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얼굴에 핀 꽃

by 신성화

특별히 12시까지만 서점을 운영하는 날이라 그런지 오늘따라 손님이 없었다. 읽던 책을 한 손으로 누르고 다른 손으로 핸드폰을 확인했다. 11시 27분이었다.


어제 오후부터 읽기 시작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이제 겨우 반을 넘어가고 있었다. 몇 년 전쯤 이미 한 번 읽었지만 얼마 전 영화를 보고 나서 다시 찾게 된 책이었다. 영화를 보고나니 책 속의 인물들이 영화 속 인물들의 얼굴로 읽혔다. 영화를 보기 전 내가 상상했던 스칼렛 오하라의 모습이 어땠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이제 내게 스칼렛 오하라는 배우 비비안 리의 얼굴과 함께였다. 책 속의 줄거리가 영화 장면과 오버랩 되고 있었다. 상상력을 제한하기는 해도 나쁘지는 않았다.


책을 몇 장 더 읽다가 덮었다. 엉덩이가 들썩여 책의 내용이 더 이상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시 시간을 확인하니 11시 33분. 기다리는 순간을 맞이하기까지 시간이 지루하게 흐르고 있었다.


평소에 서점 마감시간은 오후 10시다. 5분 전부터 마감 준비를 하면 10시 15분쯤 모든 정리가 끝난다.


이십 여분의 시간이 남은 지금. 아직 정리하기에는 이른 시간. 오늘만큼은 조금 일찍 마감 준비를 해야지. 손님이 없을 것 같아서 바로 문을 닫고 싶었지만 약속된 시간을 갑작스럽게 바꿀 수는 없었다.


방금 1분이 지나 11시 34분이 됐으니, 남은 27분의 시간 동안 혹시라도 이곳을 찾는 손님이 있을지도 몰랐다. 있을지 없을지 모를 손님이지만 헛된 발걸음을 하게 할 수는 없었다.


마음이 들떠 괜히 서점 안을 서성였다. 딱히 할 일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할 일이 있었더라도 들뜬 마음이 가라앉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늘은 며칠의 휴가를 위한 첫 날이었다. 한 달 전부터 공지를 해놓았으니 그때부터 계획된 여행이다. 지난 6년 여간 정기휴무일인 월요일과 7월 첫째 주 일주일 동안의 여름휴가를 뺀 다른 날 쉬는 것은 처음이었다.


급작스러운 휴가의 이유는 단순했다. 11월 어느 날, 친구인 화가 희정이가 이번 겨울에 뭐가 보고 싶은지 물었고, 나는 무심코 겨울바다라는 대답을 건넸다.


겨울바다가 보고 싶었다. 급히 바다만 보고 돌아오는 게 아니라 며칠 간 머물고 싶었다. 몇 년 간 여름바다만 봤으니 겨울바다가 보고 싶었던 걸까. 이유는 모르겠지만 무조건 겨울바다가 보고 싶었다. 추운 걸 싫어해 겨울을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희정이가 당장에 작업실을 빌려주겠다고 나섰다.


"12월 셋째 주에 내가 며칠 영릉에 머물 거야. 작업 마무리 때문에 같이 머물기는 어려울 것 같고, 음, 그 다음 주에 와서 며칠 머물다 가. 내가 정리해 놓을게. 먹을 것도 다 준비해 놓을 테니까 몸만 왔다 가면 돼. 이사 날짜 안 맞아서 네가 며칠 재워준 보답이야. 그러니까 무조건 다녀와야 해. 알았지?"


서점 문을 닫기가 어려워 고민하는 내게, 희정이는 이번만큼은 자신의 말을 들으라고 했었다. 막무가내였다.


알았다는 나의 대답을 들은 희정이는 바로 컴퓨터 앞으로 가더니 빠르게 공지사항을 적고 다섯 장이나 프린트했다. 서점 입구와 카운터를 비롯해 눈에 잘 보이는 곳에 턱,하니 붙여 놓고는 나를 바라보며 씩 웃었다.


그날의 희정이가 떠올랐다.


스칼렛 오하라를 닮은 친구. (비비안 리를 닮은 건 아니다.)


희정이가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나는 텔레비전 화면 속이나 핸드폰 안에서 흐르는 영상으로 겨울바다를 만났겠지.


몇 년 만에 가는 영릉이더라. 희정이가 작업실을 지은 지 얼마 안 돼서 처음 가봤으니.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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