 먼 곳의 흐린 형상이었다. 꿈이라기엔 생생하고, 현실이라면 몽유병일 이 상황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지만 봄나래는 계속 걸었다.


볼 때는 아주 먼 거리일 거라 생각했는데 흐릿한 형상이 또렷해 진건 금방이었다. 2층 방에서 마당으로 내려가는 정도의 걸음. 딱 그정도였다.


"동백나무?"


봄나래가 걸음을 우뚝 멈춰섰다.


앞에 있는 나무는 마당에 심어둔 동백나무가 분명했다. 은하수리로 이사를 온 이후 꽃을 피우지 않아 심심찮게 들여다봤기에 다른 동백나무와 헷갈릴 일은 없었다. 동백나무에 가지에 꽃 대신 걸어둔 붉은 복주머니도 똑같았다.


봄나래가 동백나무에 손을 뻗는데 삑-하는 울음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새 소리잖아."


적당히 구색만 갖춰둔 마당이지만 이따금씩 새들이 날아와 목소리를 들려주곤 했는데 방금 전 들은 새 소리는 처음 듣는 음색이었다.


"안녕?"


갑작스레 들려온 어린아이의 목소리에 봄나래가 주변으로 고개를 돌리며 소리의 출처를 찾았다. 주변은 그저 어둑할 뿐 여전히 보이는 건 동백나무뿐이었다.


"떡을 만들어. 이걸로."


또 다시 들려온 목소리는 확실히 동백나무 쪽에서 난 소리였다.


"누... 누구세요?"


봄나래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지만 아무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봄나래가 살짝 떨리는 손을 들어 동백나무 쪽으로 내밀었다. 사람의 형상은 보이지 않으니 어떤 장치가 있을 것이었다.


봄나래의 손끝이 동백나무의 이파리에 닿는 순간, 섬광이 번쩍였다. 갑작스러운 눈부심에 봄나래가 눈을 감았다. 빛이 서서히 가라앉는 것이 느껴지자 봄나래가 천천히 눈을 떴다.


"이게 뭐야."


봄나래의 눈에 들어온 건 동백나무에 나란히 달린 복숭아와 사과였다. 봄나래가 손을 뻗어 한 손으로 복숭아를 따고, 다른 한 손으로 사과를 땄다. 양손에 닿은 과일의 감촉이 실제 과일을 만지는 것처럼 생생했다.


봄나래가 눈을 깜빡이자 손에 닿은 과육의 단단함은 사라지고 이불의 부드러움이 느껴졌다. 엎드린 상태로 살포시 눈을 뜬 봄나래는 이곳이 침대 위라는 사실을 확실히 알았다. 보들보들한 이불의 촉감이 맨발에 닿았다.


"꿈이었네. 생생한."


엎드려 웅얼거리던 봄나래가 황당한 꿈을 되짚어보며 침대에서 몸을 바로 뉘었다.


"하...... 얼마만에 꾼 꿈이야. 그날 이후로 꿈을 꾼 적이 없는 것 같은데."


봄나래가 손바닥을 이마에 올렸다 내렸다. 주위를 보니 암막커튼 탓에 시간이 가늠되지 않았다. 봄나래는 침대를 더듬어 핸드폰을 들었다. 3시 39분이라는 시간을 보여주는 핸드폰 불빛에 봄나래가 눈을 찡그렸다.


"애매한 시간이네."


봄나래는 비몽사몽 했지만 한 가지는 알았다. 다시 잠들 수 없다는 것. 얼마 지나지 않아 알람이 울릴 것이었다.


점점 달아나는 잠을 붙잡을 생각도 없이 봄나래는 꿈 꾼 내용을 다시 떠올려보았다. 꿈에서 무언가를 받으면 좋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는 생각도 스쳤다.


"좋은 일이 생기려나. 혹시 복권을 사야 하나."


놀란 마음도 있었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은 꿈이라고 여기며 봄나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꿈에서 잠깐 걸었을 뿐인데 왠지 갈증이 났다.


1층 주방으로 내려간 봄나래가 컵에 물을 따라 마셨다. 갈증을 해소하면서도 시선은 자꾸 주방 창문 밖으로 보이는 마당에 닿았다. 남은 물을 전부 삼킨 봄나래가 일부러 시선을 거두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야. 동백나무랑 복숭아랑 사과의 조합은."


말과 달리 봄나래의 걸음은 거실로 향하고 있었다.


마당과 이어진 거실창 앞에 서서 봄나래는 동백나무가 있는 곳을 응시했다. 곧 그믐을 앞뒀기에 달빛 대신 별빛이 빛나는 새벽이었다.


봄나래는 거실창을 열고 마당으로 발을 내딛었다. 새벽 찬 공기의 냄새가 풍겨왔고, 바람 없이 고요한 날이었다. 맨발로 내딛은 잔디에는 이슬이 맺혀 있었다. 냉기와 물기가 잔디의 뾰족함에 섞여 발바닥을 간질였다. 봄나래의 숨소리가 가빠지고 있었다.


동백나무 앞에 멈춰선 봄나래는 차갑던 발바닥의 감각마저 잊어버렸다.


"이게 무슨......"


동백나무에 누가 걸어놓은 것처럼 복숭아와 사과가 달려 있었다. 그곳에 있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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